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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처음 맛본 해러즈의 홍차는 14번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백 제품이었다. 2010년부터 그동안 관심만 가졌던 홍차에 관한 책도 읽고 국내에서 살 수 있는 제품들을 구해서 마시고 있을 무렵, 마침 일본으로 출장 간 친구에게 문자로 부탁해서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때만 하더라도 홍차를 우리는 방법을 잘 몰라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 생각하면 좀 엉터리로 우렸지만 해러즈 홍차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영국에서 직접 구매하는 방법을 알게 되어 국내에 수입되지 않는 포트넘앤메이슨, 해러즈, 티팰리스 등의 홍차를 마음껏 들여와 본격적으로 해러즈의 제품들을 알아갔다. 지금은 다원차를 많이 마시는 편이지만 필자도 처음에는 이런 유명 브랜드의 대표 상품들부터 마시기 시작했다. 이때 구입한 해러즈 제품들은 14번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16번 실론, 18번 조지언 레스토런트 블렌드(Georgian Restaurant Blend), 26번 다르질링, 30번 아삼, 블렌드 49번 등이었다. 당시 읽은 책이나 인터넷 서핑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주워들은 정보를 통해 선택한 것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같이 블렌딩 홍차로서는 명품 반열에 있는 것들이다.
해러즈 홍차는 영국 최고의 백화점으로 꼽히는 해러즈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러즈 홍차가 해러즈 백화점의 명성과 후광 아래 판매하는 피비(PB)각주1) 제품이 아니라 해러즈가 1849년 식료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처음 시작했고, 설립자인 찰스 헨리 해러즈 자신이 차 상인이었다. 이런 이유로 해러즈 홍차는 해러즈 백화점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1901년 해러즈 백화점을 새로 건축할 때도 홍차를 판매하는 식품관을 가장 근사하게 지었고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각주2)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오랜 명성을 유지해온 블렌딩 홍차 외에도 해러즈 백화점의 차 전문가들은 전 세계의 다원들로부터 매해 훌륭한 다원차를 공급받고 있다. 다르질링 타운 바로 아래에 위치한 해피 밸리 다원을 방문했을 때 정문에 있는 다원의 큰 사진 밑에 해러즈를 위해 독점적으로 차를 생산한다는 것을 알리는 홍보용 간판(handcrafted Darjeeling Organic Teas, produced exclusively for Harrods from the snowfields of Happy Valley)을 보았다. 다원들도 해러즈 같은 세계적인 차 회사에 차를 공급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나에게 해러즈 백화점은 오랫동안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로망이었다. 이런 소망은 물론 해러즈 홍차를 알면서부터 품게 되었지만 구체화된 것은 2012년 5월이었다.
지금은 스리랑카로 가는 대한항공 직항에 관한 텔레비전 광고가 연일 나오고 있지만 2012년 5월 스리랑카로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홍콩에서는 다른 비행기로 환승했고, 싱가포르에서는 일부 승객이 내리고 타면서 객실 청소를 하는 1시간 반 동안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무심코 면세점을 둘러보다가 눈에 번쩍 띈 것이 해러즈 매장이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는 해러즈 홍차를 구매 대행으로 열심히 모으고 있을 때였다.
이미 구입한 제품 외에도 처음 본 다양한 다원차에 흥분해서 바구니에 막 집어 담던 내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2013년 3월 인도에 갈 때도 싱가포르에서 환승한다는 스케줄을 보면서 해러즈 매장을 방문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즐거워했다.
살다보면 잊히지 않는 공포나 기쁨 혹은 감동의 순간이 있다. 최근의 가장 짜릿한 감동의 순간은 아마 런던 올림픽 때 일본과의 3~4위전에서 박주영이 골을 넣던 때였을 것이다. 몇 년 전, 이제는 열 살이 된 딸아이가 신데렐라 만화영화를 보다가(아마 처음인 듯했다) 구박받고 파티에 참석하지 못해 울고 있던 신데렐라를 위해 요정 할머니가 호박을 마차로 만들어주던 장면을 보고 “할머니 짱이다”라고 외치면서 감동받던 그 천진무구한 모습을 보고 나는 정말 짜릿함을 느꼈다.
이런 감동이 당시 창이 공항에서 해러즈 매장을 발견했을 때 필자의 심정이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당시 필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홍차에 미쳐 있었다. 그러니 인터넷으로만 보던 해러즈의 다양한 홍차가 매장 가득 진열된 것을 실제로 접하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그 설렘을 안고 마치 성지를 방문하듯 런던 해러즈 백화점의 홍차 매장을 방문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해러즈 백화점 방문 소감은 그렇게 멋지지만은 않다. 화려하고 고풍스런 외형에도 불구하고, 백화점 자체가 크고 지은 지 오래되어서인지 매장 구조가 적어도 처음 간 방문자에게는 아주 불편하게 되어 있었다. 홍차는 예의 그 유명하다는 식품관에서 팔고 있었는데, 내가 아는 온갖 종류의 해러즈 홍차가 있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갖추지 못한 것이 많았다. 주로 유명해서 잘 팔리는 제품만 산더미처럼 반복해서 쌓아놓고 있었다. 게다가 커피 및 다른 가공식품류가 한 매장 안에 같이 있어 사람들로 붐볐다. 홍차 다구들을 포함한 관련 상품들은 다른 층 매장에 있었다. 두 군데를 갔다 왔다 하면서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성지 방문의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조건이 여의치 않았다.
독자들도 아마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몹시 가보고 싶었던 곳을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상상하다가 정작 가본 뒤 그곳을 다시 생각할 때는 직접 보고 온 모습이 아니라 여전히 가기 전에 상상했던 그 모습을 떠올리는…….
창이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해러즈 매장이 준 그 짜릿함의 연장선상에서 해러즈 백화점은 여전히 내 상상 속에 머물고 있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14번
찻잎의 외형은 전형적인 블렌딩 홍차의 것이다. 실로 홀리프 크기에서 시작해 브로큰 등급까지 아주 다양한 크기의 잎들이 섞여 있다. 색상은 전체적으로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이지만 이 또한 찻잎의 크기만큼이나 다양한 색상들의 조합이다. 이 차의 설명서대로 고지대의 다르질링, 몰티한 아삼, 풀 바디의 실론, 밝은 색상의 케냐 차를 블렌딩한 것이라면 찻잎의 크기나 색상이 다양한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필자가 우리기 위해 준비한 2그램 남짓의 찻잎에는 이처럼 다양한 지역의 특징이 실려와 있었다.
수색은 지나치게 진하지 않은 알맞은 적색을 띠며, 향은 엽저에서는 다소 맑은 꽃향이 나지만 우린 차에서는 특정한 향이 없고 굉장히 차분한 느낌이 난다. 입안을 꽉 채우는 바디감이 있으면서도 거친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부드럽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머리에 마치 두꺼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용수철이 떠오른다. 하지만 단순하지는 않은 몇 개의 선이 맛에 조화되어 있다. 오로지 그것뿐 다른 잡미는 없다. 아주 매끄러우면서 뒷맛에는 기분 좋은 수렴성이 남는다. 출시된 지 50년 이상 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품 블렌딩 홍차로 아침을 깨우는(wake me up), 말 그대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최고의 홍차다.
블렌드 49번
외형은 브로큰 등급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홀리프에 가까운 크기다. 다양한 색상과 크기의 찻잎이 조화되어 있는 블렌딩 홍차의 특징을 띤다.
수색은 투명한 옅은 적색이다. 일반적으로도 엽저에서 나는 향보다 우린 차에서 나는 향이 약하기는 하지만 블렌딩 제품은 그 정도가 좀더 심한 것 같다. 엽저에서는 복합적이고 싱그러운 향이 있는 데 반해 우린 차에서는 가볍다는 것 말고는 특징이 없다. 엽저에는 의외로 밝은 색의 찻잎이 꽤 보인다.
위의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와 견줄 때 모든 점에서 확실히 다르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가 가을 남자라면 49번은 봄 처녀 같다. 바디감이나 수렴성도 적당하며 차가 식어가면서 그 부드러움이 더해진다. 하루 중 언제 마셔도 좋은 차다. 49번은 해러즈 150주년을 기념하고자 만들어진 제품으로(1849에 150을 더하면 1999년?) 인도차로만 구성되어 있다. 실론차로만 블렌딩된 16번과 대비된다. 소개서에는 인도의 다섯 개 주요 산지의 가장 훌륭한 특징들을 배합했다고 되어 있다. 인도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르질링, 아삼, 닐기리 세 지역 외에, 두어스, 테라이, 캉그라, 시킴, 카차르와 같이 덜 알려진 지역도 있다. 아마도 이들 중 두 지역에서 생산된 홍차가 포함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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