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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에는 외국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굳이 서점에 가서 가이드북을 펼쳐보지 않더라도 준전문가 수준의 파워 블로거가 작성한 유용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여행이 자유화되고, 정보혁명의 여파가 생활 깊숙이 스며들면서 외국 여행의 생활화나 일상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통계청의 사회조사에 따르면, 15세 이상 전체 인구 중에서 ‘지난 1년간 1회 이상 해외여행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 차지하는 비율이 2000년의 5.9퍼센트에서 2009년의 13.6퍼센트로 증가했을 만큼 외국 여행의 대중화와 보편화는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외국 여행이 소수의 특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된 실로 놀라운 변화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조선시대에는 외국 여행의 기회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이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 기록한 문헌은 집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느낌을 생생하게 전해준다는 장점을 가졌던 반면, 그 수록 정보에는 ‘특수한’ 계층의 ‘특수한’ 경험이라는 한계가 내재될 수밖에 없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식자층이라 해도 기행문의 독자로서 외국에 관한 정보를 간접적으로 습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행문 외에도 외국을(또는 세계를) 인식하는 여타의 주요한 통로로서 방송이나 신문 또는 잡지와 같은 언론 매체가 있다. 특히 근대 이행기의 조선사회에서는 『한성순보(漢城旬報)』가 그러한 역할을 처음으로 담당하였다. 『한성순보』는 1880년대 조선인들이 간접 체험한 서구 문물의 대표적인 정보원이었던 것이다.
문무백관의 정보소통 수단, 『관보』
『한성순보』는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왔다. 신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한성순보』가 띠는 관보(官報)로서의 성격을 강조한다. 갑오개혁 이전의 관보 격으로는 『조보(朝報)』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承政院)에서 국왕의 주요 결정 사항 및 전달 사항을 문무백관들에게 전파한 정보 소통의 수단이었다. 소위 삼사(三司)가 하의상달식 언론(言治論道) 기관이었다면 『조보』는 상명하달식 문서였으며, 그 명맥은 『구한국관보』 『조선총독부관보』 등을 거쳐 『대한민국정부관보』로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대체로 관보를 일반 신문과 동일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국민을 대상으로 정부가 발행하는 것인데도 독자의 대부분은 사실상 공무원이라는 데에 있다. 『한성순보』도 「국내관보(國內官報)」를 수록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 독자층이 사실상 일반 대중이 아닌 경외(京外)의 행정 계통에 속한 관리들이었다는 점에서 관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성순보』가 배부된 각 지역의 감영, 군현 및 아문 등에서는 요즘으로 치면 신문 구독료라 할 수 있는 ‘순보채(旬報債)’를 납부해야 했으며, 이는 『한성주보(漢城周報)』 단계에서도 마찬가지였음이 『국용차하책(局用上下冊)』의 ‘주보채(周報債)’ 관련 기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물론 독자층이 한정되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 순한문(純漢文)으로 발행되었다는 점도 들 수 있겠다.
서구의 창구 역할을 한 『한성순보』와 박문국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에 창간되어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의 실패로 발행이 중단되었고, 1886년 1월에 『한성주보』로 다시 창간되어 1888년 7월에 폐간되기에 이른다. 『한성순보』는 국가기관의 하나인 박문국(博文局)에서 간행되었기 때문에 ‘박문국순보(博文局旬報)’라는 별칭도 갖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성주보』는 ‘박문국주보(博文局周報)’라 불리기도 했다.
박문국은 전환국(典圜局), 기기국(機器局), 우정국(郵政局), 직조국(織造局) 등의 여러 정부기관과 더불어 1880년대에 설립된 일종의 근대적 공기업 또는 국영기업에 해당된다. 이러한 기관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신설된 데에는 개항과 그에 따른 불평등조약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조선은 1876년 일본과의 조일수호조규를 시작으로 1882년에는 미국·청국과, 1883년에는 영국·독일과, 1884년에는 러시아·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 와중에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1881)과 수신사(修信使, 1882)를, 청나라에 영선사(領選使, 1881)를, 미국에 보빙사(報聘使, 1883)를 파견하여 외국의 문물 및 제도를 포함한 각종 정보를 취합하고자 했다. 각종 공기업을 새로 세우고 『한성순보』(또는 『한성주보』)를 발간한 것은 개항 후 근대화 노력의 첫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박문국은 『한성순보』라는 신문을 주로 간행하는 곳이었지만, 그 외의 출판물들도 펴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만국정표(萬國政表)』와 『일본내각열전(日本內閣列傳)』이다. 『만국정표』는 영국의 『정치연감(政治年鑑)』을 번역하여 편집한 것으로서 세계 51개국의 기초 정보를 개략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중국, 일본 등의 아시아(亞細亞州) 나라뿐만 아니라 유럽(歐羅巴州), 아프리카(亞非利加州), 북아메리카(北亞米利加州), 남아메리카(南亞米利加州), 대양주(大洋州) 등 6대주의 대표 국가를 두루 수록하고 있다.
『일본내각열전』은 당시 박문국 운영에 관여하고 있던 이노우에 가쿠고로오(井上角五郞)의 서문과 박문국 주사(主事)였던 현영운의 발문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 신내각 주요 대신의 약전(略傳)을 국한문혼용체로 발간한 것이다. 그 외에도 ‘박문국개간(改刊)’이라 찍혀 있는 『신라김씨선원록(新羅金氏璿源錄)』(『천김록(千金錄)』이라고도 함)이 현존하듯, 기관 외부로부터 위탁을 받아 출판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박문국은 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취합된 외국 관련 정보를 간행·배포하는 작업의 중심에 있었던 기관이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한 후에야 『한성순보』의 성격과 본질에 좀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즉 『한성순보』는 관보의 성격을 뛰어넘는 근대적 신문으로서 서구의 제도와 문물 및 동향을 전해주는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1880년대 조선인, 지구를 넘어 우주를 인식하다
『한성순보』의 체제는 「내국기사(內國紀事)」 「각국근사(各國近事)」 「논설(論說)」로 삼분될 수 있는데, 「내국기사」는 정치면에 해당하는 「국내관보」와 사회면 또는 경제면에 해당하는 「국내사보(國內私報)」로 구성되었고, 「각국근사」는 국제면에 해당되며, 「논설」에는 사설이나 칼럼이 실렸다. 그중에서도 「각국근사」의 기사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한성순보』 제1호의 「각국근사」에 수록된 기사 제목
ㆍ漢學西行 (한학이 서양에 가다)
ㆍ琿春信息 (훈춘 소식)
ㆍ安南事起源 (베트남 사건의 기원)
ㆍ馬達加斯加島事件近報 (마다가스카르 섬 사건의 최근 소식)
ㆍ西班牙國內亂 (스페인 내란)
ㆍ俄國海軍 (러시아 해군)
ㆍ蘇祿國王戰死 (스와질랜드 국왕 전사)
ㆍ亞業加斯坦王得英之祿金 [아프가니스탄 국왕이 영국의 녹금(祿金)을 받다]
ㆍ日本瑣聞 (일본 단신)
ㆍ日本陸軍 (일본 육군)
ㆍ緬甸世子未知行處 (미얀마 세자의 행방을 알 수 없다)
ㆍ安南與法人議和 (베트남이 프랑스와 화의조약을 맺다)
ㆍ米國還償金 (미국이 배상금을 돌려주었다)
기사는 소속 기자가 직접 취재해서 작성한 것은 아니었고, 이미 간행된 외국 신문을 선택적으로 번역·편집하여 싣는 형식이었다. 이는 현대 한국의 언론에서 CNN, AP, AFP나 로이터 통신을 전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성순보』에서도 로이터 통신을 ‘로투전음(路透電音)’이라 하여 인용하고 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경우는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인근 국가들의 소식통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보의 전파 경로에서 외국 언론을 거쳤다는 한계는 있지만, 기사의 소재가 된 국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전 세계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글로벌’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한 세기도 더 전에 이미 글로벌한 시야만큼은 확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글로브(지구)’를 넘어서 우주에 대한 관심까지도 포괄하고 있었음은 「지구전도(地球全圖)」 「지구환일도(地毬圜日圖)」 「지구환일성세서도(地毬圜日成歲序圖)」 등의 도판에서 잘 나타난다. 지금 보더라도 별로 틀릴 것 없는 근대 과학에 기반한 정보가 공유되었다는 점에서 조선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이미 객관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잠깐 15세기, 17세기, 19세기에 걸친 조선 사람의 세계 인식의 변화를 되짚어보자. 15세기의 사정을 대표하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1402)가 중화주의적 국제질서에 기반하되 조선을 부각시키는 관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반면, 17세기에 이수광이 편찬한 『지봉유설』(1614)에 이르러서는 「구라파국여지도(歐羅巴國輿地圖)」나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가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관적인 세계 인식을 벗어나 객관적인 세계 인식으로 전환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파악되는 나라의 수효에는 큰 차이가 없는 반면에, 나라 간의 상대적 규모와 중심성에 있어서 보다 현실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그 내용들이 반영되고 있다.
17세기와 19세기를 대비해보자면, 『지봉유설』에서 프랑스(佛浪機國)의 옷감을 소개하면서 “서양포(西洋布)라는 베는 지극히 가볍고 가늘기가 매미의 날개(蟬翼) 같다”고 표현한 것처럼 17세기까지 조선 사람의 외국에 대한 관심이 주로 풍물 위주였다면, 19세기 『한성순보』 「각국근사」에 나타나는 조선 사람의 관심사는 시사(時事)에서 제도에 이르기까지 꽤 폭넓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호기심의 대상을 넘어선 선망과 학습의 대상으로서 외국의 문물이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항기에 조선을 다녀간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서 특이 사항으로 거론하곤 했던 비위생, 게으름, 대식(大食), 미신 추종 등 지극히 인류학적 관점에서의 단편들과는 대조된다는 점에서, 당대 조선의 후진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황제의 식비 통계에서 인구 통계까지
경제사 이론에서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것인데,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국가가 선발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러한 조건도 어디까지나 필요조건일 뿐 선진화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최근의 경제발전론이나 제도경제학에서 논의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가 바로 제도의 확립이다. 그러므로 『한성순보』 국제면에서 외국의 어떤 제도가 소개되었고, 그것이 조선의 당대성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주로 경제제도와 관련한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당시 조선 사람들이 사용한 ‘경제’ 개념은 일률적이지 않았다. 전통사회에서도 경제(經濟)라는 용어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세제민(經世濟民)각주1) 의 축약어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한성순보』에서는 ‘economy’의 번역어로서의 ‘경제’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어떤 국가의 경제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절차는 경제 통계에 접근하는 것이다. 『한성순보』에는 당대 주요 선진국의 각종 통계가 수시로 게재되었다. 각국 황제의 하루 평균 식비 통계는 황실 재정에 대한 이해를 도왔고, 각국의 유명한 큰 강(江)에 대한 통계는 단순한 지리 정보를 넘어서 경제자원의 파악을 가능하게 했으며, 보병이나 기병 같은 각국 군대의 규모는 당시 조선의 강병책 추진을 위한 지표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자주 실린 정보는 역시 각국의 인구였다. 어떤 나라의 인구를 안다는 것은 해당국의 인적 자원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그 나라의 경제 규모를 1인당 평균으로 환산하여 다른 나라에 대비한 생활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구는 가장 기초적인 경제 통계이다.
『한성순보』는 각국의 인구뿐만 아니라 주요 도시의 인구도 수록하였다. 예를 들어 『한성순보』 제26호에 실린 ‘새로 조사한 유럽 4대 도시 인구표’에는 런던(倫敦) 383만2440인, 베를린(伯林) 122만2500인, 파리(巴里) 222만5910인, 빈(維也納) 110만3100인으로 집계되어 있다. 당시 조선의 수도 서울(漢城府)의 인구가 20~3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것과 대비해볼 때, 유럽 인구의 도시 집중화 현상을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했을지는 짐작할 만하다.
부국에의 지향과 타산지석으로서의 중국
개항 이후 국력 신장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조선 정부나 개화파 관료에게 있어 부국(富國)에의 지향은 당면 과제였다. 다른 나라에서 국가의 살림을 어떻게 꾸려나가는지를 살피는 것도 『한성순보』가 수행한 역할 중 하나였다. 각국의 세제나 조세 통계를 소개하고, 주요국의 국비(國費) 또는 재정의 개황을 알리는 기사는 수시로 게재되었다. 특히 각국의 예산안을 비교해볼 수 있었던 점은 향후 정부가 추진하려 한 개혁 방안의 참고 자료로서 충분한 의의를 지녔을 것이다.
중국의 『만국공보(萬國公報)』를 인용한 『한성순보』 제22호의 다음 기사[‘부국설(富國說) 상(上)’]는 중국이 강대국이 되지 못한 이유를 비판적으로 해설하는 동시에 조선의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강하고서 부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부하고서 강하지 않은 나라가 없으니 나라를 강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부로부터 시작해야 된다. (…) 오늘날 중국으로 논한다면 더더욱 부를 서두르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오늘의 중국은 강하지 못함이 매우 심한데 그 까닭은 부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본래 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부해지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인구가 많은 것이 걱정거리가 되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서구 사람들은 다만 인구가 많지 않은 것을 걱정할 뿐이니 인구의 다과를 막론하고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영위할 줄 모르는 것만 걱정할 뿐이다. (…) 지금 곧 서둘러 시행할 일은 재력(才力)을 다하여 천연자원을 채굴하여 부강을 이룩하는 것만 한 것은 없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천연자원의 채굴을 강조한 부분이다. 바로 다음 호(제23호)의 ‘부국설 하(下)’에서 요약하고 있듯이 당시 중국의 미진한 점은 탄광 미개발, 철로 미개설, 전선 미설치의 세 가지였는데, 그중에서도 석탄 채굴의 기계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집중적으로 논하고 있다.
최근의 경제사 연구에서 잘 지적하고 있듯이 1800년 무렵까지 유럽 국가들과 중국의 1인당 소득은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9세기 들어 유럽은 급격한 성장에 돌입한 반면 중국은 침체의 늪에 빠졌는데, 이러한 현상을 거대한 분기(The Great Divergence)라고 한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원인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영국에는 있었지만 중국에는 없었던 것’, 즉 석탄이다. 영국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진행된 기계화를 동반한 산업혁명은 화석연료의 생산에 의해 지지되었지만, 중국에서는 기계화도 산업혁명도 없었기에 연료혁명도 뒤따르지 못했던 것이다. 21세기 국제사회에서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제품의 생산에 필수 요소인 희토류(稀土類)의 생산을 중국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현실을 떠올려본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주식회사 제도와 조선의 현실
자연자원이 풍부한 중국과는 달리 제약된 환경에서 부강을 지향해야 했던 조선으로서는 경제 제도의 도입이 보다 긴요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주식회사(joint stock company)이다. 주식회사 제도는 17세기 초에 설립된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를 기원으로 하는데, 그로부터 약 3세기가 지난 시점에 조선에 본격적으로 소개된다. 네덜란드 역시 조선처럼 국토의 면적이 광대하지 않고 자연자원도 풍부하지 않았지만, 전 세계 상업과 금융을 휘어잡고 한 시대를 풍미하며 제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네덜란드가 경제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조건 중의 하나가 바로 주식회사 조직의 제도적 도입이었다.
주식회사는 자금을 풍부하게 지니지 못한 소액 투자자까지 포섭하여 광범위하게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경제조직으로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특히 소유한 주식을 매매·양도 또는 상속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기업가는 사라져도 기업은 장기적으로 존속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기사이지만, 『한성순보』 제3호에 실린 ‘회사설(會社說)’에 소개된 회사 규약 다섯 조항 중 제1조는 다음과 같이 주식회사를 압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처음으로 회사를 설립하고자 하는 자는 주지(主旨)를 세상 사람들에게 광고(廣告)하여 동지(同志)를 얻는다. 회사를 조직할 때는 자본의 총액과 이식(利息)의 다과를 통틀어 계획하여 신문에 발표해서 모든 세상 사람이 그 회사의 유익함을 알게 한다. 그런 후에 고표(股票)을 발매하는데, 만일 회사의 자본금으로 1만 냥이 필요하면 1장의 정가가 10냥짜리인 고표 1천 장을 만들어 세상 사람들이 마음대로 와서 매입하게 하며, 고표를 사는 사람을 사원(社員)이라 한다.
현대 용어로 풀어보자면, 여기서 고표는 주권(株券), 사원은 주주(株主)를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생략했지만) 역원(役員)이라 했던 이사(理事)에 대한 설명도 뒤따르고 있다. 또한 제4조에서는 주가의 등락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간략히 해설하고 있다.
고표를 사사(私私)로 파는 규례는 회사의 성쇠와 관계가 있어, 만일 회사의 이익이 매년 많으면 고표의 값이 올라 처음에 10냥짜리 고표가 11~20냥이 되기도 어렵지 않다. 혹은 회사의 이익이 비용 충당에 모자라거나 본전에 결손이 나면, 비록 1천 냥짜리 고표도 휴지에 불과하게 된다.
주식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설은 『한성순보』 제10호의 ‘주식이 시전에 해가 됨을 논함(論股分票爲害市廛)’이나 제15호의 ‘직포국의 주식 모집에 관한 논설(織布局集股說)’ 등의 후속 기사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어진 바 있다. 비록 다른 나라의 사례를 통한 것이었지만, 이처럼 주식회사 제도에 대한 인식이 확대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식회사의 설립이 활발히 전개되지는 않았다. 한일병합 이전의 조선에서 주식회사의 수는 불과 10여 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일반회사 주식의 거래는 식민지기에 들어 주식시장이 성립하고 나서도 본격화되지 못했고, 해방 후 거래소가 다시 설립되는 1956년 이후에야 명실상부한 주식시장이 한국에 성립되기에 이른다.
수정궁으로 대변된 영국의 철강 산업
마지막으로 『한성순보』의 기사 중에서 선진국의 산업 발전 수준을 실감할 수 있게 한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한성순보』 제23호에는 ‘영국수정궁(英國水晶宮)’이라는 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영국 수도에서 40리 되는 곳에 수정궁(水晶宮)이 있는데 수십 년 전에 관에서 파견한 백작 팩스턴(博四屯, J. Paxton)이 세운 것이다. 기둥은 철주(鐵柱)로 하였고 상하 사방을 모두 유리로 장식해 멀리서 바라보면 빛깔이 휘황찬란해서 사람의 눈과 마음을 현란시키기 때문에 이름을 수정궁이라 하였다. (…) 모든 외국관(外國官)에서 만든 화원(花園)·그림·사방각(四方閣)은 국민들이 유람하는 것을 허락하고 구경하려면 얼마씩의 돈을 낸다. 수년 후에는 그 본전이 회수되고 이자가 본전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국민들과 즐거움을 함께하여 아름다운 소문이 멀리까지 들리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또 듣건대 이 궁전은 원래 물류창고(集貨廠)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그 공사를 화려하게 하여 수정궁을 수리함으로써 더욱 교묘하게 해 국민들의 유람처로 제공해서 더 많은 이익을 본 것이라 한다.
수정궁은 ‘Crystal Palace’의 번역어로서 1851년에 영국에서 열린 제1회 만국박람회장 건물을 가리킨다.
모든 기둥이 철제로 제작되었고, 그 사이는 유리로 뒤덮였다. 수정궁의 상징성은 근대적 박람회의 시초라는 것 외에도 산업, 미술, 건축 및 세계화에 이르는 다방면의 변화와 도약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870년대까지도 영국의 선철(銑鐵)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절반에 달했으며, 산업혁명이 영국을 세계의 중심에 올려놓았음은 세계의 공장(The Workshop of the World)이라는 별칭에서도 잘 나타난다.
제도 수용의 한계와 교훈
『한성순보』가 간행될 무렵의 조선에서는 신뢰할 만한 변변한 통계조차 갖추지 못했고, 산업화를 위해 필요한 경제제도의 도입 또한 실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바로 그 시점에, 통계 파악의 중요성과 선진국의 산업화 실태, 그리고 근대적 경제 제도에 대한 이해 수준을 높이는 데에 1차적인 기여를 한 것이 『한성순보』였다. 『한성순보』에서 기사화되었던 제도 또는 문물이 소개되는 데에만 그쳤을 뿐 본격적인 도입이나 법제화를 통한 확립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개혁의 지속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개화파의 실각과 더불어 『한성순보』가 폐간되고, 이후 재간행된 『한성주보』마저 단명을 면치 못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세기에 걸쳐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고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경제 제도의 중요성을 간파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충분히 습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적절하게 또는 현실감 있게 실행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글로벌한 시야, 장기적 안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요즘에 있어서도 첨단의 제도와 혁신을 애써 무시하고 수동적으로 응대하는 사람들에게는 130년 전의 『한성순보』에 관한 이야기도 그저 옛날 옛적의 이야기일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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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공저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 논문 「조선후기 왕실의 조달절차와 소통체계」, 「19-20세기 보부상 조직에 대한 재평가」 외 다수
출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조선 사람들의 여정과 그 기록. 여말선초부터 식민지 시기까지 근 600년 동안 이뤄진 다양한 형태의 세계여행을 12가지로 선별하여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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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박문국과 한성순보, 그리고 경제제도 –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전용훈,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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