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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가 유럽으로 가서 꽃피운 곳은 영국이지만 유럽에 차가 도착하기 이미 100년도 더 전부터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바다를 향한 모험을 시작했고,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이어받았다. 이들 나라가 개척한 항로를 따라서 동양의 차는 유럽으로의 여행길에 올랐다.
포르투갈, 아시아 바닷길을 열다
바스쿠 다가마(Vasco da Gama, 1469~1524)는 1498년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명령으로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해안 캘리컷(지금의 코지코드)에 도착한다. 이렇게 바닷길을 통해 시작된 유럽의 아시아 진출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면서 비로소 세계가 하나가 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고, 소위 말하는 대항해 시대가 도래했다.
포르투갈이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개척한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유럽 상류층 사회에서의 높은 수요로 같은 무게의 금만큼이나 비쌌다는 향신료를 직접 구하고자 원산지인 인도로 가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당시 중동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을 무찌르기 위해 동방에 있다는 전설 속의 기독교 왕(프레스터 존)을 찾기 위해서였다.
향신료는 유럽 상류층이 부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의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이며, 이는 주로 베네치아와의 중계 무역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그러나 베네치아에 동방의 물품을 공급하던 지중해 동부 지역이 오스만튀르크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물품 공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고 가격 또한 점점 더 치솟았다. 이런 상황에서 포르투갈의 사업적 마인드와 오스만튀르크에 대항해서 싸우려는 교황청의 의견이 맞았던 것이다.
16세기 초반부터 포르투갈을 필두로 한 유럽인들은 인도를 중심으로 무역을 시작해 동남아와 동북아까지 무역 범위를 점차 확대해왔다. 마침내 중국과 일본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차와 만나게 되었다.
네덜란드, 홍차를 유럽에 소개하다
아시아와의 무역에 있어 포르투갈이 개척해놓은 항로를 따라 동아시아의 바다로 온 네덜란드는 1596년 인도네시아 자와 섬의 반탐에 무역 기지를 세우고 이어서 일본에까지 진출해 무역 기지를 개설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는 차를 알게 되었고 1606년에 처음 차가 유럽으로 수입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기록에 남겨진 첫 사례는 1610년이다.
1637년경에는 상당한 양의 차를 수입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상류층을 중심으로 차 음용이 꽤 이뤄졌던 듯하다.
이 초기에는 차가 의료상의 목적으로 주로 약국에서 판매되었고, 1650년경에는 식료품점에서도 판매되었으며, 167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귀족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확산되었던 듯하다.
영국, 차를 알게 되다
영국에 차가 언제 처음 들어왔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641년 영국의 양조업자들이 따뜻한 맥주를 홍보할 목적으로 발표한 「따뜻한 맥주에 대한 논문(A Treatise on Warm Beer)」에 당시 영국에 알려진 모든 뜨거운 음료를 나열했는데 여기에 차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이 무렵까지 영국에서 차가 음용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한다. 차의 거래를 기록한 첫 번째 사람으로 알려진 런던 상인인 토머스 개러웨이의 1657년 기록에 따르면 이전에도 런던에서 차가 팔렸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차는 1641년 이후 언젠가부터 영국에서 음용된 듯하다.
1658년 술탄 헤드라는 커피하우스에서 차를 건강에 좋은 음료라고 소개한 것이 차에 관한 영국에서의 첫 번째 광고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이때 처음으로 영국에 차가 들어 왔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차는 아주 천천히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수입된 물량과 가격을 보면 알 수 있다.
차는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에 소개되었는데 1660년 시점에서도 수입된 차는 겨우 226킬로그램에 불과했다. 영국에서 차는 엄청나게 귀한 사치품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1666년에 영국 왕 찰스 2세에게 아주 비싼 가격으로 약 10킬로그램을 제공했을 정도로 말이다.
캐서린 브라간자
영국 정치사이지만 크롬웰이 실각하고 왕정이 복구되면서 찰스 2세가 왕위에 올랐고 1662년에는 포르투갈의 공주인 캐서린 브라간자(Catherine of Braganza)를 아내로 맞이한다. 영국의 군사력이 필요했던 포르투갈과 아시아에서 교두보 확보가 지지부진했던 영국이 아시아에 영향력을 떨치던 포르투갈의 힘을 얻기 위한 정략적 배경이 있었지만, 영국 홍차의 시각에서 봤을 때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취지에 맞게 캐서린 브라간자는 지참금으로 인도의 봄베이(현재의 뭄바이)와 일곱 척의 배에 가득 실은 설탕, 그리고 자신이 마실 차를 가져왔다. 설탕도 지참금이 될 만큼 그 당시에는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홍차와 설탕의 관계를 고려하면(홍차를 위한 설탕? 설탕을 위한 홍차? 참조) 이 또한 역사의 필연적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시아에서 처음 차를 만난 것이 포르투갈이었으므로 아마도 공주는 오랫동안 차를 마셔왔을 것이며, 게다가 찰스 2세 또한 크롬웰의 통치 기간 네덜란드에 망명해 있으면서 차 음용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캐서린이 오기 전 영국에서 차는 겨우 소개된 수준에 불과했고, 그것마저도 주로 약으로 음용했다. 그러나 궁전에서 왕비가 차를 마시기 시작하자 귀족사회에서 차를 알게 되고 차를 맛보는 것이 상류층의 관심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캐서린 왕비 때부터 영국에서 홍차를 음료로 하는 전통이 작게나마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수요는 미미했고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다. 1678년 런던에 도착한 약 2톤의 물량조차도 당시 사람들에겐 놀랄 만큼 많은 양이었다.
차 음용의 느린 확산
개러웨이스 커피하우스에서 차를 팔기 시작한 이후 30여 년이 지난 1700년경 수입량은 9톤에 머물렀다. 9톤이면 우리가 거리에서 보는 큰 트럭 한 대 분량에 불과하다. 물론 이 무렵 이후 차의 수입량은 그전의 30년 동안보다 상대적으로 증가하긴 했다.
1721년에 공식적인 차 수입량은 453톤이다. 한 잔에 2그램을 소비한다고 가정하고 당시 영국 인구로 나누어보면 전 인구가 1년에 32잔을 마신 것으로 계산된다.
이 개념이 언뜻 와닿지 않겠지만, 당시 영국인들 중 그나마 여유 있는 상위 20퍼센트가 차를 마셨다고 가정하면, 거의 이틀에 한 잔도 마시지 못했다고 보면 된다.
70년 뒤인 1790년에는 7300톤으로 증가하고, 위의 기준으로 상위 20퍼센트가 마셨다고 보면 하루에 약 4잔, 그러나 이 기간 음용 인구 자체가 엄청나게 증가했다고 볼 때 인구의 50퍼센트가 마셨다면 하루에 약 1.6잔으로 계산된다.각주1)
우리나라의 커피 음용 빈도와 비교하면 하루 1.6잔이 적어 보이지 않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커피는 여전히 기호 음료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홍차는 적어도 식사 때만이라도 꼭 있어야 할 필수품이었다. 적어도 홍차를 마시는 계급에서는. 그리고 이미 18세기 말경에는 아주 가난한 사람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민의 식사 시간에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품이 되어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대강은 접해본 이런 역사를 여기서 상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머나먼 중국 땅에서 들여온 낯선 상품이 영국에서 확산되는 과정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웠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위에서 본 것처럼 차는 수입 이후 1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귀족들만 마실 수 있는 음료였다. 이런 느린 속도로 차가 확산된 것은 비싼 가격 때문이었다. 1730년이 지나면서야 겨우 영국 동인도회사가 아시아에서 차를 정기적으로 들여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왕복 2년 이상 걸리는 먼 거리는 많은 비용과 위험이 뒤따라 차의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게 만들었다.
또 하나 차의 가격이 비싸진 것은 세금 때문이었다. 세금은 차의 소비에 장애가 될 정도로 지속적으로 높게 책정되었고, 정부의 필요에 따라 세율이 변경되기도 했으며, 전쟁 등으로 정부가 돈이 필요할 때면 추가로 세율을 올리기도 했다.
1784년에 차에 대한 119퍼센트의 세금을 12퍼센트인 10분의 1 수준으로 낮추자 차 소비량은 급격히 증가했다. 하지만 영국인 모두가 즐겁게 부담 없는 가격으로 차를 마시게 된 것은 이로부터 거의 100년 뒤, 영국인이 인도에서 직접 홍차를 생산하게 되는 아삼의 시대가 열리면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라는 문화가 생겨난다.
홍차로 인한 새로운 관습들
19세기 초 영국의 귀족들이나 상류 계층은 오전 10시경에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그날의 가장 제대로 된 식사인 저녁을 오후 3시 전후에 먹고, 애프터 디너 티(After-dinner tea)라는 이름으로 저녁 7시경에 간단히 차를 마시는 자리가 있었다.
귀족의 삶이라는 것은 일상의 쫓김도 없고 또 밤 문화를 즐기는 생활 리듬을 유지했을 것이다. 필자만의 경험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중학교 때 처음 영어를 배울 때 디너(dinner)와 서퍼(supper)의 개념 차이가 애매했는데, 이런 단어들이 위와 같은 시대 배경에서 나온 듯하다. 즉 오후 3시에 먹는 제대로 된 저녁이 디너이고 이후 차와 함께 간단히 먹는 것이 서퍼인 것 같다.
그런데 저녁 시간이 점차 늦어져, 1850년경에는 7시 30분에서 8시까지 미루어졌다. 이런 생활 습관의 완만한 변화 중 빨라진 아침과 저녁 사이의 긴 시간을 메우기 위해 점심(luncheon)이라는 개념도 생겨났다.
이 간단히 먹는 점심과 저녁 사이에 있는 긴 시간의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소위 ‘애프터눈 티’라는 가장 영국적인 티 세리머니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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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영국, 홍차를 알게 되다 – 홍차 수업, 문기영,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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