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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의 또 다른 모습 엿보기
‘개론주의’ ‘반(半) 인텔리’ ‘스포츠맨’ ‘감초사장’은 독립운동가 여운형(1886~1947)과는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일제강점기에 항상 그를 따라다니던 별명이었다. 여운형이 박학다식하긴 하지만 체계적인 자기 이론을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개론주의’ ‘반 인텔리’이다. 여운형은 누가 두꺼운 책을 읽고 있으면 “그거 언제 다 읽어? 서론하고 결론만 읽고 말아야지”라고 말했다 한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한 그는 1912년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을 가기도 했고, 상하이 망명 시절인 1928년에는 후단(復旦)대학의 체육 코치가 되어 축구부를 이끌고 싱가포르, 마닐라로 원정 경기를 떠나기도 했다. 1933년에 발간된 『현대철봉운동법』의 모델이기도 했던 여운형을 사람들은 ‘스포츠맨’이라 불렀다. ‘감초사장’은 그가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에 결혼식이니 무슨 대회니 연설회니 하여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항상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어 붙여진 별명이다.
여운형에게는 사려 깊은 인간미도 물씬 풍겼다. 한말 그가 고향 양평에서 서울로 말을 타고 오갈 때 길가의 방죽에서 농부들이 점심을 먹고 있으면 혹시 먼지라도 날릴까 하여 반드시 말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중국 망명 시절 상하이의 한 외국 서점에서 일할 때는 월급날이면 그와 매주 토요일 운동을 하던 한국 학생들에게 월급 75원을 나누어주고 자신은 전차비도 없어 집에 걸어갔다. 이를 보다 못한 학생들은 월급날이면 먼저 서점에 가서 여운형의 한 달 치 전차비와 생활비를 제하고 나머지만 주도록 서점 주인에게 사정했다고 한다.
이처럼 여운형은 다재다능하고 박학다식하면서 인간미도 넘쳤다. 그러면서도 그가 후단대학의 축구부를 이끌고 싱가포르와 마닐라를 갔을 때 이들 나라를 식민 지배 하던 영국과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라고 비판하는 연설을 하여 곤욕을 치렀듯이 그에게 항상 우선한 것은 조국의 독립이었다.
여운형은 엄혹한 일제강점기인 1936년 다섯 차례에 걸쳐 월간잡지 『중앙』에 자신이 1921년 11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 모스크바로 간 여행기를 남겼다. 이 여행기에는 여운형 자신만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 김규식과 라용균이 함께했다. 여행기를 발표할 때는 일제 치하였던 까닭에 동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만 밝힌 것이다.
때문에 여행기에는 모스크바로 가게 된 과정과 그곳에서 한 일이 자세히 적혀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모스크바로 가는 여정에서 겪은 갖가지 에피소드나 처음 마주하는 이국땅의 낯선 풍경과 주민의 일상은 읽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한 그가 여행 도중에 만나거나 스친 동포에게 느낀 연민은 가슴 한쪽을 뭉클하게 하기도 한다.
일제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1921년 가을, 그 계절은 여운형을 비롯해 상하이에 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에 기대했던 독립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고, 임시정부도 내부적으로 분열에 휩싸여 독립운동을 위해 임시정부의 환골탈태와 새로운 모색을 필요로 하던 때였다.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도 잡는다고, 이때 그 지푸라기 구실을 하겠다고 나선 나라가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였다. 이미 러시아의 레닌은 한국 독립을 지지하고 독립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무지렁이 노동자, 농민들이 강고한 차르 체제를 무너뜨린 러시아 혁명은 당시 한국과 같은 식민지나 반식민지 약소민족에게는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념에 관계없이 러시아의 혁명 현장을 찾아가고 싶어했고, 여운형 역시 마찬가지 바람을 갖고 있었다.
이런 여운형에게 러시아를 방문할 기회가 찾아왔다. 러시아가 1921년 11월 미국에서 열릴 워싱턴회의에 대항하여 이르쿠츠크에서 원동피압박민족대표자대회를 열기로 하고, 한국 대표로 그를 초청했던 것이다. 이 대회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항하여 한국, 중국, 몽골 등 원동의 약소민족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독립운동의 방향을 의논하는 자리였다. 상하이에서는 한국 대표로 여운형 외에 김규식, 라용균도 함께 초대받았다.
여운형, 김규식, 라용균은 기차를 타고 펑텐(奉天)과 하얼빈을 거쳐 극동공화국으로 가서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해 이르쿠츠크로 갈 계획을 세웠다. 당시 만주는 봉건 군벌 장쭤린(張作霖)이 지배하고 있었고 산하이관(山海關)에서 하얼빈에 이르는 철도는 일제가 장악하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중간에 일제에 체포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1921년 10월 드디어 여운형, 김규식, 라용균 등은 상하이를 출발해 러시아를 향한 여정의 첫발을 내딛었다. 텐진(天津)에 온 여운형 일행은 11월 초 펑텐행 기차 삼등실에 몸을 실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모두 중국인으로 변장한 터였다. 그런데 텐진을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역시 중국인 복장을 한 한국인이 일행을 예의주시하며 한국말로 수작을 걸어왔다. 그는 일제가 풀어놓은 밀정이었다. 눈치를 챈 일행은 곧바로 탕산(塘山)역에서 내려 텐진으로 돌아왔다.
여운형 등은 텐진에서 사흘을 보낸 뒤 다시 펑텐행 기차에 올라탔다. 이번에는 일등실을 이용했다. 그러나 이것도 헛수고였다. 지난번 보았던 밀정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일행은 하는 수 없이 기차에서 내려 텐진으로 또다시 되돌아왔다. 이후에도 밀정이 텐진역에서 감시하고 있었던 터라 여운형 등은 기차여행을 포기했다. 대신 이들은 베이징에서 장자커우(張家口)로 가서 그곳에서 고비사막을 건너 고륜(庫倫, 지금의 울란바토르)을 거쳐 이르쿠츠크로 가는 길을 택했다. 이 길이라면 일제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지만, 험난한 고비사막을 건너야 하고 중간에 마적의 공격을 받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막막한 고비사막의 모래바람과 싸우며
김규식은 1914년 이태준(李泰俊), 서왈보(徐曰甫)와 함께 비밀군사학교를 건설할 목적으로 고륜을 간 적이 있었다. 이 계획이 불발로 그친 뒤 김규식은 이곳에서 서양인을 상대로 피혁 장사를 했고, 이태준은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개업했다. 이후 김규식은 장자커우로 돌아와 그곳의 앤더슨 마이어 회사에 입사했고, 2년 뒤에는 이 회사의 지점 개설을 위해 다시 고륜으로 갔다. 그리하여 여운형 등은 이런 인연으로 이 길을 택했던 것이다.
장자커우는 만리장성의 북쪽 제1관문으로, 이곳에서 고륜까지는 1000킬로미터나 되는 여정이었고 그 중간에 험난한 고비사막이 가로놓여 있었다. 겨울 사막을 가다가 밤이 되면 그대로 노천에서 잠을 자야 했기에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텐진에서 베이징을 거쳐 장자커우로 간 여운형 일행은 닷새 동안 장자커우에 머물면서 방한구를 비롯한 준비물을 꼼꼼히 챙겼다. 다행히 눈은 오지 않아서 고륜까지는 중국 상인들과 함께 콜맨 씨의 몽골상사회사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었다. 늙은 양가죽으로 만든 자루이불(슬리핑백) 등과 같은 방한구와 여행 중에 먹을 식량 외에도 노천에서 야영할 때 맹수와 마적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줄 호신용으로 피스톨, 소총, 비수 그리고 밤에 불을 밝힐 양초 몇 자루를 준비했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추위가 몰려온 1921년 11월 하순의 어느 오후, 여운형 일행은 고륜을 향한 고비사막 횡단 여행을 시작했다.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몰라 두렵기도 했지만 눈앞에 펼쳐질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이 여운형의 가슴을 더욱 두근거리게 했다. ‘여행의 애호자이자 예찬자’인 여운형은 독립운동을 위한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여운형에게 여행은 가장 사랑하는 취미이자 오락이었다. 사람들은 여운형이 최고로 꼽는 취미가 스포츠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스포츠보다 여행을 훨씬 더 좋아했다. 그는 여행이야말로 가장 건전하고 인간적인 스포츠라고 생각했다.
장자커우를 출발한 첫날, 차창에 기댄 여운형은 온갖 상념에 빠졌다. 유쾌하고 흥분된 그의 뇌리를 마치 주마등처럼 지나온 일들이 달음박질치고 지나가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차창 밖에 펼쳐지는 풍경의 변화도 무관심하게 흘려 보내자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둠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그 무렵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마을을 발견했고, 그 마을에 있는 덴마크 선교사 집에서 하룻밤을 청해 유숙했다.
이들 선교사는 귀찮을 법도 한 여행객이 무어 그리 반가운지 두 손을 벌려 일행을 환영했다. 아마 덴마크에서 절해고도와 같은 고비사막 한가운데로 귀양온 듯이 지냈던 이들에게 콜맨 씨를 비롯하여 여운형, 김규식 등 영어를 유창히 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여운형 등은 처음에 큰 오해를 하기도 했다. 남녀 각각 두 명이 있어 두 쌍의 부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독신자 노총각과 노처녀였다.
덕분에 노숙을 면한 일행은 이튿날 서둘러 길을 떠났다. 비록 자동차를 이용한 여행이지만 내륙 고지대로 갈수록 모래바람이 앞을 가리고 기온은 급속도로 떨어졌다. 이날 하루 종일 차를 달렸으나 민가를 발견할 수 없어 둘째 날 밤은 노숙을 했다. 장화에 방한모, 자리이불에다가 방한안경까지 무장했지만 영하 20도 밑으로 떨어지는 사막의 추위에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가끔 자리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라보는 사막의 밤하늘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는 듯하여 상하이에서는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별천지였다. 여운형은 추위도 잊은 듯 한참 동안이나 이불 밖으로 머리만 내어놓은 채 한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사막의 밤하늘을 즐겼다. 새카맣던 하늘은 차차 그 본래의 검은 남빛을 회복하고 희미한 선으로 대지와 천공을 나누어놓았다. 하나둘씩 반짝거리기 시작한 별들은 삽시간에 온 하늘을 뒤덮었고, 그 영원히 젊은 눈동자로 밤의 땅을 향하여 영구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를 속살거리는 듯했다.
거의 변함없는 고비사막의 밤과 낮의 풍경이 계속되던 나흘째 여운형 앞에는 뜻하지 않는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정오쯤 멀리 보이는 사막 가운데 초원에 있는 수백 마리의 영양이 무리지어 가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호를 지르며 준비해간 소총으로 네 마리의 영양을 사냥했다. 그동안 마른 음식에 신물이 난 일행은 영양으로 국을 끓여 먹기로 했다.
일행은 모래 위에 쌓여 있는 눈을 녹여서 물을 만들고 가솔린 통으로 솥을 삼고, 주변에 비바람에 썩어 버려진 전신주를 모아 불을 지폈다. 간은 가지고 있던 소금으로 했다. 몇 번을 씻은 가솔린 통은 냄새가 가시지 않았지만 국을 먹겠다는 일념을 꺾을 순 없었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추위 속에서 이날 밤의 국처럼 맛있는 음식을 그전에도 그 후에도 맛본 일이 없었다. 역시 한국 사람은 국물이 있어야 밥을 먹어도 먹은 듯했다.
장자커우를 떠난 지 닷새째 되는 날 마침내 목적지인 고륜 땅을 밟았다. 멀리 구릉 위로 장대한 라마교의 사원 건물이 보였다. 고륜에 도착한 일행은 일단 몽골상사회사 지점에 짐을 풀었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지금까지의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가 물밀 듯 밀려와 고륜에서의 첫날은 일행 모두 아무 생각 없이 잠에 곯아떨어졌다.
몽골의 ‘한인 슈바이처’, 이태준의 흔적을 찾아서
여운형 일행이 도착한 고륜은 낡은 세력과 새 세력이 교체되고 파괴와 건설이 교차하는 등 일시적인 혼란을 겪던 상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반혁명군인 울겐 부대가 점령하고 있었으나, 1921년 7월 몽골의 혁명 세력이 러시아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올겐을 체포하고 혁명정부를 세운 터였다. 혁명정부는 고륜에 ‘붉은 거인의 도시’(우란·바톨·호트)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여운형은 이튿날 러시아 대표 옥흘라를 찾아가 고륜에서 국경 소도시 트로이카 삽스크(賣買城)각주1) 까지 가는 데 필요한 여권과 역마 이용권 등의 문제를 협의했다. 이 문제는 나흘 만에 해결되었지만 이곳에서 동행할 몽골의 청년 대표와 합류하기 위해 나흘을 더 머물러야 했다.
고륜에 머문 지 사흘째 되는 날, 고륜 혁명정부의 최고 고문의 한 사람인 에린치노프 부부가 여운형 일행을 초대했다. 에린치노프의 부인은 블라디보스토크 태생의 한인 남만춘(南萬春)의 누이인 얼마재(러시아 한인 2세) 마루사 남이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동포를 만난다는 것은 또 다른 흥분과 기쁨이었다.
이날 마루사 남은 여운형 일행을 위한 듯 치마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고 극진히 맞아주었다. 유쾌한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마루사 남은 서투른 우리말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는 애국가를 불러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연회가 끝날 무렵 마루사 남은 홍차를 돌리며 다가와 “차-무르, 잡수찌!”라는 우리 말 한마디를 했는데 그것은 ‘찻물 잡숫지!’였다.
고륜에서의 여정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동행한 김규식에게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운형 일행은 4일째 되던 날부터 ‘까우리(高麗) 의사, 슈바이처’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뿐인 한국인의 무덤은 이곳 민중을 위해 젊은 생을 모두 바친 한 한국 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
‘몽골의 한국인 슈바이처’로 불린 까우리 의사는 1914년 김규식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가 동의의국을 개업했던 이태준(몽골 이름은 리 다인)이었다. 그는 김규식의 사촌 여동생 김은식과 결혼도 하여 김규식과는 항일 동지이자 사촌(처)남매(부)지간이었다.
당시 몽골은 불완전한 위생 시설과 라마교의 영향으로 주민의 70~80퍼센트가 성병 보균자였고, 갖가지 질병이 이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 이태준은 몽골 민중을 비참함으로 내몰았던 성병과 질병을 물리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의술과 정성에 감복한 몽골 국왕은 그를 어의, 즉 주치의로 삼았고 1919년에는 제3등 제1급의 높은 훈장인 ‘에르데나인 오치르’(‘귀중한 금강석’이란 뜻)를 내렸다. 이런 의술활동 외에도 그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1921년 2월 악명 높은 울겐 부대가 고륜을 점령하면서 이태준은 처형되고 말았다. 2000년 몽골 정부는 울란바토르에 ‘이태준 기념공원’을 세워 그를 기념하고 있다.
여운형도 여운형이지만 이태준의 죽음에 가장 가슴 아파했던 이는 바로 김규식이었다.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가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마치 자기 탓인 듯하여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륜에 도착한 지 8일째 되던 날 채비를 모두 갖춰 러시아를 향한 출발이 시작되었다. 몽골 측 대표 단씽을 비롯하여 청년 대표들이 함께 가게 되면서 일행은 10여 명으로 늘어났다. 여운형, 김규식, 라용균은 이태준의 무덤을 뒤로한 채 쌍두마차를 타고 12시 무렵에 다음 목적지인 국경도시 트로이카 삽스크를 향해 출발했다. 고륜에서 트로이카 삽스크까지는 모두 4일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미지의 세상에서 만난 색다른 문화
고륜에서 트로이카 삽스크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 지나온 막막한 사막과 달리 언덕과 고원의 경사가 이어지는 초원이었다. 드문드문 유목민 부락이 있고 길도 나름 잘 개척되어 있었다. 여운형 일행은 마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조선시대 역참처럼 지나는 길에 있는 유목민 부락인 태점에서 말을 갈아타기도 하고 휴식도 취했다.
고륜을 떠난 첫날밤은 한 태점에서 지냈다. 태점이 있는 부락 추장에게 고륜 정부에서 발급한 여권과 공문을 보여주고 그의 천막집인 게르에서 유숙했다.
추장은 여운형 일행을 위해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않는 유목인의 식사에 초대했다. 소금이 귀해 간도 하지 않은 삶은 양고기를 먹고 그 국물을 차처럼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여운형 등은 익숙지 않은 음식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고, 그래서 준비해간 초콜릿, 삶은 닭고기 등을 꺼내어 무미건조한 식사를 보충했다.
그러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그들이 권하는 양고기 삶은 물은 마셔야 했다. 그런데 이들은 한 개의 나무잔으로 차례로 돌려가면서 마시는데, 먼저 먹고 난 사람은 혓바닥으로 국물 한 방울도 남지 않게 닦은 뒤 다음 사람에게 잔을 돌리는 것이었다. 이에 기겁한 여운형은 궁리 끝에 다음 날 아침 염치불구하고 잽싸게 나무잔을 차지하여 제일 먼저 사용했다.
둘째 날 태점에서는 게르 주인의 친절을 거절하지 못하다가 다음 날 예상치 못한 봉변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날도 마찬가지로 태점에 들러 말을 바꾸고 추장의 게르에서 잠을 잤다. 게르 주인이 한사코 자기 침상에서 잘 것을 권하자 이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하여 여운형은 침상에 자고 주인은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잤다. 다음 날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온몸이 가려워서 어쩔 줄 몰랐다. 날씨가 너무 추워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었고 손이 얼까봐 장갑을 벗을 수 없어 긁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발광이 날 듯한 가려움을 간신히 참으며 이날 유숙할 곳인 나무 집에 도착했다. 여운형은 부리나케 방 안으로 달려가 난로 앞에서 벌거벗은 다음 온몸을 시원하게 긁고 나서 내의를 갈아입고 벗은 내의를 집 밖에 두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밤새 얼어 죽은 이가 내의를 덮고 있었다. 여운형은 이 얼어 죽은 ‘착취자’를 브러시로 털어내 활활 타오는 난롯불에 모조리 화형을 시켰다.
고륜을 출발한 지 나흘째 해가 저물 무렵 목적지인 트로이카 삽스크에 도착했다. 도시의 이름이 한자로 물건을 사고판다는 매매성(賣買城)이듯이, 이곳은 몽골과 러시아의 국경도시로 오래전부터 러시아와 중국의 교역 중심지였다. 여운형 일행은 옥흘라에게서 소개받은 러시아 대표 사파로프를 찾아가 그의 집에서 사흘을 머문 뒤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선에 있는 우딘스크를 향해 출발했다.
트로이카 삽스크에서 우딘스크까지는 썰매를 이용했다. 이제는 사막도 초원도 다 없어지고 시베리아의 울창한 처녀림과 두껍게 땅을 덮고 있는 하얀 길을 앞으로 앞으로 달리는 일만 남았다. 바퀴를 제거하고 만든 트로이카 썰매에 두 사람씩 나누어 탔다. 이곳에는 평소 얼마나 눈이 많이 오는지, 겨울에 지나가던 길옆의 나뭇가지에 장화나 옷 등을 걸어두고 이듬해 눈이 녹은 봄에 와서 장화나 옷을 찾으면 높은 나무 꼭대기 가지에 걸려 있다고 했다.
겨울인 데다 북으로 갈수록 해가 점차 짧아져 실제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은 아침 11시에서 오후 5시까지 하루에 겨우 5~6시간밖에 안 되었다. 일행은 부지런히 썰매를 달리며 중간 중간 이름 모를 촌락 농가에 유숙했다. 그럴 때마다 농부들은 낯선 이방인을 위해 따뜻한 러시아식 수프와 부드러운 빵을 대접했고, 이방인을 보려고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손때 묻은 손풍금을 꺼내어 민요를 부르고 춤도 추면서 일행을 즐겁게 해주었다. 훈훈한 시골 농부들의 인심은 동서양을 가릴 것이 없었다.
러시아의 변방에서 스친 동포
사흘을 달려온 썰매는 드디어 미끄러지듯이 오후 3시경 우딘스크에 도착했다. 여운형 일행은 곧바로 가지고 온 여권과 공문서를 기관에 제출하고 모스크바행 기차가 올 때까지 이틀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모스크바에서 보면 변방 가운데서도 변방인 조그마한 시골 마을들의 문화 수준은 상상 외로 높았다. 이곳은 주로 제정 러시아 시기 체제에 저항한 진보 인사들을 내쫓은 유배지여서 이들이 뿌린 교양과 문화의 씨앗이 차츰 꽃을 피웠던 것이다.
이제 최종 목적지인 이르쿠츠크까지는 한 코스만 남아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의 북행 열차가 우딘스크를 떠나기 전날 밤 여운형 일행은 어두컴컴하고 음산한 한 열차 차량에 숨어들어 갔다. 이제 혁명을 시작한 이곳에는 혁명을 반대하는 세력은 물론 러시아혁명을 방해하려는 각국의 스파이가 많아 조심해야 했다. 러시아는 자신들이 초대한 각 민족 대표자들을 안전하고도 비밀리에 대회장으로 안내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촛불을 켜니 차량 안은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듯한 폐가처럼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저녁 식사 때가 되자 러시아 동무가 검은 나무토막을 가슴 한가득 안고 와서 도끼로 패기 시작했다. 일행은 난로에 땔 땔나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저녁 식사인 ‘흑빵’이었다. 추운 겨울에 흑빵이 돌덩이처럼 꽁꽁 얼은 것이었다. 이 흑빵 몇 조각과 소금에 절인 생선 및 이름 모를 차 한 잔이 식사의 전부였다. 혁명 직후 열악한 러시아의 경제 사정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여운형 일행은 이 형편없는 식사에 결코 불평할 수 없었다. 혁명 직후 러시아 전국을 휩쓴 대기근에 이어 발생한 극도의 식량 부족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그 조악한 식량에도 능히 역사가 그들의 어깨 위에 얹어주는 모든 짐을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씩씩하게 나아가는 새로운 민중 정신이 주는 감화력이 컸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일행은 드디어 모스크바행 열차를 탔다. 단씽과 여운형은 특별히 이등실에 초대되었고, 도끼 없이 먹을 수 있는 흑빵과 각설탕, 고기 등이 식사로 나왔다. 우딘스크를 떠난 기차가 한참을 달려 음울한 북극의 황혼이 어슬렁어슬렁 땅을 덮기 시작할 무렵 여기저기서 “바이칼!” “바이칼!” 하는 환호 소리가 터져나왔다. 창밖으로 그동안 말로만 듣던 시베리아 광야 속의 바다, 바이칼 호가 눈앞에 펼쳐졌다.
오랫동안 바다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단조롭고 우울한 대륙 풍경 속에 질식할 듯한 우수(憂愁)의 압박을 느끼면서 여행을 해온 여운형의 눈앞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연히 나타나 그 광활한 푸른 가슴을 겨울 아침의 젊은 태양 아래 마음껏 벌려놓고 맞아주는 이 바이칼 호수는 마치 넓은 바다와 같았다.
기차가 조그마한 시골 역인 오-제르나야를 지나자 바이칼 호에서 흘러나온 앙카라 강이 기차를 따라 흘러갔다. 이때 저 멀리 보이는 한 풍경이 여운형의 눈을 의심케 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동포의 모습이었다. 다 쓰러질 듯한 시베리아식 농가에서 조선옷을 입고 물동이를 인 아낙네가 가까이 있는 우물로 물을 길러 가고 있었다. 불현듯 달려가 그 아낙네를 붙들고 ‘어떻게 해서 이곳에 살고 있는지’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지주의 등쌀에 못 이겨 그리운 고향 땅을 뒤로하고 압록강을 건너 타국 멀리 이곳까지 떠밀려왔을 동포들을 생각하니 그 기구한 민족의 운명이 마치 칼날처럼 가슴 한쪽을 저며왔다.
아련한 동포애에 젖어 있던 차, 이날 오후 기차는 마침내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역에 도착하자 앞서 와 있던 한국 대표와 중국 대표들이 환영하러 나왔다. 국내와 연해주 등지에서 온 30여 명의 한국 대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가워 서로 부둥켜안으며 러시아가 정해준 숙소에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음 날 한국 대표들은 곧 개최될 원동피압박민족대표자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여운형 등 한국 대표들은 역할을 나누어 분과위원회를 구성하고 본대회에 보고할 보고서 작성에 들어갔다. 그 내용은 한반도를 강탈한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고 이에 맞서는 한국 독립운동의 상황과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었다.
12월 하순 한창 바쁘게 대회 준비를 하는 사이 뜻밖의 명령이 내려왔다. 이곳에서 열릴 예정인 대회를 동방피압박민족대회로 이름을 바꾸어 모스크바에서 열겠으니 그곳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원래 워싱턴회의에 대항해 열 계획이지만 이미 기한이 늦어졌으니 원동의 각 민족 대표자에게 건설기에 있는 새 러시아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비록 대회 장소가 바뀌고 행사 시일이 늦어져 아쉬움은 남았지만 모스크바로 간다는 사실에 여운형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혁명의 심장부인 모스크바, 레닌이 살고 있는 곳, 신흥 러시아의 공산당 지도자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모스크바! 여운형 등 한국 대표들은 뛰는 가슴을 누르면서 마음은 벌써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었다.
아, 마투-슈가 모스크바!
해가 바뀐 1922년 1월 7일 아침 여운형 일행을 태운 기차가 모스크바에 멈춰 섰다.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오는 열흘 남짓 동안 한국 대표들은 이르쿠츠크에서 구성한 분과위원회를 중심으로 대회 준비에 총력을 기울였다. 여운형은 몇몇 동지와 함께 탄 일등실을 총사무소로 정하고 전체 회의는 식사 시간 이후 식당칸을 이용했다. 매일 저녁 시간 이후 밤마다 전체 회의를 열었고, 열띤 토론 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매우 바쁘게 보냈다.
모스크바역에 도착하자 대표단을 환영하러 나온 수많은 군중의 환호성은 이들의 피를 끓게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성대한 환영이었다. 군악대의 연주가 우렁차게 울리고 기차에서 내린 대표단은 악수 세례를 받았다. 곧이어 연단에 러시아 각 기관 대표와 대회 주최측 인사들이 나와 차례로 환영 연설을 했다. 이들의 환영사가 끝나자 한국 대표단에선 여운형이 연단에 올라 영어로 답사를 했다. 영하 30도의 강추위였지만 뜨거운 환영 열기 덕인지, 그가 연단에서 내려올 때는 온몸에 상쾌한 땀이 축축하게 배어 있었다.
한국 대표단의 사무소는 동방피압박민족대회장인 제정 러시아시대 희랍교 신학교의 제3기숙사로 정해져 있었고, 숙소는 크렘린 궁을 마주하고 있는 호텔 룩쓰였다. 대회가 열리는 동안 여운형은 틈틈이 모스크바 시내를 관광하고 때로는 트로츠키의 연설장을 찾아가 그의 연설을 듣기도 했다.
일찍이 러시아의 인민이 바친 ‘마투-슈가 모스크바’, 즉 어머니 모스크바라는 이 옛 도시에는 전 유럽에도 비할 데 없는 대규모의 하얀 벽과 붉은색 및 푸른색이 뒤섞인 지붕이 즐비하고 그 틈에 우뚝우뚝 솟아 있어 가지가지 양식의 교회 사원 건축이 이상스럽게도 반(半) 동양적인 특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니 처음 보는 순간부터 친밀함과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장엄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모스크바를 모르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 러시아 속담이 결코 공허한 과장은 아니었다.
동방피압박민족대회는 크렘린 궁전 안의 극장에서 1월 21일 밤에 시작되어 2월 2일까지 계속되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의장단의 한국 대표로 뽑혔다. 대회에서는 한국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 혁명은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그 정부를 격려하며 수정되어야 한다. 한국은 공산주의에 관한 지식이 없는 농업국이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강조해야 하며 제1차적 목표를 농민에게 두어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다.
대회가 끝난 뒤 여운형 등은 레닌과 트로츠키 등 러시아 공산당의 주요 간부들을 직접 면담하고 귀로에 올라 1922년 4월 무렵 상하이로 돌아왔다.
여운형을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가 주최하는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간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 이유는 레닌을 만났던 여운형의 이야기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소. 그때까지는 러시아가 조선에 공산주의를 그대로 선전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레닌이 조선의 교통·국어에 관해 물었을 때 교통은 자동차로 하루 만에 (끝에서 끝까지) 달할 수 있는 정도, 언어는 하나라고 대답하자, 레닌은 조선은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가 낮기 때문에 지금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잘못이고,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고 했소. 이는 나의 이전부터의 주장과 일치하는 말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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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를 향한 조선 사람들의 여정과 그 기록. 여말선초부터 식민지 시기까지 근 600년 동안 이뤄진 다양한 형태의 세계여행을 12가지로 선별하여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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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일제강점기 목숨 걸고 떠난 여운형의 여행길 –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전용훈,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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