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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공녀로 여성의 해외 경험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예로써 섬긴 나라? 여자로 섬긴 나라!

해외로 팔려간 여성들

전 지구가 하나의 마을처럼 그 왕래가 빈번해진 오늘날, 해외여행의 의미가 남녀 성별에 따라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단순한 여행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이나 삶과 관련된 경험의 문제로 들어간다면 성별은 유효한 분석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자본을 따라 국제적으로 이동하는 제3세계 여성들이나 자녀 교육의 매니저 자격으로 해외생활을 하는 ‘기러기 아빠’의 아내들이 한 예가 될 수 있겠다.

전통시대에도 여성들의 해외 ‘진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는데, 여행이라기보다 주로 전쟁포로나 국제관계에서 정략상의 교환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그녀들의 행로는 순전히 국가의 ‘부름’에 응한 결과인 셈이다. 그들 중에는 고국으로 되돌아온 여성들도 있고, 이국땅에서 자식 낳고 그곳 백성이 된 여성들도 있으며, 고국을 그리워하며 산송장처럼 살다 간 여성들도 있었다. 그중 이러한 여성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공녀(貢女)를 들 수 있다.

공녀란 중세기 한국에서 중국으로 진상(進上)된 여자를 말하는데, 조공무역의 일환으로 공물(貢物)로 취급되었던 사람들이다. 고구려와 신라에서 중국의 북위(北魏)에 여자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공녀의 역사는 멀리 5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공녀가 본격적으로 요구된 것은 원의 간섭이 시작된 고려후기부터로, 조선전기에는 명나라에, 조선후기에는 청나라에 공녀를 바쳤다. 고려 원종(元宗) 15년(1274) 원나라에서는 그들에게 귀순한 남송 군사들의 처를 얻어준다는 구실로 140명의 부녀자를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결혼도감이라는 특별 관청을 설치하고 민가를 샅샅이 뒤져 그 숫자를 채웠다. 이때 끌려간 여성들 대부분은 과부, 역적의 처, 승려의 딸이었는데 북으로 끌려갈 때 그 대열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고 한다. 고려는 충렬왕 1년(1275)에서 공민왕 3년(1354)까지 80년간 44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여자를 헌납했다. 그 수는 회당 많게는 50명에서 적게는 1명까지 대략 170명 이상이 보내졌다. 그런데 이것은 공식적인 숫자일 뿐, 원나라 고관들이 데려간 사적인 공녀까지 포함한다면 실제 수는 2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조선전기에는 태종과 세종 때 20여 년간 일곱 차례에 걸쳐 114명의 공녀가 보내졌다.각주1) 이때 중국이 요구하는 여자들의 용도도 다양하여 처녀 16명, 여종 48명, 집찬녀(執饌女, 음식 만드는 여자) 42명, 가무녀(歌舞女) 8명이었다. 여기서 ‘처녀’라고 한 것은 궁녀나 황실 가족의 처첩으로 삼기 위해서인데, 그들의 첫째 조건이 자색(姿色), 즉 미모가 출중해야 했다. 세종 15년(1433) 이후 약 80년간은 공녀를 요구하는 일이 없다가 중종 16년(1521)에 다시 공녀를 진상하라는 통보가 왔다.

이때 조선은 중국이 요구한 숫자만큼 준비해두었지만 명나라 황제 무종(武宗)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공녀를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마지막 공녀가 명나라로 떠난 지 약 200년이 지난 인조 16년(1638)에 청나라로 정권이 바뀐 중국이 다시 공녀를 요구해왔다. 또 그 12년 후인 효종 원년(1650)에도 공녀 송출이 있었다. 조선후기인 인조와 효종 때 두 차례에 걸쳐 32명의 공녀가 청나라로 떠났다.

1907년에 그려진 그림으로, 제목은 ‘과년한 색시아이’, 국립 민속막물관

이런 여성들은 중세기에는 공녀로 차출되어갈까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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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바, 중국 황제의 공식적인 명령에 따라 보내진 공녀 헌납의 실태이다. 그런데 공적인 공녀 못지않게 황족이나 고관 등이 직접 오거나 간접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처첩을 구하는 사적인 공녀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중국의 관리들은 상관에게 바치는 뇌물용으로 황제의 명령이라고 속이고는 미혼의 여성들을 데려갔다고 한다. 이때 여자들의 나이는 대개 열한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였다.

국가 간 무역의 형태이거나 충돌 완화의 방법으로 여자를 이용한 종류의 이야기는 많이 전해오고 있다. 고대의 중국에서는 그런 여자를 화번공주(和蕃公主)라 했는데, ‘평화의 화신’쯤 될 것이다. ‘화번공주’의 대표 주자로 왕소군(王昭君)을 꼽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후궁이다가 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바쳐졌다.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봄이 왔으나 봄 같지가 않구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라는 시로도 유명한 그녀는 ‘팔려간’ 그녀의 신세를 애달파한 문사들에 의해 이민족에게 중국 문화를 심어준 문화 전달자로 그 역사적인 존재 의미를 부여받았다.

「왕소군」, 히시다 소, 비단에 채색, 168×370cm, 1902, 일본 산형 선보사

국가 간 무역 충돌을 완화시키는 데는 여자들이 흔히 이용되곤 했다. 이처럼 이른바 ‘평화의 화신’ 역할을 한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왕소군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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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과 고려도 ‘여자 교환’, 즉 혼인을 통한 구생(舅甥)관계를 구축함으로써 각자의 권력을 공고히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공녀는 이들과는 좀 다르지만 중세기 국제관계가 낳은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그 운명을 같이한다. 공녀, 그녀 자신들은 제물이 되었지만 한편에서는 그녀들로 인해 이익을 챙기는 다양한 집단이 생겨났다.

공녀 ‘사냥’에 온 나라 벌집 되다

공녀를 구하는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면 나라에서는 먼저 그녀들을 선발할 임시기구를 설치하고, 각 도에 그 할당량을 배정했다. 고려 때의 기구로는 결혼도감(結婚都監)과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진헌색(進獻色)과 혼례도감낭청이 있었다. 중국으로 보낼 공녀를 뽑기 위해 전국에 혼인금지령을 내리고 공녀 선발을 담당할 관직을 개설했는데, 이를 경차내관(敬差內官)이라 하였다. 이에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온 나라 백성들은 “어찌 왔을까? 동녀 잡으러 왔을까?” 하며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사람들은 딸을 숨기거나 머리를 깎아 중이 되게 하거나, 혹은 딸의 나이가 매우 어림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혼인을 시키는 방법으로 공녀 사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이와 함께 공녀를 선발하려는 나라의 법은 더욱더 정교해졌다.

조선 태종 8년(1408) 4월에 실시된 명나라로 보낼 1차 공녀 선발은 온 나라를 두 달간이나 불안과 공포에 떨게 했다. 이 사건은 각 도에서 30명의 처녀를 뽑아 서울로 이송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뽑힌 공녀 후보자들은 의정부의 재심을 거쳐 부모 3년상을 당한 자나 무남독녀를 제외한 7명으로 압축되었다. 다시 선발된 7명을 놓고 중국에서 온 사신 황엄(黃儼) 등이 경복궁에서 최종 심사를 했다. 여기서 황엄은 처녀들의 미색이 없다고 분노하였다. 거기다가 선발된 처녀 모두가 몸에 이상이 있는 것처럼 하여 뽑히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결국 이 여자들의 부친은 모두 딸을 잘못 가르친 죄로 파직되거나 귀양 가게 되었고, 7월에 전국을 대상으로 처녀를 다시 뽑았다. 태종은 이번에는 좀더 강력한 법을 가동시켰다.

지난번에 관찰사 등이 처녀들을 철저히 찾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보고에 빠진 자가 많았다. 다시 수령·품관·향리·양반 등 모든 백성의 집을 수색하여 자색(姿色)이 있는 모든 처녀를 가려내라. 정결하게 빗질하고 단장시켜 명나라 사신의 심사를 기다리도록 하라. 만일 처녀를 숨기거나 침을 뜨고 약을 붙이는 등 흉하게 보이도록 꾀를 쓰는 자가 있다면 통정대부 이하는 각 도에서 직접 처단하고, 가선대부 이상은 ‘왕지(王旨)를 따르지 않은 죄’로 논하여,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가산(家産)을 몰수하라.
- 『태종실록』 권16, 8년 7월 3일

한편 국왕의 명을 받은 관리들의 횡포는 극에 달했고, 그 폐해는 국왕에게 보고되었다. “지금 나라에는 처녀를 숨긴 자를 찾아내어 재산을 몰수하고 있습니다. 해당 관리들은 아전과 부녀자들을 잡아가두고 매질을 하니 마을 사람들이 원통하게 부르짖어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태종실록』 권16, 8년 7월 5일) 국가가 강력하게 나오면 나올수록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백성들의 지혜는 진화해갔는데, 세종 때는 자진 신고와 함께 남이 신고하도록 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현직이나 전직의 모든 관리들은 각자 자기의 딸과 형제 및 친족의 딸을 7월 18일까지 신고하도록 하라. 만일 처녀를 숨기고 알리지 않는 자나 나이 비슷한 못생긴 다른 아이를 대신 내놓는 자는 왕의 명령을 어긴 죄로 처벌하고 가산을 몰수하여 신고한 자에게 상으로 준다.
- 『세종실록』 권25, 6년 7월 13일

공녀 선발을 위한 각종 법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믿지 못하게 하는 매우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관리들에게는 딸이 있는 집을 관청에 비밀리에 신고하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했는데, 그 가운데는 원한관계에 있던 사람이 복수할 기회로 삼아 딸이 없음에도 딸이 있다고 신고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관민(官民) 공조로 ‘숨겨진 딸’을 찾아내려는 이 시대의 풍경은 ‘간첩’을 찾기 위해 모두가 혈안이 되었던 한 시기를 연상케 한다. 말하자면 ‘딸을 숨기는 죄’는 이 시대의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려졌다.

『세종실록』 권25,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공녀로 뽑혀갈 처녀를 숨겨놓는 집안에 대해 처벌을 내릴 것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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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금지령을 어기고 혼인하는 자들, 딸을 숨기는 자들이 있을 경우, 그들이 속한 지역의 수령까지 처벌을 면하지 못했다. 효종 때 공녀로 뽑혀 서울로 호송되던 한 처녀가 칼로 자신의 머리칼을 잘랐는데, 이때 처녀의 고을 현감과 호송 관원들 모두 엄한 형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법령과 함께 그 위반 사례들이 속출하였고, 공녀 선발과 관련된 새로운 각종 범죄들이 발생했다. 경상도의 정황(鄭煌)이라는 사람은 딸이 공녀 후보자로 뽑혀 서울로 올라오게 되자, 오는 도중에 딸의 얼굴에 약을 발라 얼굴을 상하게 했다. 이때 정황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의 딸을 호송한 향임 최응벽(崔應壁)이라는 자가 자신의 딸을 강간하려다가 상처를 입힌 것이라고 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최응벽을 사형에 처했다. 그러자 그 후 최응벽의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정황을 칼로 찔러 살해했다.

공녀로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보다 국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중종은 “여자를 뽑는 일이 부득이한 데서 나온 일이지만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 혹시라도 선발된 처녀들이 구덩이에 몸을 던진다든가 목매어 자살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스럽다”(『중종실록』 권42, 16년 6월 2일)고 하였다.

그녀들의 행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선발된 공녀, 특히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될 그녀들은 두 달 이상 걸리는 긴 여행길에 오를 채비를 하였다.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외모를 가꾸는가 하면, 왕비가 차린 전별연에 불려가 위로도 받았다. 태종대와 세종대의 일곱 차례에 걸친 공녀 전송이 모두 똑같은 순서와 형태로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왕과 왕비가 참석하는 전송식을 했던 것 같다.

여인들은 다 슬피 흐느끼고 먹지 않았으며, 물러나올 때에는 낯을 가리고 우니 부모와 친척들이 서로 붙들면서 데리고 나왔는데, 곡성이 뜰에 가득하여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었다. 임금이 근정전에 납시어 창가녀 등을 불러 노래를 듣던 중 한 여자가 이번에 가면 다시 오지 못한다는 뜻을 노래하였는데, 그 가사가 몹시 처량하고 원망스러웠다.
- 『세종실록』 권45, 11년 7월 18일

그녀들이 출발할 때 왕과 왕비는 지금의 독립문 자리인 모화루까지 나와 눈물로 전송하였다. 여자들의 부모와 친척들의 통곡이 하늘을 울리고 눈물은 거리를 적셨다.

일곱 명의 처녀가 상림원(上林園)으로부터 근정전으로 들어와서 집이 있는 교자(轎子)에 나누어 들어갔다. 성씨만은 한 교자에 혼자 들어가고 그 나머지는 두 사람이 한 교자를 같이 탔는데, 사신이 직접 자물쇠를 채웠다. 집찬비와 비(婢)들은 모두 말을 탔다. 건춘문(建春門)에서 길을 떠나니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이 거리를 막아 울면서 보냈고, 구경하는 사람들 또한 모두 눈물을 흘렸다.
- 『세종실록』 권37, 9년 7월 20일

서울을 출발한 그녀들의 행렬은 개성을 지나 평양에 이르고, 안주를 거쳐 의주에 닿는다.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는데 요동까지는 8참이 있다. 구련성―책문-봉황성―진동보―진이보―연산관―첨수참―요동(요양)이 그것이다. 그리고 요동에서 북경으로 가는 길에서 거쳐야 했던 지명들이 기록 곳곳에 보인다. 안산―해성―우가장―반산―광녕―십삼산역―영원―산해관―영평―옥전현―통주―북경 등의 지명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과 함께 가는 중국의 사신들과 본국의 사신들도 임시로 지은 각 참의 숙소에서 잤다. 공녀를 수행해갔던 진헌사 안수산이 그녀들의 여정과 상황을 알려왔다.

처녀와 사신이 이달 17일 요동에 도착하니, 도지휘사 왕진(王眞)·유청(劉淸) 등이 유하(柳河)에서 맞이하여 집이 있는 수레 여덟 채로 여사(女使)와 집찬비(執饌婢)를 나누어 태워 성안에 숙박시키고 처녀들은 한군데에 함께 묵게 했습니다. (…) 왕진은 ‘처녀를 영접하려고 내관 3인은 광녕에 도착하고 2인은 옥전현에 남아서 기다린다’ 했습니다.
- 『세종실록』 권37, 9년 8월 26일
『세종실록』 권37,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왕과 왕비, 그리고 공녀의 일가족이 공녀를 떠나보내는 장면이 실록에 상세히 기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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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들의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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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의 권근(權近, 1352~1409)은 떠나는 공녀를 위해 시를 지었다.

구중궁궐에서 요조숙녀를 생각하여
만 리 밖에서 미인(美人)을 뽑는다
꿩 깃 장식의 수레가 멀리 떠나가면서
고국은 점점 아득해진다
부모를 하직하니 말이 끝나기 어렵고
눈물을 참자니 씻으면 도로 떨어진다
슬프고 섭섭하게 서로 떠나는 곳에
여러 산들이 꿈속에 들어와 푸르도다

가족과 친지들의 눈물과 통곡을 뒤로하고 떠난 공녀들이 목적지인 북경에 도착한 것은 출발로부터 약 두 달 뒤였다. 가는 도중에 호송하는 환관들의 희롱에 수모를 당하는 것은 예사이고, 겨울이라면 매서운 만주 벌판의 추위 속에서, 여름이라면 무더위로 병을 얻기 일쑤였다.

북경의 모습을 그린 성시도

조선의 공녀들은 황제가 있는 이곳으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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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에서의 삶

태종 8년(1408)에 선발된 다섯 명의 처녀들은 이문화(李文和)를 진헌사로 하여 11월 12일에 북경으로 출발한 후 다음 해 2월 9일에 북경에서 황제를 직접 알현하였다. 이들은 모두 영락제(永樂帝)의 후궁이 되었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

조선의 권씨 등이 그의 후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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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권씨는 뛰어난 미모와 훌륭한 옥퉁수 실력으로 영락제의 총애를 받아 현인비(顯仁妃)에 봉해졌고, 나머지 네 명의 처녀도 각각 순비(順妃), 소의(昭儀), 미인(美人) 등에 봉해졌다. 태종 10년(1410) 10월 28일에는 명나라 사신이 정윤후의 딸 정씨를 데리고 북경으로 떠났다. 부친 정윤후와 어린 환자 2인, 여사 4인이 동행했다. 북경으로 간 정씨는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는데, 태종 13년 4월에는 부친이 황제의 안부를 여쭐 겸 북경을 다녀왔다. 같은 해 8월에 태종 임금은 정씨의 부친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세종 1년(1419)에 정윤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나라 예부(禮部)에 보고되었고, 부친 정씨의 영전에 황제와 황비가 제문을 보내왔다.각주2)

그런데 옥퉁수를 잘 불어 명나라 미인들 사이에 퉁소 바람을 일으켰던 현인비 권씨가 태종 10년 10월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처음에는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독살된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에서 함께 간 공녀 여미인의 소행으로 꾸며졌다.

역관 원민생이 중국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드니 ‘황후가 죽은 뒤로 너희 나라 사람 권비로 하여금 육궁(六宮)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너희 나라의 여씨(呂氏)가 고려 출신의 내관(內官)인 김득(金得)과 김량(金良)을 사주하여 은장(銀匠)에게서 비상을 얻어다가 호도차(楜桃茶)에 타서 권비에게 먹여 독살시켰다. 이에 짐이 이미 내관과 은장을 처형하였으며, 또 불에 달군 쇠젓가락을 가지고 여씨를 한 달 동안 지져서 죽였다. 너는 이 사실을 권영균에게 말해주어 알리라’ 하였다.
- 『역대요람(歷代要覽)』 「영락(永樂)」 ; 『해동역사(海東繹史)』 권70

그러나 여씨의 독살설은 무고임이 밝혀졌는데, 그전에 조선에서 간 공녀 대부분이 이 사건과 관련 있다 하여 이미 처형되었던 것이다. 태종 17년(1417)에 공녀로 간 한씨 처녀는 영락제의 여비(麗妃)에 봉해졌는데, 권씨 독살 사건과 연루된 참형에서는 다행히 벗어났지만 세종 6년 영락제의 사망으로 순장되었다. 태종 때 끌려간 8명의 처녀 중 7명이 비참하게 죽어갔고, 여종 등의 공녀들도 거의 몰살당했다. 역사에서는 영락제의 후궁 현인비 권씨의 죽음과 관련된 이 사건을 ‘어려의 난(魚呂之亂)’이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공녀는 이역만리 타국의 구중궁궐에 유폐되어 산송장처럼 살다 생을 마감하거나 성 노리개로 전락하였다. 황제의 눈에 들어 비빈(妃嬪)에 봉해졌을 경우 조선에 사는 그 가족들과 왕래가 가능했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공녀들은 그 부모를 평생 만날 수 없었다. 어쩌다 인편이 닿아 조선의 부모와 형제들에게 보내온 서신에는 모두 고생하며 지낸다는 내용과 깎은 머리털이 들어 있었다. 가족들은 이를 보고 눈물 흘리며 “평생토록 상견(相見)할 것은 다만 이 머리털뿐이다”(『세종실록』 11년 4월 12일)라고 하였다.

영락제의 여비에 봉해진 한씨의 경우, 자신이 순장되는 대신에 유모 김흑을 고국 조선으로 보내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김흑은 또한 공녀로 온 조선의 집찬녀와 가무녀들도 함께 보내줄 것을 눈물로 간청하여 허락받았다. 그리하여 세종 17년(1435) 4월에 김흑을 비롯한 여종 9명, 집찬녀 37명, 가무녀 7명 등 모두 53명이 조선으로 송환되었다(『세종실록』 6년 10월 17일).

영락제의 죽음으로 순장된 여비 한씨, 그녀가 죽은 지 4년이 지난 세종 10년에 동생 한씨가 선덕제의 후궁으로 들어가 공신부인(恭愼夫人)에 봉해졌다. 이에 앞서 한씨의 오빠 한확이 여동생을 진헌녀로 가게 했는데, 어느 날 그 여동생이 병이 나자 약을 주었다. 누이 한씨는 “동생 한 명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되었지 남아 있는 동생마저 팔려고 약을 주는가?”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세종실록』 9년 5월 1일). 동생 한씨는 명 선종에서 헌종까지 4조(祖)를 섬기고 1482년(성종 14년)에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명선종황제 공신부인(明宣宗皇帝 恭愼夫人) 묘지명」에 그녀를 칭송하는 시가 있다.

동국에서 태어나 중원으로 나오셨네
生乎東國進乎中原
황실을 섬기고 그 몸은 향산에 묻혔네
恭事天府埋玉香山
「역조현후고사도(歷朝賢后故事圖)」 중, 고궁박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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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조현후고사도(歷朝賢后故事圖)」 중, 고궁박물원

중국 궁궐에서 황제가 궁녀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공녀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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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종원소행악도」, 명나라, 중국국가박물관

명나라 선종이 궁궐에서 황후 및 궁녀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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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고도 서러운 조국과 소통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딸이나 누이가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극력 반대했지만 일부에서는 딸이나 누이를 통해 출세를 꿈꾸는 자도 있었다. 비록 의도했던 것은 아닐지라도 딸이나 누이가 공녀가 되면 나라에서는 나머지 가족에게 관직과 재물을 주며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즉 딸이나 누이의 희생으로 남은 남자들은 관직과 재물을 얻는 것이었다. 만일 공녀가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되어 황제 권력 내에 있을 경우라면 고려나 조선의 조정에서는 그들의 아버지, 오빠, 친족을 ‘황친(皇親)’이라 하여 매우 극진하게 예우하였다.

태종 17년(1417)과 세종 10년(1428) 두 차례에 걸쳐 누이동생 둘을 공녀로 보낸 한확이야말로 누이 팔아 출세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확은 우의정과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그의 딸들을 왕자들과 혼인시키는 등 최고 권력과 밀착되어 있었다. 한확과 한명회 등 청주 한씨 가문이 조선전기의 최고 명문으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또 그들의 딸들을 차례로 왕족과 혼인시키고 왕비가 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공녀로 간 두 누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조의 며느리로 들어간 한확의 딸은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로 『내훈』의 저자이기도 하다. 조선과 명나라, 각각의 궁중에 살던 한확의 딸과 누이는 서로 자주 편지 연락을 하며, 각종 토산물을 교환하면서 서로의 권력 유지에 힘을 보탰다. 앞서 죽은 현인비 권씨도 태종의 후궁 정의궁주(貞懿宮主) 권씨에게 백은(白銀) 100냥을 보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정의궁주는 저포와 마포 등을 보냈음을 기록은 전해준다.

구종이 편지를 드리는 장면, 국립민속박물관

중국에 바쳐진 공녀들은 편지글로 조선의 식구들과 왕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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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녀들을 버린 ‘조국’은 그녀들을 여러모로 활용하였다. 그녀들의 조국에서는 자신들 때문에 얻게 된 재물을 서로 나누었고, 그것으로 서로의 정치세력을 굳건히 하였다. “한확과 김덕장이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금은(金銀)·저사(紵絲)·채견(綵絹) 따위의 물건을 양전(兩殿)에 바쳤다”(『태종실록』 17년 12월 20일)고 하였고, “한확은 중국에서 선사받은 염소 20마리, 말 2필을 바치고, 상왕전에도 이와 같이 바쳤다”(『세종실록』 1년 1월 22일)고 하였다. 또한 조정에서는 공녀들의 가족을 외교에 적극 활용하였다. 세종은 한확 등을 북경에 보내 금·은의 공물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했다.(『세종실록』 2년 1월 25일)

공녀를 담보로 갖은 이익을 구가하는 ‘조국’의 사람들, 그렇다면 공녀는 다만 조국을 위해 바쳐진 희생자일 뿐일까? 공녀들은 조국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녀들은 조국의 번영을 위해 자기 한 몸을 순순히 희생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 중에는 자신의 권력 형성에 조국을 적극 활용한 인물도 있었는데, 조국을 향해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기도 했다. 특히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 그녀의 고모였던 공신부인 한씨가 그러했다. 성종대 조정에서는 한씨에게 보낼 물목에 대한 논의가 많이 나온다. 한씨가 구하는 물건은 넉넉히 갖춰주어야 한다든가 중국에서 돌아온 사신에게, 물건을 받는 한씨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묻는 등 많은 신경을 썼다. 이에 한씨에게 보내는 선물이 점점 후해지고 한씨 또한 조선에 요구하는 물품이 점점 많아진다는 불만이 조정대신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황제의 후궁이 된 공녀들, 조선에 남겨진 그녀의 가족들은 국왕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권력을 누렸다. 예컨대 조선의 국법에서 볼 때 명백한 범죄 행위였음에도 그가 만일 후궁이 된 공녀의 가족이었다면 논죄의 대상에서 제외되곤 했다. 중국 황제와 ‘은밀한’ 만남을 가지는 공녀의 가족들에게서 조선의 국왕은 ‘제국’의 권력을 체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공녀를 통해 본 조선시대 여성들의 해외 경험은 미지(未知)의 세계에 대한 열망과 기대에 반응하는 순수 여행의 의미보다는 국가 간 성별 간 권력관계를 함축하는 중세기적 정치의 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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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인 집필자 소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저서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 역서 『여사서』, 『열녀전』, 논문 「소문과 권력:16세기 한사족 부인의 淫行 소문 재구성」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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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공녀로 본 여성의 해외 경험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전용훈,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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