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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식민지 시기 조선 문인들의 만주 기행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만주의 광활한 대지에서 피어난 문학적 상상력

만주라는 명칭에 얽힌 역사

‘만주’라는 명칭을 들을 때 사람들은 영화 「마지막 황제」의 ‘푸이’나 얼마 전 개봉되었던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떠올릴 것이다. 연세가 지긋한 분이라면 1960~70년대의 만주 웨스턴 무비에 대한 추억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혹 2002년경부터 시작된 중국과의 역사 논쟁, 이른바 ‘동북공정’과 만주라는 지명을 결부시키는 이도 있으리라.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가곡 「선구자」의 해란강과 일송정도 이 지역과 관련이 있다. 문학작품을 즐겨 읽는 독자라면 안수길의 『북간도』나 박경리의 『토지』, 혹은 조정래의 『아리랑』 속의 한 장면이나 「서시」의 시인 윤동주의 고향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할아버지나 삼촌 중 누군가가 만주에서 생사 불명인 사람은 조선족을 만날 때 남다른 감회에 젖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만주라는 공간이 우리의 역사와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막연하게만 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주(滿洲)’라는 말은 중국에서 이른바 ‘동북3성’으로 일컬어지는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가리킬 때 주로 쓰이지만, 원래는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한 민족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가 자신을 ‘칸’으로 칭함과 동시에 나라의 이름을 ‘만주’로 바꾸면서 민족명도 ‘여진’에서 ‘만주’로 바뀌는데, 이때 처음으로 만주가 역사 속에 등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민족의 이름이 청 제국의 역사 속에서 차츰 요서·요동 지방을 가리키는 지역명으로 바뀌고, 오늘날에 이르러 중국의 동북 지역을 일컫게 되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의 무덤이 있는 선양(瀋陽)의 북릉(北陵)

만주(滿洲)라는 명칭에 사용되는 한자에 모두 물 수(水)자가 있는 것은 물을 중시하는 만주족의 특성과 결부되어 이야기되곤 한다. 실제로 만주족이 세운 황궁은 빗물이 궁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안쪽으로 경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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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못지않게 한국인에게는 ‘간도’라는 지명도 친숙하다. 간도(間島)는 19세기 후반 조선인들이 두만강 이북 지역으로 월경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사잇섬’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간도(墾島), 간토(墾土), 곤토(坤土), 한토(閑土)에서 ‘간도(間島)’라는 말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穆祖)가 다스리던 지역을 일컫는 ‘알동(斡東)’이 ‘간동(幹東)’을 거쳐 간도(間島)로 이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간도라는 지명은 좁게는 두만강 이북을 뜻하는 ‘북간도’만을 가리키지만,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쪽 두만강 건너편 일대를 동간도, 서쪽 압록강 건너편 지역을 서간도라 부르기도 한다.

『북여요선」에 실린 ‘간도지도’, 김노규, 종이에 필사, 27.8×18.7cm, 190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간도 영유권의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집필된 책인데, 이 지도에는 토문강을 두만강과는 다른 강으로 간주하고 북간도로 흘러 흑룡강과 합류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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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중국 사람들은 ‘만주’라는 이름을 사용하길 꺼린다. 이 말이 20세기 초 러시아와 일본에 의한 제국주의 침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주로 동북지방, 동북3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불가피하게 ‘만주국’ 시기 등을 지칭할 때는 ‘거짓’이라는 뜻을 지닌 접두어 ‘위(僞)’를 붙여 ‘위만주’라고 이름한다. ‘위만주국’이라는 말은 ‘괴뢰 만주국’이라는 뜻으로 쓰이며, 심지어 만주족보다는 ‘만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근대 역사 시기 가해자였던 일본인들은 만주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지만 공식적으로는 중국을 의식해 따옴표나 낫표 속에 넣어서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한국의 경우 만주라는 개념에 그 나름의 역사성이 있는 까닭에 이 명칭이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의 교류에 있어서는 만주라는 명칭은 역시 조심스럽다. 한국의 ‘만주학회’는 ‘만주’라는 이름을 쓰지만 국제학술회의 같은 것을 하기 위해 중국에 협조문을 보낼 때는 ‘만주학회(滿洲學會)’ 대신 ‘중국동북지역학회(中國東北地域學會)’라 하거나 아예 ‘manchuria’라고 영어를 쓰기도 한다.

서양 학계 일각에서는 한족 중심의 중화적 역사관을 ‘한화(漢化) 이론(Sinicization thesis)’이라고 비판하면서 북방 민족의 역사를 중시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고구려, 발해, 거란, 여진, 몽골, 만주족 등과 한족과의 역동적인 관계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국면들을 이루고 있으며 북방 유목민들의 관내(關內)각주1) 진출이 동아시아의 역사,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고 주장하면서 북방 민족을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를 새롭게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에서 만주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좀더 객관적일 수 있다는 주장도 성립된다.

동아시아 변동의 시발점

현재의 만주 지역은 전근대 시기 흔히 ‘요동’이라 불렸는데, 숙신, 부여, 고구려, 돌궐, 말갈, 거란, 여진, 몽골, 만주족 같은 민족이 이곳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왔다. 이 지역에서 흥기한 이들 민족의 흥망성쇠는 다른 지역에서 야기된 변화보다 동아시아의 질서에 훨씬 더 근본적인 변혁을 가져왔던 까닭에 만주는 동아시아 변동의 시발점이자 진원지로 평가받고 있다. 칭기즈칸이 이끌던 몽골족의 유라시아 진출은 동서양의 역사를 연결시킨 세계사적 사건이었고, 만주족 출신의 누르하치에 의한 후금의 건국은 이후 명 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지면서 동아시아의 중화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들어놓았다. 특히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의 명 왕조 정벌의 과정에서 두 차례의 호란을 겪은 조선의 경우 사회를 지탱하던 이념적 질서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백두산정계비 지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9세기 후반. 임오군란 후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던 청의 강권에 의해 이루어진 정해감계(丁亥勘界, 1887) 담판에서 조선은 두만강 국경설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청이 두만강의 강원(江源)을 ‘석을수(石乙水)’라고 주장하자 조선 측은 ‘홍토수(紅土水)’라고 반박했다. 조선 측 협상 대표였던 이중하가 “내 목은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나라의 땅은 좁힐 수 없다”고 저항하면서 협상은 결렬되고 국경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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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보물 제1537-1호, 국립중앙도서관

압록강 북쪽에 버드나무로 울타리를 만든 유조변이 선명히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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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명을 정복하기에 앞서 조선의 배후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을 복속시킨 후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 지역 일대에 버드나무를 심어 그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는데, 이를 유조변(柳條邊)이라 한다. 일종의 비무장 지대였던 셈이다. 또한 입관 후 이 지역을 만주족의 발흥지이자 청 왕조의 발상지라는 의미의 ‘용흥발상지지(龍興發祥之地)’라 하여 아무도 들어가 살 수 없도록 하는 봉금(封禁) 정책을 펼쳤다. 이후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지역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무주지(無主地)로 방치되었다가 19세기 이래 거듭되는 흉년을 견디지 못한 함경도 주민들이 월강(越江)하여 경작을 시작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다.

이전까지는 ‘선(線)’이 아닌 ‘지대(地帶)’ 개념이었던 국경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1881년 조선인의 월강을 문제삼은 청이 두만강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부터였다. 이 과정에서 1712년에 세워진 백두산정계비의 ‘서위압록동위토문(西爲鴨綠東爲土門)’이라는 구절의 해석을 둘러싸고 양국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다.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로 해석하는 조선 측에 대하여 중국 측은 토문은 투먼(圖們), 즉 두만강이라고 주장하면서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임오군란 이후 유리한 관계 속에서 중국은 간도 지역을 길림성 관할에 두는 한편, 조선인에 대해 토지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귀화를 종용하며 치발역복(薙髮易服)각주2) 을 강요했다. 결국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처지에서 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간도협약(1909)에 의해 간도의 영유권 문제가 청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지어진다.

변발을 한 만주의 조선 농민들. 『간도사진첩』,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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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주지 않는 고향을 버린 이민들”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뒤 조선 농민의 만주 이주는 본격화된다. 1894년에 6만5000여 명이던 재만 조선인은 1905년에는 7만8000여 명에 이르렀고, 5년이 지난 1910년에는 약 20만 명으로 증가한다. 이후 1930년에는 60만여 명, 1945년경에는 160만에서 170만 명의 조선인이 만주 지역에서 기반을 두고 생활하는 등 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였다.

한일합병 직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이주한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대다수의 조선인 이민은 경제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즉 식민 지배 하에서 경제적인 궁핍을 피할 수 없게 되자 만주 이민이 조선 농민들에게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후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80여만 명의 조선인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고국에 별다른 생계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던 재만 조선인들은 중국 국적을 지닌 채 만주에서 살아가게 된다. 흔히 말하는 ‘조선족’이 바로 그들이다.

『조회(照會) 제669호 간도협약』, 종이에 먹, 26×19cm, 대한제국(1909년 11월 6일),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909년(융희 3) 11월 6일에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간도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개설과 거주 한국인 보호 관리에 대한 청국과 일본의 협약에 대해 내부대신 박제순에게 보낸 조회이다. 한·청 양국의 국경 정비, 간도와 개간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 처우, 철도 건설 등에 대한 간도협약문 존안(存案)이 별지로 첨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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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통감부 시절부터 간도에 파출소를 설치했던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한 뒤에는 ‘제국 신민’인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만주로의 세력 확대를 획책했다. 조선 농민들의 탁월한 수전(水田) 경작 능력을 인정하여 조선 농민의 만주 이주를 장려하기도 했던 중국의 태도는 192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이 만주 침략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적대적으로 바뀐다. 중국 농민들에게는 재만 조선 농민들 역시 그들의 땅을 엿보는 침략자로 비치거나 제국주의 일본의 앞잡이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곳곳에서 조선 농민과 중국 농민, 일본 경찰과 중국 당국 사이의 갈등이 빚어진다. 뒤에서 살펴보게 될 만보산 사건과 이를 형상화한 이태준의 소설 「농군」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의 만주 이민은 특히 만주사변(1931) 발발과 만주국 건국(1932)을 전후로 하여 그 성격이 판연히 달라진다. 만주사변 이전의 만주 이민은 대체로 식민지 하의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발적인 농업 이민의 성격이 짙었다. 만주국 초기까지만 해도 일본은 조선 농민의 만주 이주에 방임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자신의 필요성에 따라 조선 농민들의 입식(入植) 장소와 인원을 조절하는 통제 이민 정책을 펼쳐나간다. 이는 일본 내의 과잉인구와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만주의 모든 지역에 일본인을 진출시켜 본격적인 만주 경영을 하려는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재만 조선인 사회의 성격도 변모하는데, 만주국 이전에 주로 함경도, 평안도 등 북부 지방 농민 출신이 주축을 이룬 반면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경상도 등 남쪽 지방 농민의 수가 증가한다. 또한 일본인 이민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소련과의 국경지역에 남쪽 지역 농민을 입식하게 되는데, 오늘날의 흑룡강성과 내몽골 지역에 아직도 경상도 방언을 쓰는 조선족이 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반면 만주국의 수도인 신징이나 하얼빈 같은 대도시로의 조선인 이민도 꾸준히 증가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일정한 직업도 없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만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간도의 통감부파출소 구청사, 『간도사진첩』, 1909, 서울대 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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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동불사(銅佛寺)의 논, 『간도사진첩』, 1909, 서울대 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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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보통학교 생도의 학습 장면, 『간도사진첩』, 1909, 서울대 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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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도 낭낭고 지역 한인 서당, 『간도사진첩』, 1909, 서울대 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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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민들의 호곡 소리가 들리는 듯

1920년대 초만 하더라도 만주에 대한 조선인들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다. 문학작품의 경우 만주를 무대로 삼은 작품은 많지 않았고, 내용 역시 김동환의 「국경의 밤」(1925)처럼 북국 정서를 묘사하거나 최서해의 「탈출기」(1925)에서 보듯 자전적인 체험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기자 신분으로 용정 등 조선인 밀집 지역을 취재하고자 떠난 문인들이 하나둘씩 글을 발표한다. 기행문 형식으로 씌어진 이들의 글에서는 무엇보다도 조선의 국경을 넘어서는 감격이 인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용정촌 풍경, 『간도사진첩』, 1909, 서울대 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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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이 멀리 비늘과 같이 빛나고 혜산 장거리가 오목한 바닥에 모형과 같이 담겨 있다. 대안(對岸) 장백부(長白府)의 검으레한 지붕이 가끔 둥근 봉(峰)의 편에서 언뜻언뜻 현현하고 보일 까닭이 없는 삼백 리 저편의 백두산이 그래도 뵈일 것만 같이 그 동쪽 하늘이 유의하게 시선을 끈다.

대수(帶水)를 사이하고 네것 내것 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 몹시 엄숙하게도 생각켜진다. 조선이 만주를 닮았다 할는지 만주가 조선을 닮았다 할는지 어쨌든 압록강 연안의 고원과 만주의 그것이 꼭 같다.

단 십 분 사이에 만주와 조선을 왔다 갔다 할 것을 생각하며 덜 바쁘게 여사(旅舍)에 여장을 버려놓은 때는 이미 어둑어둑한 황혼이었다.

캄캄한 칠흑에 강가를 거니르니 반짝거리는 고기잡이 불빛이 강 위에 별을 뿌린 듯이 선명하다.

국경의 밤은 고요히 잠들어간다. 다만 들리나니 물소리요 오직 보이나니 어화(漁火)뿐이다. 그 빛 그 소리는 다른 곳 그 빛 그 소리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것이 없으면서도 다른 것 같은 것이 국경의 빛과 소리의 특색이다.
- 한설야, 「국경정조」, 『조선일보』, 1929년 6월 12~13일자
두만강을 에워싸고 양안(兩岸)에 하늘을 가리울 듯이 드높이 솟아 있는 천험(天險)의 고산준령이 드리우는 농후한 음영을 담고 유유히 흐르는 검푸른 강물은 무엇을 낯설은 고려의 자손에게 이야기하려고 하면서도 그만 무거운 침묵 속에 영원의 하상(河床)을 십 년을 일일같이 미끄러지는 너 두만강이여. 나는 너를 나의 북방의 연인이라 부를까? 모두 고요한 죽음과 같은 분위기다. 말할 수 없는 우울! 이것이 일찍이 우리들의 시인 파인이 읊조리던 국경 정조인가. 우리의 귀에는 누더기 보꾸러미를 둘러매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이 강을 건너는 유랑민들의 어지러운 호곡(號哭)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 김기림, 「간도기행」 『조선일보』 1930년 6월 12일자

한설야각주3) (1900~1976)는 압록강을 건너기 전 강 저편의 보이지도 않는 백두산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국경 정조’를 애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조선과 만주로 국경이 나뉘어 있지만 그 풍광이 서로 닮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동시에 만주 땅이 조선과는 무언가 다르기를 바라면서 애써 이국정서를 찾아내는 듯한 인상까지 풍긴다. 한편 모더니스트 시인이자 비평가인 김기림(1908~?) 역시 간도의 용정으로 가기 위해 두만강 연선을 따라 경편철도를 타고 이동하면서 천 년 역사의 무게가 주는 감상에 젖어든다. 그러나 그는 역사 허무주의에 침잠하지 않고 시인다운 감수성으로 삶의 터전을 찾아 국경을 넘어야만 했던 유랑민들의 비애를 동정적인 시선으로 떠올리기도 한다.

압록강 주변을 보여주고 있는 「성경전도」, 채색 필사, 30.3×22.7cm, 19세기, 국립중앙도서관

조선인들의 만주에 대한 관심은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의 감흥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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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越境)을 전후로 한 시점에 씌어진 글에서 국경이 자아내는 이국정서와 감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면, 만주에 들어선 뒤 특히 내륙으로 들어가면서는 만주의 광활한 대지에 대한 놀라움이 부러움 섞인 감탄과 더불어 묘사된다. 이태준의 「이민부락견문기」는 평양에서 출발하여 펑텐(奉天, 현재의 선양)을 거쳐 신징[新京, 현재의 창춘(長春)]에 도착한 후 만보산(萬寶山) 인근 쟝쟈워푸(姜家窩堡)의 조선인 집단이민 부락을 답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만주 안동현에서 출발한 침대열차에서 잠깐 잠이 들었던 그는 동트기 시작하는 만주 벌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사래 긴 밭들이 무수한 직선으로 연달아 부챗살같이 열리고 접히고 한다. 마을 뒤나 밭사래 끝에는 막힌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산은 물론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다. 밭이 지나가고 밭이 연달아 오고 그리고 지루할 만하면 백양목 대여섯 주가 모여선 숲이 지나가고 그러다가는 칼로 똑똑 잘라놓은 것 같은 단조로운 농가 한 부락이 지나가고, 차츰 남의(襤衣)의 토민들이 한둘씩 길 위에 나서기 시작한다.
- 이태준, 「이민부락견문기」 『조선일보』 1938년 4월 9일자

그러나 드넓은 만주의 대지가 주는 감격적인 첫인상은 계속되지 못한다. 기차를 타기 전 역사에서 보았던 조선의 이주민들, 특히 “흙을 주지 않는 고향을 버린 우리 이민들”의 처지를 생각하다가도 “그래도 모다 임자 있는 밭들이 아닌가!”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한편, 만주 기행문 중에는 러시아에 의해 건설되어 ‘동양의 파리’로 불렸던 하얼빈이나 일본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계획도시이자 만주국의 수도인 신징의 화려한 근대 도시로서의 면모도 자주 등장한다. 특히 두 도시 사이를 달리는 특급열차 ‘아세아’는 초(超)근대국가 만주국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열차에서 만난 러시아 국적의 종업원은 대륙을 넘어서 흡사 유럽에라도 있는 듯한 이국적인 낭만을 느끼게 한다.

동양일(東洋一)의 쾌속차라는 대련(大連) 하얼빈 간의 특급 ‘아세아’ 심록색의 탄환과 같은 유선형이다. 얼마 쉴 새 없이 곧 봉천을 떠난다. 이내 속력이 난다. 별로 진동이 없이 줄곧 등속력으로 제비같이 가볍게 달아난다. 새 이발 기계로 머리를 깎는 때 같은 감촉이다. (…) 점심 먹으러 식당차로 가니 급사가 모두 노인(露人) 소녀들이다. 하나는 희고 야위고 반듯한 이마 가 영화 「죄와 벌」에서 본 쏘냐 같았다. 국적이 없는 백계노인(白係露人)의 딸들, 향수조차 품을 곳 없이 단조한 평원만 내다보고 사는 가엾은 처녀들, 그들이 가져오는 한잔 커피는 술만 못지않은 독한 낭만을 풍기었다. 그런 커피를 잔을 거듭하며 나는 내일 이민촌을 찾아 끝없는 벌판에 외로운 그림자가 될 것을 걱정스럽게 생각해보았다.
- 「이민부락견문기」 『조선일보』 1938년 4월 14일자
특급열차 아시아호

최대 시속 130킬로미터를 자랑하던 열차로 '유선형'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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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열차 아시아호, 러시아 출신 여급이 근무하는 식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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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열차 아시아호, 최후미에 달린 일등 전람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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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이후 기행문에 나타난 ‘만주 붐’

만주국 건국 이후 특히 19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 가히 ‘만주 붐’이라 할 정도로 잡지나 신문에 만주 관련 기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문인들의 만주 관련 기행문이나 수필도 흘러넘쳤다. 이러한 만주 붐에는 일본의 국책에의 동조, 전쟁 특수에 따른 경제적 관심 등의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만주 관련 글들은 대체로 당시의 국책이었던 ‘동아신질서각주4) ’ 구상을 수용하면서 만주국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미화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중에는 작가에 의해 자발적으로 쓰여진 것도 더러 있었지만 당국의 요구에 따라 예정된 코스를 답사하고 난 뒤에 무슨 보고서처럼 쓰인 것도 없지 않았다. 함대훈각주5) (咸大勳, 1907~1949)의 「남북만주편력기」는 이러한 국책을 여실하게 드러낸 기행문이다.

‘만주로 간다.’ 이 말이 만주사변 전엔 조선서 쫓겨가는 불쌍한 농민들이 바가지를 꿰차고 보따리를 든 초라한 모양을 연상했지만 만주[국] 건국 이래 6년의 세월이 흐른 금일에 있어서는 만주로 간다는 말이 ‘일을 하러 가고 희망을 갖고 간다’고 할 수 있게끔 되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신흥 만주국이 건설되자 민족협화 왕도낙도의 정신 밑에 조선인의 만주 생활은 무엇으로나 다 변하여지고 따라서 조선인 문제가 더욱 중대화하게 되어 이에 대한 관심은 식자 간에 더욱 긴요하게 되었고 또 만주를 한번 본다는 것은 크게 의의 있는 일이 되었다.
- 「남북만주편력기」 『조광』, 1939년 7월
20세기 초 만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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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형의 기행문은 대개 만주의 광활한 대지를 묘사하고 이를 찬탄한 뒤 조선 농민이 집단적으로 이주한 마을을 묘사하면서 만주의 군벌이나 비적 그리고 현지 농민들로부터 핍박을 당하면서도 수전을 개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묘사에는 늘 만주사변 이전 시기 만주의 혼란상과 만주국 건국 이후의 안정이 대비된다. 농민들을 수탈하는 고리대금업자와 봉건지주,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과 마적 떼들, 출구를 찾지 못하고 마약굴에서 아편에 빠져 있는 중국인의 타락상은 만주 기행문에 스테레오타입으로 등장한다. 만주국의 건국과 그 과정에서 일본의 전폭적인 협력, 조선인들의 기여가 이어진다.

황차 그동안까지는 내란과 군벌과 탐관오리에 백색자본의 착취와 그리고 쿠리와 아편 이것밖에는 없던 과거의 지나 민족에 비해서리오. 우리 일본 민족은 그럼으로 당연히 지나 민족보다 일보 나아간 지위-생활이 필요하고 그들을 영도하고 하게 되지 않지 못하는 것이다.
- 채만식, 「대륙경륜의 장도, 그 세계사적 의의」『매일신보』, 1940년 11월 22일자

만주국의 건국이 일본 제국과 일본인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2등 국민’으로서의 조선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일본의 기술과 자본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계획도시이자 만주국의 수도인 신징에 대한 묘사에서도 이러한 관점은 유지된다.

이 건설이 만주인도 아니오 조선인도 아니오 일본인이다. 일본인의 위력은 이마침 크다. 이제 지나사변이 장기전에 갔으나 이 만주사변으로부터 8년, 건국으로부터 6년에 이만한 건설면을 보면 지나에 대한 것도 넉넉히 단시일에 건설할 것이라 보는 것이 여기 와서 더 느낄 수 있다.
- 함대훈, 「남북만주편력기」 『조광』, 1939년 7월

그러나 만주 기행문이 모두 이처럼 국책을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시종한 것은 아니었다. 농민들의 삶을 주로 소설로 형상화했던 카프 작가들의 수필이나 기행문에는 만주국 국책에 대한 소개는 생략하거나 최소화한 채 재만 조선 농민이 겪는 애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들이 적지 않다. 이기영의 「대지의 아들을 찾아서」에서는 이주 농민들이 예상과 달리 간난신고를 겪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뒤 그 원인을 지주제와 브로커의 착취에서 찾고 있다. 또한 만주국 이후 농민 일부가 개척민적 자각 없이 막연한 희망에 부풀어 만주로 흘러드는 것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만보산 사건과 이태준의 「농군」

만주를 무대로 한 조선 문인들의 문학작품 중에서 이태준의 「농군」만큼 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작품은 없었다. 이 작품은 만주사변 이전 쟝쟈워푸라는 곳에서 일어난 조선 농민과 중국 농민의 수전 개발을 둘러싼 충돌을 그린 것인데, 한편에서는 조선 농민의 만주 개척의 애환을 뛰어나게 묘사한 걸작으로 평가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오족협화와 왕도낙토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통치 이데올로기를 구현한 친일적 국책 문학이라는 평가를 내기리도 했다.

『돌다리』, 이태준, 박문서관, 1943

이 책 속에 큰 논란이 되었던 이태준의 「농군」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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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산 사건이란 1931년 5월 하순부터 장춘 인근의 만보산 삼성보 일대에서 논농사를 하기 위해 수로를 내려던 조선 농민들과 이를 저지하려던 중국 농민들 사이에 일어난 무력충돌을 말한다. 밭농사에 익숙한 중국 농민들이 수로 개설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 경찰을 이용해 조선 농민을 몰아내자 일본 경찰이 조선 농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출동하면서 총격까지 이어졌다. 다행히도 큰 불상사 없이 사건은 마무리되었으나 조선 농민이 살상되었다는 오보가 조선에 전해지면서 사건의 불똥은 인천과 평양 등 조선 내의 화교 거주지역으로 번졌다.

격분한 조선인들이 중국인을 배척하는 폭동을 일으켜 그 결과 중국인 142명이 사망하고 91명이 행방불명되었으며 546명이 부상하는 끔찍한 배화(排華)사건으로 이어졌다. ‘호떡집에 불났다’는 말이 사용된 것은 필시 이즈음부터였을 것이다. 사상자는 평양에서 유독 많았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근거로 대륙 침략을 위해 조선인을 이용해 중국과의 갈등을 부각시키려는 일본의 공작에 의해 사건이 확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태준의 「농군」은 바로 이 만보산 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이지만 벼농사를 위한 집념으로 수로를 개척하려는 조선 농민들의 불굴의 집념을 묘사하는 데에 중점이 놓여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창권 일가가 만주 이주를 위해 펑텐행 열차의 삼등 객실에 몸을 싣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해 이들이 정착한 ‘쟝쟈워푸’ 마을을 소개하고 황무지를 수전으로 개간하기 위해 이퉁허라는 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간도 모범농원에서 벼농자 짓는 주민들

이태준의 「농군」은 벼농사를 짓고자 수로를 개척하려는 농민들의 의지를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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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농민들과 경찰들의 방해에 부딪히면서 무력충돌이 이어지고 몇몇 사람이 중국 경찰에 연행된다. 조선 농민의 대표 격인 황채심이 중국 경찰로부터 모진 매를 맞고 풀려난 밤 조선인들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밤이슬을 맞으면서 도랑을 쳐내 물길을 연다. 중국 경찰이 나타나 발포를 시작하고 창권은 다리에 부상을 입으면서도 콸콸 흐르는 물을 보며 감격하는 장면에서 소설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사람이 떠내려온다. 창권은 다리를 쩔룩거리며 뛰어들었다. 노인이다. 총에 옆구리를 맞았다. 바로 창권이 할아버지 운명할 때, 눈을 쓸어 감아주던, 경상도 사투리하던 노인이다. 창권은 가슴이 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가슴 복판에 총알이 와 콱 박혔으면 시원하겠다. 노인의 시체를 두 팔로 쳐들고 둔덕으로 뛰어올랐다. (…) 물은 도랑 언저리를 철버덩철버덩 떨궈 휩쓸면서 열두 자 넓이가 뿌듯하게 나려 쏠린다. 논자리마다 넘실넘실 넘친다. 아침 햇살과 함께 물은 끝없는 벌판을 번져나간다.
- 이태준, 「농군」 『문장』, 1939년 7월

이 작품은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제기된 동아신질서론이 전면화되던 시기에 오족협화를 표방하던 만주국의 이데올로기 속에 동화될 위험성이 다분한 것이 사실이다. 생존권 확보라는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는 조선 농민의 수전 개척 논리는 더 이른 시기에 이곳에 정착해 살고 있던 중국 농민의 처지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본 식민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여지가 없지 않다.

작품 속에서 ‘토인’으로 묘사되는 중국 농민의 처지에서 보면 만주로 이주해오는 조선 농민들이란 수전 개간을 핑계로 일본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땅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는 침략의 첨병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태준은 작품의 취재를 위해 만주를 기행하고 「이민부락견문기」라는 글을 남겼는데, 여기서도 중국 농민들을 ‘남의(襤衣)의 토민’으로 칭하면서 “차 안은 푸른 옷과 더러운 동전에서 나는 것 같은 냄새로 그뜩 찼다. 제 시간에 떠나기는 하나 ‘만만디(慢慢的)’이다”라고 하며 민족적 편견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전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식민 제국이 표방하던 이데올로기의 반복이 아니라 이와 무관하게 살고 있는 조선 농민들의 다난한 삶이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농촌은 오히려 국책이 표방하는 화려한 구호와는 상반되는 치열한 생존 투쟁의 현장이었다. 개간권을 얻기 위해 때로는 금목걸이를 뇌물로 바쳐야만 하고, 총을 든 군인에 맞서 봇도랑을 파던 삽자루와 곡괭이를 들고 목숨을 걸고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농민의 처절한 현실에 대한 핍진한 묘사는 ‘오족협화’나 ‘왕도낙토’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서사시적인 감정’을 읽어낸 당대 최고의 비평가 임화(林和)의 아래와 같은 평가는 왜 이 작품이 아직도 우리에게 공감을 주는지를 잘 짚어내고 있다.

수로의 개통이 그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지고 오리라고 믿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도(賭)하여 공사에 열중하는 이주민들의 면영(面影)은 바라보기에 가슴이 메이는 데가 있다. 소박하고 아름답고 그럭 폐부를 찌르는 듯한 슬픔에 사모친 이러한 회화를 그릴 수 있는 작가는 필시 우수한 시인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비록 단편일망정 이 소설을 꿰뚫고 있는 것은 분명히 크나큰 비극을 속에다 감춘 서사시의 감정이다.
- 임화, 「현대소설의 귀추」 『문학의 논리』, 학예사,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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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길 집필자 소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공저 『식민지 공공성, 실체와 은유의 거리』, 『제국의 지리학, 만주라는 경계』, 『근대 한국의 일상생활과 미디어』, 편저 『허준 전집』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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