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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나혜석의 구미 만유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조선의 바깥에서 조선 여성을 바라보다
구미 만유기(歐米漫遊期) 일 년 팔 개월 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얏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한자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켓치 한자스를 들고 연구소를 다니고(아카데미) 책상에서 불란서 말 단자(單字)를 외우고 한자로난 사랑의 한자한자여 보고 장차 그림 대가(大家)가 될 공상도 해보앗다. 흥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잇스면 연극장에도 갓다. 왕 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보고 혁명가도 차자보고 여자 참정권론자도 맛나 보앗다. 불란서 가정의 가족도 되여보앗다. 그 기분은 여성이오 학생이오 처녀로써이엿다. 실상 조선 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모 장애되난 일이 하나도 업섯다.

1932년 나혜석이 쓴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구미만유 하고 온 후의 나」 중 한 대목이다. 자신의 파리생활을 요약한 이 구절에서 우리는 나혜석이 느낀 해방감을 엿보게 된다. 나혜석은 이 구미 여행에서 당시 조선인으로서, 또 아이를 기르는 조선 여성으로서 누릴 수 없는 자유와 배움을 맛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의 말대로 이 여성은 어떻게 해서 “내게 씌운 모든 탈을 벗”고 “조선 대중의 생활을 한자나 별천지에서” 살아보게 되었던 것일까?

세계 일주 떠나기 전 나혜석 부부의 모습

1927년 6월 19일에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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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조선 여성이 되다

나혜석(1896~1948)이 구미 여행에 오른 것은 서른두 살의 나이, 세 아이를 기르던 때였다.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일한 포상으로 구미 시찰을 가게 된 남편 김우영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나혜석 부부가 여행을 떠난다고 하자, 부산에서 만주 봉천까지 수백 명의 지인과 친지들이 배웅을 나왔고,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날에는 신문에 “나혜석 여사 세계만유”라는 제목의 기사도 실렸다. 이로써 나혜석은 서울 최초의 유화 개인전을 연,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칭호에 덧붙여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조선 여성이 되어 다시 한번 언론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나혜석 부부는 1년 8개월 동안 열다섯 나라를 돌아보았다. 1927년 6월 22일 경성역을 출발해 한 달 동안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가며 러시아의 주요 도시를 둘러보고, 1927년 7월 19일 파리에 도착한 뒤 한 달여 동안에는 스위스를 비롯한 북유럽을 구경한다. 이후 나혜석은 파리에 머물며 그림 공부를 하고, 남편은 법학 공부를 위해 베를린에서 3개월 정도를 체류한다.

부산-경성 간 열차 안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 1920년대 추정, 부산박물관

기모노를 입은 여성과 흰 저고리 검은 통치마를 입고 양화를 신은 조선 신여성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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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3월부터 여행은 다시 시작되는데, 이태리와 남유럽을 둘러보고 7월에는 한 달 반 정도를 영국 런던에 머문다. 1년여 동안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미국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28년 9월 27일이었다. 영미 마제스틱(Majestic) 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해서는 미국에 와 있는 동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시즌을 보냈다. 그러고는 1929년 1월 1일부터 두 달여에 걸쳐 미국 횡단 여행을 하게 된다. 이어 하와이 호놀룰루를 들러, 1929년 2월 23일 일본의 태양환(太陽丸)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요코하마와 동경을 거쳐 3월 12일 부산에 당도하게 된다.

나혜석 부부의 구미만유가 조선인으로서 대단히 특권적인 경험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돈 업스면 이태리니 불란서니 어대어대를 다 엇더케 다녀 왓스랴”라는 나혜석의 표현대로, 평범한 조선민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경성-파리 횡단열차의 기차 삯이 1000원 정도였으니, 이 금액은 도청 최고위직인 칙임관의 두 달 치 월급이요, 조선인 고등보통학교(오늘날의 고등학교에 해당함) 교사의 1년 치 월급이었다. 또한 당시 경성에서 ‘에레베타걸’이나 전화교환수, 혹은 백화점 점원으로 운 좋게 일자리를 얻은 조선 여성이라면, 2년 반 치 월급을 통째로 모아야 하는 액수였다.

나혜석 부부가 대서양을 건널 때 탄 영미 마제스틱 호

1914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건조된 비스마르크 호가 전신으로 1922년 영국 화이트스타와 커나드라인사에 의해 구입되어 영미 마제스틱 호라 불렸다. 나혜석의 글에 따르면 이 배는 총 2636인승(일등 870인, 이등 730인, 삼등 1336인)으로 살롱, 스모킹룸, 오락실, 레스토랑, 수영실, 아동놀이터, 도서실, 교회 등의 설비를 갖추고, 이틀에 한 번 경마, 댄스, 활동사진 관람, 연극 공연을 했으며, 테니스, 탁구, 실내골프, 바둑, 장기, 브릿지, 마작 등의 스포츠와 놀이를 제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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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 1등간 2등간 3등간
莫斯科(모스크바)680원510원260원
伯林(베를린)780원580원320원
巴里(파리)1000원730원320원
倫敦(런던)1030원750원340원
1935년의 기차 요금
목적지 1등간 2등간 3등간
호놀룰루250원160원100원
桑港(샌프란시스코)230원220원110원
1935년의 배 요금
직업 월보수(원) 직업 월보수(원)
간호부33~70보통학교 교원35~60
기자25~60유치원 보모10~50
사무원30~50전화교환수25~50
데파트 점원15~40차장25~30
직공(제사)20~30직공(정미)10~30
직공(연초)6~25하녀7.6
1930년대 서울에서 직업여성이 받은 임금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외면상으로는 남편을 따라가는 모습이었지만, 조선을 떠나는 나혜석의 마음은 젖먹이를 포함해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갈 만큼, 상당한 포부와 각오를 품은 것이었다.

일(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이(二), 남녀 간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삼(三),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사(四), 그림의 요점이 무엇인가?
- 「쏘비엣 로서아(露西亞)행-구미유기의 기일(其一)」 『삼천리』 1932년 12월호

그는 이런 질문에 답하고자 구미인의 생활을 맛보고 구미 여자의 활동을 견문하며 구미의 화계를 경험하겠다고 다짐했다. 구미 여행을 통해 식민지 시대, 급격한 사회변동의 핵심적인 문제였던 남녀 간의 새로운 관계와 여성의 지위를 서구의 거울을 통해 다시 성찰하고자 했고, 화가로서나 어머니로서 힘들게 살았던 삶 속에서 다시 한번 예술가로서의 정열과 배움을 이어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과 성찰을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삼천리』 『조선일보』 『신가정』 『중앙』 등의 신문과 잡지에 25편여의 적지 않은 글로 남겼다. 나혜석의 여행기는 긴 여정 동안 보고 들은 각국의 풍물을 다 언급했지만, 관심과 경험이 집중된 곳은 단연 파리였다. 파리에서 자신이 출발할 때 품었던 물음에 대해 많은 답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글들은 나혜석이 이혼한 후 홀로 경제적으로 생존하고 미술가로서 자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기에 발표된 것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널리 알려 조선 사회에 보탬이 되도록 하려는 나혜석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삼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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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나혜석이 유럽 등을 여행하며 겪은 것은 『삼천리』, 『중앙』 등의 잡지에 실려 널리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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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세적인 모스크바와 파리의 화려함

경성을 출발하여 안동과 봉천, 장춘을 지나 하얼빈에서 6일간 머물 때, 나혜석은 그 지역 여성들의 생활을 눈여겨본다. 나혜석이 보기에 하얼빈에서는 가사를 간단히 돌보는 생활인지라 여성들의 생활에는 여유가 있다. 옷은 기성복을 많이 사 입는다. “여름이면 다림질 겨울이면 다딈이질로 일생을 허비하는” 조선 여성이 불쌍하다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나혜석의 통찰은 여기서 빛나는데, 나혜석은 “서양 각국의 오락기관”에 남자보다 여자 구경꾼이 더 많은 것을 관찰했다. 이는 오로지 여성의 생활이 여유가 있고 시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결국 조선에서도 이 오락기관이, 요즘말로 하면 문화산업이 번창하려면 여자 관람객이 많아야 하고, 여자 관람객이 많아지기 위해서는 “조선 부녀생활”을 급선무로 개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객선상 안에서 촬영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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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반 시슈킨, 캔버스에 유채, 125.5×204cm, 1890, 러시아 미술관

나혜석 일행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여행하면서 러시아의 숲과 황무지 벌판 등을 목격한다. 이반 시슈킨의 이 작품은 러시아의 눈 덮인 숲을 마치 살아 있는 듯 묘사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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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횡단열차로 바꿔 타면서 나혜석 일행은 여러 인종과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또 황무지 벌판과 자작나무숲, 그리고 오로라처럼 고향에서 볼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자연 풍경에 맞닥뜨리게 된다. 시베리아를 통과할 때에는 “로국(露國) 하면 혁명을 연상하고 혁명이라면 로국을 기억”하며 “혈성(血腥)의 공기가 충만”함을 느꼈지만, 막상 도착해서 보게 된 모스크바 시가를 거니는 사람들은 “실컨 매마진 것 갓치 늘신하고 아모려면 엇더랴 하는 염세적 기분”이 보인다. 예상 밖인 것은 파리도 마찬가지다. 처음 본 파리는 기대와 달리 어두침침하고 음침하다.

오로라
1. 갈가 보다 말가 보다
오로라(極光)의 아래로
로서아는 북쪽 나라
한자이 업서라
西天엔 夕陽 타고
東天엔 밤 샌다
鐘소래 들니노나
沖天으로서

2. 울야니각주1) 넘어 밝고
가랴니 어둡다
멀니서 불빗의
한자한자
섯거라 흔각주2) 馬車여
쉬여라 白馬여
내일 갈 길이
업난 배각주3) 아니나

3. 나는 나는 한자 수풀
바람 부는 그대로
흘느고 흘너서
限없이 흘너
낫에난 길 것고각주4)
밤엔 밤새것 춤추어
末年엔 어대서
한자을 맛치든
- 나혜석 일행이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에서 오로라를 보고 부른 창가
「비 오는 날 파리 거리」, 귀스타브 카유보트

세계를 여행하면서 나혜석의 관심이 가장 집중된 곳은 단연코 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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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라면 누구든지 화려한 곳으로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파리에 처음 도착할 한자는 누구든지 예상 밧긴 것에 놀나지 안을 수 업슬 것이다. 위선(爲先) 일기가 어둠침침한 것과 여자의 의복이 흑색을 만히 사용한 것을 볼 한자 첫 인상은 화려한 파리라는 것보다 음침한 파리라고 안할 수 업다.
- 「꼿의 파리행-구미 만유기 속(續)」 『삼천리』 1933년 5월호

나혜석은 오랫동안 그 생활을 충만히 해볼 때에야 비로소 파리의 화려함을 느낄 수 있다고 쓴다. 남아 있는 적은 수의 그림 중 하나인 「무희」라는 작품으로도 표현된, 물랭루주의 화려함을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하로는 물랑루즈에 구경갓섯다. 나체의 일녀(一女)가 은계(銀系)의 의(衣)와 청록의 의상으로 한자여나 경쾌하게 춤을 추고 우의(羽衣)를 둘느고 붉은 새털을 머리에 한자고 금색 구술을 번적이는 여신의 군상들이 좌우이인식(式) 응등이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면서 나온다. 장면은 칠색 오색 금란(金襴), 은란(銀襴)의 의상이 황홀하며 대포(大袍)는 얼골을 파뭇고 대고(大袴)는 한자을 덥고 길에 느린 털부채 작난감갓흔 조고마한 우산을 휘둘느며 좌우에 갈너서잇고 중앙의 여신은 타조모(毛)의 붓채를 휘둘느며 근육적이오 진기한 예술적인 춤을 추고 동시에 군상은 방울달닌 소태고(小太鼓)를 흔들며 응하면서 춤을 춘다. 나는 이 희랍식 육체미에 취하지 안을 수 업스며 한자 이 시대 동판화의 영향을 만히 밧은 원근법과 색채와 초점을 취한 구도법에 눈이 아니 한자일 수 업섯다.
- 「한자의 파리행-구미 만유기 속(續)」 『삼천리』 1933년 5월호

나혜석은 차창 밖으로, 또 길거리를 거닐면서 관찰한 이국땅이 조선 안에서 알려진 소문이나 선입견과 다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그러한 피상적 관찰만으로는 그 사회의 진면목을 놓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무희(舞姬)」, 나혜석, 41×33cm,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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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이다”

나혜석이 파리에 머무를 때 유럽의 남녀관계와 여성의 지위에 대해 산 체험을 하게 된 계기는 샬레(Félicien Challaye, 1875~1967) 부부 가정에서의 생활이다. 나혜석은 1927년 11월 11일 최린과 함께 샬레 가정을 방문했는데, 이때 두 부부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자청해서 석 달간 이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나혜석의 눈에 비친 샬레 부부 가족의 삶은 이상적인 우애결혼의 모습이었다. 샬레는 소르본 대학 철학과 교수로서 당시 약소국민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샬레 부인은 여자참정권 운동회원으로 저술활동을 하는 이였다.

나혜석이 볼 때, 이 부부는 오십과 사십이 넘은 나이에 3남2녀의 아이가 있어 서로 무덤덤하기 십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의 활동을 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일부일부주의(一夫一婦主義)를 실천하며 살고 있었다. 남편은 “늘 부인의 상을 엿보아 기쁘게만 해주고, 걸핏하면 입 맞추기, 단둘이 레스토랑에 가”고, 저녁이 되면 “비둘기같이 붙어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속살거리는지 재미가 깨가 쏟아질 듯하”여 부부가 일시라도 떨어져 지내는 일이 없었다. 또한 아무리 여덟 살 된 사내아이라도 이불을 정리하고 식사 때면 행주질을 하고 사람들 다 나가면 집 보기까지, 아이들로 하여금 어렸을 때부터 독립심을 키우는 교육관을 실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혜석이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은 샬레 부인이었다. “다정하고 실질적인 불란서 부인”이라는 글 제목을 붙였듯이, 샬레 부인은 “아양보양하고 앙실방실하고 요밀조밀하고 알뜰살뜰한 불란서 부인”의 대표 격이었다. 나혜석은 이 부인이 물샐 틈 없이 살림살이를 꾸리면서도 강약을 겸비하여 권태롭기 십상인 결혼생활을 예술로 만들었다고 평한다. 가정의 살림을 주도하여 책임지는 현모양처이자 남편에게 자신의 매력을 잃지 않는 여성이며 집회 참여와 저술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회활동가. 이것이 나혜석을 매료시킨 프랑스 여성의 모습이었다.

샬레가 쓴 일본 소개 그림책. Le Japon illustre. Paris, Larousse,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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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혜석은 당시 유럽 여성들의 지위가 여성들 자신의 믿음과 노력에 의해 높아진 것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여긔서는 여자란 나부터도 할 수 없는 약자(弱者)로만 생각되더니 거기 가서 보니 정치, 경제, 기타 모든 방면에 여자의 세력이 퍽 많습듸다. (…) 우리 조선 여자들도 그리하여야 되겟다고 생각하얏슴니다.
- 「구미만유하고 온 여류화가-나혜석씨와 문답기」 『별건곤』 1929년 8월호

샬레 부인이 살아 있는 여자 세력의 한 표본이었다면, 영국에서 만난 여성은 권리를 얻기 위해 노력해온 역사의 증인이었다. 나혜석은 1928년 남편과 함께 두 번째 유럽 여행을 하다가 7월부터 한 달 반 정도 런던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체류했던 하숙집 주인은 영국 참정권운동에 참여한 여성이었다. 나혜석은 60세의 독신으로 사는 이 여성을 인터뷰하여 잡지에 싣기도 했다.

R : 참정권 운동은 누가 제일 먼저 시작했습니까?
S : …영국서 여권운동자의 시조인 포셋 부인이요(그는 죽었다). 제2세가 팡크하스트 부인이오, 이가 처음으로 시가지 시위운동하기를 시작했습니다. 40년 전에 만여 명의 여성들이 앨버트 기념관 앞에서 시위행진을 했습니다. 이때는 내가 어렸었고 우리 어머니가 참가했습니다.
R : 깃발에는 무어라 썻든가요?
S : ‘부인의 독립을 위해 다토라, 부인의 권리를 위해 닷토자’라고 썼지요.
R : 물론 많이 잡혓겟지요.
S : 잡히고말고요, 모조리 잡혀 드러가서 절식동맹을 하고 야단낫섯지요.
- 「영미 부인 참정권 운동자 회견기」, 『삼천리』 1936년 1월호, 일부 영어 표현은 필자 번역
에밀린 팽크허스트(1858~1928)

여성 투표권을 지지하는 리차드 팽크허스트와 결혼하여 남편 사후 여성사회정치동맹을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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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투쟁하는 참정권 운동 여성에게 강제로 음식을 먹이는 장면, 19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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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혜석의 눈길을 끈 것은 의식주 생활에 관련된 제도였다. 샬레 부부 집에 머물 때 이 집에 출퇴근하는 ‘하녀’가 탁아소를 이용하는 것을 보고 “노동 부인을 위하야 얼마나 편리한 기관”이냐며 당시 조선 여성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눈여겨보아 만들어야 할 일거리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아예 런던 구세군 탁아소를 탐방하기도 했다. 방문한 탁아소는 아이를 출산한 비혼 여성을 지원하는 곳이었다. 그는 이곳을 돌아보고 “문명의 산물 사생아 탁아소가 조선에도 머지않아 생기리라”며, 여력이 없어 기부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이리하여 나혜석이 유럽에서 발견한 것은 자신의 여성됨과 여성의 위대함이었다. 여성의 위대함은 그것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작지만 값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나는 여성인 것을 확실히 한자다랏다. [지금 한자지는 중성(中性) 갓햇든 것이] 그러고 여성은 위대한 거시오 행복된 자인 것을 한자다럿다. 모든 물정이 이 여성의 지배 하에 잇난 것을 보앗고 알앗다. 그리하야 나는 큰 것이 존귀한 동시에 적은 것이 갑 잇난 것으로 보고 십고 나 한자 아니라 이것을 모든 조선 사람이 알앗스면 십흐다.
-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삼천리』 1932년 1월호
파리에서의 나혜석의 모습

단발 머리에 양장을 하고 있다.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는 한복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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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요점이 무엇인가

나는 로마 시스지나 궁전에서 미케란제로의 천정화 압헤 섯슬 한자 서반아(西班牙)에서 귀재(鬼才) 고야의 무덤과 밋 그 천정화 압헤 섯슬 한자 나의게 희망, 이상(理想)이 용출하엿다.
-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삼천리』 1932년 1월호

유럽 서양화는 그 전체가 나혜석에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북돋는 저수지와도 같았다. 그러므로 여행지의 미술관은 그의 중요한 공부 장소였다. 그는 여행 가는 곳마다 빠뜨리지 않고 미술관을 둘러보았고, 간단한 감상을 남겼으며, 사 모은 수백 장의 그림 및 그 복제품들을 가지고 귀국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나혜석은 구미 여행 기간 동안 70~80점의 스케치를 그렸고, 파리에서는 아카데미 랑송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그린 나혜석의 작품들에서는 이 때 익힌 야수파와 입체파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서양화의 역사를 실견한 경험은 절망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나혜석은 엄청난 규모로 축적된 서양화의 전통을 목도하면서 어찌해볼 수 없는 자괴감을 느꼈다. 나혜석은 그림이, 곧 서양화가 어렵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우리가 이때까지 본 것이라든지 배운 것이란 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의 습작과 같”다고 한탄했다.

동시에 그는 그 어려운 그림을 좋아하는 자기 자신을 다시금 발견했다. “이와 갓치 내가 만흔 그림을 본 후의 감상은 두 가지다. ‘일(一)은 그림은 좃타’ ‘이(二)는 그림은 어렵다.’” 나혜석은 귀국한 뒤 이혼을 겪는 와중에 온몸이 부서져라 그림을 그렸다. 1931년 5월 작품 「정원(庭園)」으로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작약」과 「나부」 입선, 같은 해 10월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정원」 입선. 이 수상 목록이 그 결실이었다.

「최후의 심판」, 로마 시스티나 궁전

나혜석은 로마의 시스티나 궁전을 방문해 미켈란젤로가 남긴 천정화를 보고 그림에 대한 열정을 스스로 북돋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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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나혜석, 캔버스에 유채, 62×50cm, 1928년경 추정,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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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여행 이후 나혜석의 그림에는 그가 구미에서 더욱 확신하게 된 여권의식이 반영되어 있을까? 나혜석의 작품세계는 처음부터 풍경화 위주였고, 구미 여행을 하고 난 후에도 이러한 경향은 계속된 편이다. 따라서 여성해방주의자로서 직접적인 주제의식을 드러낸 작품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작품 「정원」이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과 야만적 폭력의 역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중앙 십자형 기둥과 보를 가지고 클뤼니 박물관 정원의 문을 묘사한 이 그림이 십자가형의 정조대 형상과 유사하다는 이유에서이다.

나혜석은 파리의 여러 스케치 중에서 왜 이 모티브를 꺼내어 어떤 의도로 그렸는지에 대해서 별도로 논한 적은 없었다. 다만 자신이 “심령상에도 최고 행복한 때” 스케치해두었던 화제(畵題)로서, 구미 화단의 “요령(要領)”을 비로소 얻게 해준 작품이고, 자주 산책했던 이곳에 13세기의 여자 정조대가 전시되어 있다는 회상을 남겼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제재가 되는 정원의 아치형 문이 여성의 음문에 끼우는 아치형 정(釘)과 형태적으로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 하지만 나혜석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 좋아했던 장소가 여성의 성을 통제하는 기구를 전시한 곳이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러 형태의 정조대

“내가 머물고 있던 호텔 근처에 담 한쪽만 남고 기와지붕 한 귀퉁이만 남은 천 년 전 건물 궁전이 있다. 여기 13세기 물품을 진열해놓았으며, 대개 프랑스 물품이 많고 유명한 것은 ‘여자의 허리띠’니, 이것은 여자 음문에 정(錠)을 끼우는 모형 정조대이다. 전국 시에 남자가 출전 후 여자의 품행이 부정하므로 출전 시 쇠를 잠그고 간다.”(「꼿의 파리행」 『삼천리』 193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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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인의 사난 것은 엇더하며 우리 사난 것은 엇더한가

나혜석은 여행자로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동아시아 변방 식민지 출신의 이 여성지식인은 낯선 세계이자 동경하기도 했던 세계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문명개화’의 본산이라고 추앙되는 유럽의 중심에 들어간 개화 지식인으로서 흔히 가지는 열등감을 나혜석도 다시금 확인했을까?

나혜석은 귀국해서 달라진 자신의 눈을 발견한다. 태평양을 건너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조선 땅이 “새우등 갓치” 고부라져 있고 조선 가옥이 “송이버섯”같이 납작하며, 조선 사람들은 “시름없이 걸어가는” 불쌍한 모습이다. 유럽에서는 처녀이고 학생으로 활짝 핀 꽃 같았던 자신이 이제 “바람에 떨어지듯” 푸근하고 늘씬하던 기분이 “밧삭 오그라들기” 시작한다. 이러한 표현을 보면, 일견 나혜석은 화려한 유럽 문명에 눈이 멀어 자신의 고향을 그저 누추한 곳으로 보는 슬픈 근대주의자였던 듯하다.

하지만 나혜석이 유럽과 조선 사회를 보는 눈은 단순하지 않았다. 나혜석은 한 사회를 온전히 알려면 “평면과 입체”의 양 측면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고 잇스랴면 서양에 잇슬 한자는 서양의 입체만 보이고 조선의 평면이 보엿든 것이 조선 오니 조선의 입체가 보이고 서양의 평면이 보인다. 평면과 입체가 합하야 한 물체가 된 것가치 평면 즉 내부가 합하야 일 사회가 성립된 것이니 어느 것을 한자한자여 볼 수가 업다.
-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삼천리』 1932년 1월호

나혜석은 여행자의 관찰이 잠깐 들르는 손님의 눈이기에 “내부를 알 여가가 업”지만, 동시에 그 주변자의 시선에서 보이는 ‘평면’도 한 사회를 온전히 그리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평면의 시선을 너무나 익숙해진 입체의 조선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귀국할 때의 느낌은 서양이라는 입체에 익숙해진 몸으로 조선의 평면이 두드러져 보였던 상황이었고, 나혜석은 자신의 그런 태도를 성찰했던 것이다.

나혜석은 자신이 본 서구의 풍습과 문물에 대해 각각 다른 판단을 내렸다. 예컨대 파리에서 어린아이들이 격식에 따라 옆집을 방문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개인주의가 지나치다고 비판했고, 부드러운 샬레 부인에게서도 “자식을 만히 길느고 살님사리를 오래한 이만치 때때로 큰소리가 날 때도 잇다”면서 동서양 여자 모두 진을 빼는 살림을 도맡은 공통점이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물론 나혜석은 당대 개화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서구의 근대 문물을 문명으로 보고 동아시아 사회를 야만으로 보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다만 문명화의 시작과 경로가 다르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구미인의 생활이 “단맛 신맛 짠맛을 다 알아 가지고 생켜서 소화하난 것”인 데 비해, 우리 조선인은 “된 대로 덕 생켜 아모 맛을 모르난” 상태라고 비유했다. 문명화의 경로가 다르므로 각 사회의 풍습과 사고방식 전체를, 문명 대 야만으로 일도양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이런 세상도 잇고 저런 세상도 잇서 세계 중에는 형형색색의 세상이 만타. 이 세상에서는 저 세상을 동경하고 저 세상에서는 이 세상을 동경하니 어느 것이 조흐며 어느 것이 나으며 어느 것이 올흔지 조곰 아는 지식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삼천리』 1932년 1월호

각 사회의 풍습과 문화를 평가하는 데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나혜석은 예컨대 파리가 “문명이 극도에 달한 사교술”이고 조선은 “미개한 원시”라는 차이가 있지만, “인정이나 자연스러운 태도가 일치되난 점이 만타”고 생각한다. 예컨대 남녀 간에 어떻게 해야 평화롭게 살 수 있는가를 고민했던 나혜석으로서는, 파리인들이 사교심으로 평화로움이 가능하다면, 조선 농촌에서는 여성들의 극기심이 많은 친척들을 융화해가게 함을 재발견했다.

이렇듯 구미세계의 경험(입체)을 가지고 조선을 보고(평면), 조선에서 살며(입체) 다시 구미세계를 보는(평면) 나혜석의 시선은 입체와 평면, 조선 바깥과 조선 안을 상호 교차시키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나혜석의 성찰 방식은 나혜석이 여행자로서 견지했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혜석은 낯선 세계의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무관심한 관찰자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객관적인 전지적 위치에서 사물을 파악하는 대신,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살아본 경험을 토대로 소소한 생활 습속에 관심을 기울였다.

극장, 활동사진관, 사원, 공원, 미술관, 박물관, 댄스홀, 카페, 공동묘지, 백화점, 대학, 교회처럼 자신이 접하는 대상을 심미적인 태도로 관찰했고, 다른 세계에 속한 가정에 함께 살기를 자청해 그 가족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가 관찰하고 또 적극적으로 마음과 감정을 나눴다. 이처럼 체험하고 소통하는 태도를 지닌 주변적 성찰자의 시선은 보통의 남성 여행자들이나 해외여행을 한 여느 신여성과는 달리 나혜석만이 가진 고유한 성정이었다.

수원의 팔달문 성문 밖 거리, 1930년대 마키바 다카시 촬영, 서울대박물관

나혜석의 고향인 수원의 거리 풍경으로, 흰옷에 갓 쓴 조선인 남성과 인력거, 인단(仁丹) 상점, 전깃줄이 함께 얽혀 있는 것이 구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혜석이 목격한 조선의 모습이다. 이러한 조선은 그녀가 경험했던 파리의 모습과 교차 비교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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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한 파리 카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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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를 운항하던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 채색사진엽서, 부산박물관

나혜석은 일본을 들러 귀국할 때 이런 관부연락선을 타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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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파리로

나혜석에게 파리는 자신을 여성으로서, 예술가로서, 여성해방 사상가로서 다시 태어나게 만든 곳이었다. 동시에 자신의 공적·사적 삶의 파국이 시작된 곳이기도 했다. 귀국 후 나혜석을 기다린 것은 아주 잠깐의 영예로움, 그리고 지루하고도 기나긴 영욕의 세월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시 파리를 떠올렸다. 귀국 후 수년간 신산(辛酸)했던 삶을 추스르려 할 때, 그리하여 “신생활에 들”고자 할 때, 그녀는 파리를 떠올렸다. 나혜석은 과거와 현재를 ‘공(空)’으로 만들고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끝내 그녀는 미래의 파리로 가지 못했다.

가자 巴里로 살너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巴里다. 나를 정말 女性으로 만드러준 곳도 巴里다. 나는 巴里 가 죽으랸다.

차질 것도 맛날 것도 엇을 것도 업다. 도라올 것도 업다. 永久히 가자. 過去와 現在가 空인 나는 未來로 나가자.
- 「新生活에 들면서」 『삼천리』 1935년 2월호

나혜석의 여행 일정표

날짜 출발지 도착 체류 기간 및 교통수단
1927. 6. 19~20부산진경성3일
6. 22~23경성곽산5일
6. 23~27곽산남시 
6. 28~30봉천장춘3일
6. 30~7. 1장춘하얼빈6일
7. 6~7하얼빈만주리만철(滿鐵)
7. 7~13만주리-칼부이스카-치타
-우엘네우진스크
-크라스노야스크
-노보시비르스크-옴스크
-스베르들로프스크
모스크바와고니 회사
만국침대차,
모스크바에 3일 체류
7. 16~17모스크바바르샤바유럽 열차
7. 18~19베를린파리9일 체류
7. 27파리제네바 
8. 12베른파리 
8. 24파리브뤼셀 
8. 27브뤼셀파리석 달간 파리 체류
12. 20~21파리베를린 
1928. 1. 4~5베를린파리 
1928 ?~1928. 7. 1파리 - 이태리,
그리스, 터키
파리 
7. 1파리뉴헤븐 
7. 2~8. 15런던-앤트워프
-암스테르담-헤이그
파리한 달간 런던 체류
8. 25~파리-마드리드
-톨레도-마드리드
파리 
9. 17파리체브 
9. 17~23체브뉴욕마제스틱 호
1929. 1. 1뉴욕나이애가라자동차
1929. 1. 21~26나이애가라시카고 
1. 26~28시카고그랜드 캐년 
1. 28~29그랜드 캐년로스앤젤레스철도
2. 1로스앤젤레스요세미티승합자동차
2. 9요세미티샌프란시스코 
2. 14~20샌프란시스코호놀룰루태양환
2. 22~3. 4호놀룰루요코하마 
3. 4~5요코하마동경도카이도(東海道) 선
3. 10~12동경부산 
나혜석의 여행 일정표
나혜석의 여행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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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 집필자 소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저서 『신여성, 근대의 과잉-식민지조선의 신여성 담론과 젠더정치, 1920-1934』, 공저 『전통의 국가적 창안과 문화변용』, 역서 『현대영화이론의 궤적..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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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나혜석의 구미 만유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전용훈,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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