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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해동제국기의 세계 인식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자신감과 현실감으로 빚어낸 15세기의 세계지도

누워서 세계지도로 세상을 유람하다

신생 국가 조선을 세운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조선 밖의 세계에서 겪었던 일들을 그다지 풍부하게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경험 폭이 좁았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이나 일본은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고, 또 중국·일본 유구 등지의 사람들이 조선으로 건너오는 일이 많아 조선 사람들은 생각 이상으로 바깥세상을 다양하게 체험하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기록과 자료를 통해 500~600년 전 조선 사람들이 그들 바깥의 세상을 체험하고 이해하는 여정을 따라가며 추체험하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다.

15세기 조선 사람들의 세계 경험, 세계 인식은 예상 외로 넓었고 또 세밀한 점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볼 수 없었던 곳에 대해서는 책과 세계지도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두었으며, 또 그들이 다녀왔던 곳, 반드시 관계를 맺어야 할 곳에 대해서는 스스로 확보할 수 있는 모든 경험과 지식을 꼼꼼하게 집성해 한 권의 책자로 만들어두었다.

15세기 조선 사람들의 세계 경험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1402년(태종 2)에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다. 이 지도는 조선에서 만들어진 현존 최고(最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은 없으며, 류코쿠 대학 등 일본 내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이 지도가 언제 일본으로 들어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류코쿠 대학 소장본의 크기는 가로 1.6미터, 세로 1.5미터이다. 최근 이 대학에서는 3억5000만 화소 이상의 디지털 카메라와 X선 처리 기법 등을 이용해 제작 당시의 색채를 복원해냈다고 한다. 9년여를 작업한 끝의 결과였다. 조선에서 만들어졌던 것이 그 시간을 알 수 없는 때에 일본으로 흘러가 있다가, 첨단의 광학 기술로 본래의 모습을 찾은 셈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고(故) 이찬 교수가 기증한 이 지도의 모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1402년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일본 류코쿠 대학

이 지도는 「대명혼일도」와 비슷하게 중국과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지도투영법을 사용했다. 또 지중해를 커다란 만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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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모사본), 권근·이무·이회, 158×168cm, 140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중국을 중앙으로 잡아 동쪽에는 조선과 일본을, 서쪽에는 유럽, 아프리카, 아라비아 등을 그렸다. 지도 위쪽에는 중국 역대 제왕의 도읍지가 적혀 있고, 아래쪽에는 권근의 발문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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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가 만들어진 과정, 그리고 이 지도가 담고 있는 내용은 류코쿠 대학 소장본 지도에 적혀 있는 권근의 발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의정부의 좌정승과 우정승 김사형, 이무 등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저본으로 하고, 여기에 조선과 일본의 지도를 덧붙여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의 강역 부분은 조선에서 새로 그린 것이고, 일본은 일본에서 구해온 지도를 활용하여 재정리했다고 한다.

천하는 지극히 넓다. 안으로 중국에서 밖으로 사해에 닿아 몇천만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것을, 요약하여 두어 자 되는 폭(幅)에다 그리니 자세하게 기록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지도를 만든 것이 대체로 엉성하고 간략하다. 오직 오문(吳門) 이택민(李澤民)이 그린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가 매우 자세하다. 역대 제왕의 국도 연혁은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 잘 갖추어져 있다. 건문[建文, 명나라 혜제(惠帝)의 연호] 4년(1402, 태종 2) 여름에 좌정승 김사형(金士衡)·우정승 이무(李茂)가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이 지도를 참고하여 검상(檢詳) 이회(李薈)를 시켜 다시 더 상세히 교정하게 한 다음, 합하여 한 지도를 만들었다. 요수(遼水) 동쪽과 우리나라 지역은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에도 많이 빠져 있었으므로, 이제 특별히 우리나라 지도를 더 넓히고 일본 지도까지 붙여 새 지도를 만드니, 조리가 있고 볼만하여 참으로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

대저 지도를 보고서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아는 것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한 도움이 되는 것이니, 두 분이 이 지도에 정성을 다한 데에서도 그 규모와 국량의 방대함을 알 수 있다. 나는 변변치 못한 재주로 참찬이 되어 두 분의 뒤를 따라 이 지도가 완성됨을 보고 기뻐하였으며 매우 다행하게 여기는 바이다.

평일에 책에서 강구하여 보고자 하던 나의 뜻을 이미 이루었고, 또 내가 뒷날 은퇴하여 시골에 거처하게 되면, 누워서 천하를 유람하고자 할 뜻을 이루게 됨을 기뻐하며 이 말을 지도 아래에 쓴다.

이 기록에 따르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기존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세계지도에, 조선과 일본의 동아시아 부분을 한층 세밀하게 보완하여 만든, 새로운 조선판 세계지도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에는 13~14세기 중국과 조선, 일본의 지도를 만드는 문화 역량이 응축되어 있다.

「성교광피도」와 「혼일강리도」는 모두 13세기 원대에 만들어진 세계지도다. 「성교광피도」는 천자의 교화와 은혜가 널리 퍼지는 지역을 그린 지도라는 의미다. 원나라 말기에 제작되었다. 「혼일강리도」는 천자가 다스리는 하나로 된 세상의 지도라는 뜻을 담고 있다. 1360년 작품이다. 두 지도 모두 중국을 정복하는 한편, 유럽 지역으로 그 문화와 세력을 뻗치며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기를 꿈꾸었던 원나라의 야망과 문화 역량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들 지도에는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의 강역이 그려져 있는데, 「혼일강리도」의 경우는 역사적으로 존속하고 소멸했던 여러 국가의 수도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그러니까 「혼일강리도」는 역사지리도적인 성격도 겸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만들어진 지도는 이회가 그린 「조선팔도도(朝鮮八道圖)」일 가능성이 크다. 이 지도는 1402년 5월에 작성되었다. 일본 지역을 그리기 위해 참고한 자료는 1401년 봄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가져온 「행기도(行基圖)」로 추정된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한눈으로 세상을 조망할 수 있게 하는 매체였다. 문 밖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는 정보가 여기에 들어 있었다. 세계의 지리가 원형 그대로 파악되니, 조선은 물론이고 멀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여러 나라를 누운 자리에서 유람하며 즐길 수도 있을 터였다. 권근이 “문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다”고도 하고 “은퇴하게 되면 이 지도를 통하여 ‘와유(臥遊)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은 이 지도에 대한 상찬의 수사만은 아니었다.

「조선팔도도」(이모본), 이회, 종이에 채색, 32×21cm, 고려대박물관

1402년 이회가 만든 전국지도로, 조선시대 최초의 지도이다. 특히 그가 만든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조선 부분이 이 지도를 기본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그 특성을 살필 수 있다.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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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自尊)과 자대(自大)의 조선

조선에서 중국과 한반도를 합친 지도를 만든 힘은 새로운 국가의 틀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움직였던 이 시기 조선의 기운 넘치는 역동성에서 나왔을 것이다. 서울로 새롭게 도성을 정하고, 궁궐과 사직·종묘를 만들며, 국가 경영을 위한 제도와 규범을 만들어나가는 팔팔한 기운이 이 거대한 규모의 지도에서도 느껴진다. 세계를 한눈에 파악하고 나라를 다스릴 안목을 얻으려는 의식이 거기에 작용하고 있었다. 권근이 “지도를 보고서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아는 것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한 도움이 되는 것이니, 두 분이 이 지도에 정성을 다한 데서도 그 규모와 국량의 방대함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은 이 지도가 정치적인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지도를 그냥 아무런 목적 없이 만든 것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참고할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서 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 시기에 이러한 지도를 만드는 능력이 한순간에 불쑥 솟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고려 공민왕대에도 이와 비슷한 지도가 만들어진 바 있다. 사농소경(司農少卿) 나흥유(羅興儒)가 중원(中原) 및 고려의 지도를 만들어 공민왕에게 바친 것이 그것이다(『고려사』 권114, 열전 27, 나흥유). 무엇으로 이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지도는 유사 이래 다양하게 나타났던 여러 국가의 건국과 멸망, 영토의 분리와 통합의 자취를 담고 있었다.

고려와 중원의 너른 강역을 살피고 그 지역 위에 펼쳐진 역대 여러 국가의 흔적을 이해할 만한 정보를 한눈에 제공하는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가 공민왕에게 이 지도를 바치면서 “옛것을 좋아하며 학문이 넓고 바른 군자(君子)가 보면 가슴속에 천지(天地)가 담깁니다”라며 자신했는데,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지도를 조선 사람들이 활용해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중국 대륙과 고려가 포함된 지도를 만들고자 했던 그 경험이 문화 전통으로 이어지며 재현되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그려진 세계는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비사실적이다. 가령 아프리카와 유럽은 비교적 본래의 땅 모양과 유사하다. 반면 인도와 인도차이나의 형상은 실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게 그려졌다. 조선의 지형은 비교적 정확하여 실제 모습과 흡사한 데 반해, 그 비율에서만큼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그려졌다. 한편 이 지역의 지도는 중국이나 일본 지역과는 달리 산과 물길의 흐름을 뚜렷하게 표시하고 있다. 조선의 지도를 덧붙여 만든 흔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원의 지도 제작 방식과 조선의 그것이 달랐다는 사실도 여실히 보여준다. 일본은 크기도 부정확할뿐더러 본래의 형상을 갖추지 않고 흐트러져 있다.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모습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제작을 지탱하는 실력과 역량을 보여준다. 지도를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크게 미흡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지도에는 지도 제작 능력과는 별도로 지도를 만드는 사람들의 세계관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라는 이름에서 보듯, 이 지도는 중국을 중심에 두며 만들어진 원대 지도 제작자들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조선이 다른 나라에 견주어 지나치게 큰 것은 조선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자부심 혹은 조선을 중시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조선을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로 편입시키고, 중국 문화를 적극 수용하며 변화하는 것을 조선 사람들은 매우 의미 있게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 고유의 역사와 문화 전통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의 지도가 원형과 다르게 묘사된 것은, 작은 규모의 지도에 보다 효율적으로 일본을 그리기 위한 기술적인 시도로 읽을 수 있다. 한반도에서 동남쪽으로 많이 비껴나 있는 일본은 한반도의 남쪽으로 약간 틀어서 배치하면 지도의 크기를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크기를 줄인 것은 일본을 작은 나라 혹은 문화 역량이 뒤떨어지는 나라로 생각한 이 시기 조선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이 지도는 기존의 세계지도에 대한 지식, 그리고 기존 세계질서의 틀 속에 조선을 당당하게 위치지으려는 자의식이 만들어낸, 조선 사람들의 자존·자대의식의 산물이었다.

『중국지도첩』, M 마르티니, 58.3×37.2cm, 1655

특정 지역의 인식은 그 지역에 대한 관심도, 정보와 연관된다. 16~17세기 서구인들이 그린 조선 지도는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조선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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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는 조선과 동아시아를 어떻게 그렸나

15세기 조선 사람의 세계에 대한 생각을 잘 알려주는 또 다른 자료는 1471년(성종 2) 신숙주가 왕명을 받아 작성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이다. 1443년(세종 25)에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기 조선과 일본, 유구 사이를 오갔던 사람들이 수집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해동제국이란 문자 그대로는 동쪽 바다에 있는 여러 나라를 뜻하지만, 이 책에서는 일본·유구국(琉球國, 류큐국)을 주로 다루었다. 일본과 유구국에 관한 지도, 이들 역사와 풍속 등이 정리되어 있다. 이 책은 처음 만들어진 뒤 몇 차례 증보되었다. 처음 만들었을 때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해동제국기』, 신숙주, 1471,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443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왕명에 의해 편찬한 책이다. 일본과 유구국의 지세나 국정, 외교 연혁 그리고 풍속 등을 상세히 담고 있어 이들 나라와의 외교에 필수 참고서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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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
일본본국도(日本本國圖)
일본국서해도구주도(日本國西海道九州圖)
일본일기도도(日本壹岐島圖)
일본국대마도도(日本國對馬島圖)
유구국도(琉球國圖)
본문
일본국기(日本國紀)
유구국기(琉球國紀)
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

이후 내용이 더 첨가되었다. 1474년 예조좌랑 남제(南悌)가 「제포지도(齊浦之圖)」 「부산포지도(富山浦之圖)」 「염포지도(鹽浦之圖)」 등 지도 3매를 더하고, 1501년(연산군 7) 성희안(成希顔)이 유구 사신에게서 들은 일본의 국정에 관한 사실을 덧붙였다.

『해동제국기』는 일본 유구국에 관한 지리 정보와 인문 지식을 담고 있다. 지도와 서술을 통해 가능한 한 충실하게 여러 섬나라들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다. 먼저 지도를 보자.

『해동제국기』(목판본)에 실린 「해동제국총도」, 서울대 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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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총도」는 조선 영역은 남해안의 울산포·염포·동래현만 그리고, 대마도·일기도·구주·일본 본토·유구국을 한눈에 들어오도록 그렸다. 이와 더불어 부상·영주·여국·나리국 등도 표기되어 있다. 모두 전설상의 지명·나라들인데, 지도에 실재하고 있는 것처럼 그려두었다.

일본 본국 지도는 66주의 경계에 맞추어 위치를 알 수 있게 했다. 즉 일본의 본토를 한눈에 조감하며 지리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경도(京都)에 대해서는 일본 국도라 표기하고, 국왕성과 천황성 그리고 전산전(畠山殿), 세천전(細川殿) 등 다섯 궁전을 표기해두었다. 가마쿠라 막부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에 대해서는 ‘겸창전(鎌倉殿)’이라 적어 이곳이 경도와는 명확히 구분되는 곳임을 드러냈다.

「일본국서해도구주도」 「일본일기도도」 「일본국대마도도」는 조선에서 일본 본토로 갈 때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는 중요한 곳들이다. 지역별로 별도의 지도를 만들어 그 지역의 형세와 지명, 여러 섬들, 항해로를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해두었다.

「유구국도」는 독립 국가 ‘유구’의 실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유구국도를 비롯한 이 나라 여러 지역과 섬들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이곳에서 중국 혹은 남쪽의 인도차이나 방향으로 가는 행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내용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 「해동제국도」의 시선이 그 지역으로까지 넓게는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해행총재』에 실린 「유구국지도」, 조선후기, 국립중앙도서관

『해동제국』에 실린 「유구국도」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18세기 조선 사람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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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목판본)에 실린 「일본국대마도도」, 서울대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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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목판본)에 실린 「일본일기도도」, 서울대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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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해서는 천황의 역사, 막부의 역사, 풍속 등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어느 경우나 특별한 논평 없이 사실 그대로 기술하려 했다. 천황의 세계(世系)에 대해, 일본에서는 ‘천신(天神) 7대, 지신(地神) 5대를 거쳐 인황(人皇)으로 권력의 축이 이동해왔다고 이해한다’고 하고, 인황의 시조인 신무천황(神武天皇)부터 당대의 천황까지 세세하게 정리했다.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이야기되는 일본 천황가의 내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한편 막부를 이끌고 있던 일본의 실력자 대장군에 대해서는 그를 ‘국왕’으로 이해하며 그와 연관된 사실들을 기록했다. “그 나라 안에서는 감히 국왕이라 부르지 못하고 다만 ‘어소(御所)’라고만 부른다. 명령하는 문서는 ‘명교서(明敎書)’라고 한다. 국왕은 매년 정월 초하룻날에 대신을 인솔하고 천황을 한 번 뵐 뿐 보통 때는 서로 접촉이 없다. 천황은 나라의 정치나 이웃 나라와의 외교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해동제국기』에서 일본의 국왕은 천황과는 다른, 내정과 외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일본의 국왕이 왜 천황을 대리하여 이러한 위치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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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풍속 또한 특기할 만한 내용을 중심으로 기록했다. 중요한 내용을 몇 가지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천황의 아들은 그들의 친족과 혼인하고 국왕의 아들은 여러 대신들과 혼인한다.
• 여러 대신의 관직은 세습시킨다.
• 형벌에 태형(笞刑)이나 장형(杖刑)은 없고, 혹 재산을 빼앗기도 하고 혹 유배를 보내기도 하며, 죄가 무거우면 죽인다.
• 매년 정월 초하루, 3월 3일, 5월 5일, 6월 15일, 7월 7일, 7월 15일, 8월 1일, 9월 9일, 10월 돼지날(亥日)을 명절로 여겨,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각기 마을 사람들과 친족이 모여서 잔칫술을 마시고 즐긴다.
• 남자들은 머리를 자르고, 단검을 차고 다닌다. 남녀 모두 얼굴을 단장하는 자는 이빨을 검게 물들인다.
• 남녀 가릴 것 없이 그들의 나라 글을 알며 오직 중들만이 경서를 읽어서 한자를 안다.

『해동제국기』는 조선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를 여정별로 자세히 기록했다. 경상도 동래 부산포로부터 대마도의 도이사지까지 48리이며, 교토의 왕성까지는 323리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1리는 한국의 10리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슈리귀족도」, 종이에 채색, 83.7×44.2cm, 도쿄국립박물관

유구국 귀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들 귀족은 왕부가 향유했던 최고의 문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그림에서 귀족의 세련된 옷차림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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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먼 나라 유구국

유구국에 대해서는 「해동제국총도」 「유구국도」를 통해 동아시아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이 나라의 위치, 그곳의 구체적인 지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해동제국기』의 유구국 관련 정보는 일본에 비해 소략하다. 이 책의 찬자는 유구가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므로, 우선 그들이 조선으로 조빙 왔을 때 부르던 칭호와 순서를 기록해놓아 훗날의 고찰을 기다린다고 했다. 조선으로 오는 사신 행차를 ‘조빙’으로 표현하여, 유구국보다 조선이 상국(上國)임을 과시했다. 『해동제국기』 속의 유구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유구사절에도상경도」, 문유, 종이에 채색, 28.9×523.9cm, 1843, 도쿄국립박물관

조선과 교류했던 유구국 사신들의 행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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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역사와 유구국까지의 거리

1392년 이래 매년 사신이 오며, 국왕 찰도는 “유구국 중산왕(中山王)”이라고 부른다.

찰도는 방물(方物)을 성실하게 바치며, 사신으로는 혹 자기 나라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혹 일본의 상인으로 그 나라에 있는 자를 사신으로 삼기도 한다. 그 나라에서 보내는 문서의 명칭이 일정하지 않고, 법식도 일정하지 않다. 대마도-동래현의 부산포까지 모두 543리이다.

유구의 지형과 특산

나라가 남해 가운데 있다. 남북이 길고 동서는 짧다.

수도에는 석성(石城)이 있고 다스리는 섬은 대강 36개이다.

유황이 생산되는데, 아무리 캐도 끝이 없다. 해마다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유황 6만 근과 말 40필을 바친다.

정치제도, 생업, 나라의 풍속

국왕은 누대(樓臺)에서 살며 다른 나라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 때는 임시 누각을 만들어 그들과 상대한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국서(國書)가 오면 깃발을 들고 나와 맞이한다.

오군통제부, 의정사, 육조 등이 있다.

땅은 좁고 인구는 많기 때문에 바다에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다. 서쪽으로는 남만(南蠻) 및 중국과 통하고, 동으로는 일본 및 조선과 통한다. 일본과 남만의 상선들도 국도의 항구에 모여들며 이 나라 사람들은 항구 주변에 점포를 설치하고 교역을 한다.

땅의 기후는 항상 따뜻하다.

논에서는 일 년에 두 번씩 수확을 한다.

「책봉유구도」, 천사관, 북경고궁박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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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봉유구도」, 천사관, 북경고궁박물원

유구 왕의 책봉 장면을 그린 것으로, 유구국 의식의 일면을 기록으로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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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물산고』, 전촌등(田村登) 편, 29.5×21cm, 류큐대부속도서관

유구의 지명과 특산물, 동식물, 물산 등에 대해 기록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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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 냉혹한 현실 혹은 인정의 세계

『해동제국기』는 일본과 유구국을 이해하기 위한 책이었다. 즉 조선의 외교적 목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냉혹한 현실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신숙주가 지은 서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신숙주는 일본을 오랑캐로 이해하고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며 나라 밖 오랑캐를 잘 다룰 방도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가운데 이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일본을 법도에 맞게 진무하면 그들이 예를 갖추어 조빙하나 법도에 어긋나게 대우하면 방자하게 노략질한다고 하여 이 나라를 예에 맞추어 대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진공선도」, 종이에 채색, 84.5×45.5cm, 도쿄국립박물관

유구국에서 중국으로 공물을 실어 나르던 배이다. 유구국은 중국이나 조선에 조공을 하는 입장이었지만, 언제 노략질하며 돌변할지 몰라 조선은 그들을 경계하였다. 그들은 특히 배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바다 위에서의 활약이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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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동해 가운데 있는 나라들을 살펴보건대 한두 나라가 아닙니다. 그중에서 일본이 역사가 가장 길고 제일 큽니다. 땅은 흑룡강의 북쪽에서 시작해서 우리나라 제주의 남쪽까지 이르고, 유구와 잇닿아 있어서 그 지형이 매우 깁니다. (…) 대신들이 각 지역을 점거하고 나누어 다스리는 것이 중국의 봉건 제후와 같아서 심하게 통제받거나 예속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습성이 굳세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능숙하게 쓰고 배를 부리는 데도 익숙합니다.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을 법도에 맞게 진무(鎭撫)하면 예를 갖추어 조빙하지만, 법도에 어긋나게 하면 곧 방자하게 노략질을 합니다.

하지만 신숙주는 일본과 조선의 이러한 관계는 조선의 정치가 문란해져 자신을 다스려 세울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다면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보았다. 외교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내치(內治)·내정(內政)이 성공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조(前朝, 고려)의 말기에 국정이 문란해져 그들을 진무하는 법도를 잃었으므로, 변경에 환란이 생겨 바닷가 수천 리의 땅이 황폐해지고 잡초만 우거졌는데, 우리 태조대왕이 분연히 일어나 지리산의 동정, 인월, 토동 등지에서 수십 차례를 힘껏 싸운 연후에 왜적의 방자한 행동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세운 이래로 훌륭한 성군이 연이어 계승하여 정치가 맑게 다스려져 안의 다스림이 이미 융성해지니, 외방 민족들도 복속하여 질서를 지키게 되었고, 변방의 백성들도 그곳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신이 일찍이 들으니 ‘오랑캐를 다스리는 방도는 밖을 정벌하는 데 있지 않고 내치(內治)를 잘하는 데 있으며, 변방을 다스리는 데 있지 않고 조정을 잘 다루는 데 달려 있으며, 무력을 강화하는 데 있지 않고 기강을 확립하는 데 있다’고 했으니, 그것이 여기서 증명된 것입니다.

『해동제국기』는 냉혹한 현실을 담은, 목적이 뚜렷한 책이었다. 여러 장의 지도, 간략한 서술을 통해 조선과 이웃하고 있는 나라들의 기본 정보를 요령 있게 담아내고 있던 것도 달리 원인을 찾을 일이 아니었다. 이 책이 무미건조한 서술 속에 객관적인 정보만 담고 있을 뿐 오가는 사람들이 가졌던 정감 넘치는 소통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어디 그렇게 무덤덤하게 이루어졌겠는가? 사신으로 온 외국인과 사신을 접대한 조선 사람 사이에 혈맥이 통하는 만남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실제 신숙주가 “유구국의 사신인 동자단(東自端)”에게 준 시는 두 사람의 만남이 단순히 의례적, 외교적인 것 이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에 왔던 유구국 사신 승려 동자단은 일본 불교계의 이름난 인물이었다. 유구국 국왕이 그에게 세조를 빙문(聘問)하는 일을 부탁하여 조선에 왔다고 한다. 신숙주는 여러 사신을 접하고 겪어보았지만 동자단같이 훌륭한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헤어지는 날, 그에게 시를 주었다.

불교계의 뛰어난 자 오직 그대이니
예(禮)와 시(詩)에 능하다고 모두들 칭송하네
만 리 밖 국왕의 편지는 신의를 전하고
여러 해 항해해서 오니 이름과 공로가 길이 남네
다행히 주량이 같아 술잔을 권하고
고상한 회포에 취미가 같음을 기뻐하네
한번 작별하면 어느 때에 다시 손을 잡을지
큰 파도 넓고 넓어 구름 겹겹이 막혔으니

망망대해를 넘어와 만난 사람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 시에는 그 막막함이 배어 있다.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해동제국기』의 갈피 갈피에도 이 감정은 배어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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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훈 집필자 소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저서 『조선후기 정치사상 연구』, 공저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 논문 「愚潭丁時翰의 활동과 17세기 후반 南人學界」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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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해동제국기의 세계 인식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전용훈,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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