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연희전문 교수 이순탁의 세계일주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보편 세계를 꿈꾼 지식인이 본 세계의 대격변

이순탁, 세계일주에 나서다

1933년 4월 24일, 서른일곱이 된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 이순탁(李順鐸)은 집을 나서서 경성역으로 향했다. 역에는 장도를 환송하는 지인들이 나와 있었다. 일일이 작별 인사를 나누고 기차에 올라탔다. 부산행 기차는 오후 1시에 출발할 터였다. 아마도 당시의 특급열차 히카리(光)였을 게다. 여유 있게 부산에 도착한 그는 밤 10시 부관 연락선 창경환(昌慶丸)에 몸을 싣고 있었다. 1905년부터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연결해온 부관 연락선들은 덕수환, 경복환, 창경환 같은 조선의 궁궐 이름을 달고 있었다. 조선 왕조가 건재했다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해가 1922년이니 11년 만의 일본행이었다. 그러나 이번 그의 목적지는 일본이 아니라 세계였다. 그는 ‘해륙 붕정 3만 리 약 17개국’을 주유하는 세계일주에 막 나서던 참이다. 조선 사람으로서 처음 세계를 일주했던 이가 1883년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했던 민영익 일행이었으니, 그로부터 꼭 50년 만의 일이었다. 그 사이 유길준,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 일행, 언론인 노정일, 항일 변호사 허헌, 언론인 이정섭, 서양화가 나혜석 부부, 언론사주 김성수 등이 제각각의 여정으로 세계를 일주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일주는 여전히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험이었다. 그의 세계일주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언론이 크게 보도할 만큼 사회적인 이슈였다.

처음 일본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 1914년, 열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식민지의 가난한 농가 출신 고학생이 일본을 접하고 충격에 빠졌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조국을 대표하는 중견 지식인이 된 자신이 세계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러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무렵 이순탁의 삶이 겪어온 변화의 진폭만큼이나 세계도 충격적인 격변을 겪고 있었다. 1929년 말 이래 세계경제를 혼돈에 빠뜨려왔던 세계대공황과 파시즘의 위협이 그것이다. 대공황의 영향은 깊고 넓어서 식민지 조선도 그 골 깊은 그림자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고, 파시즘과 동맹한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고국의 식민지적 우울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시모노세키행 부관 연락선은 일본으로 도항하는 조선인 노동자들로 가득했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향했고, 거기서 하층 노동자가 되었으니, 이 무렵 이미 40~50만을 헤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의 최저층이었고 이순탁은 최고 엘리트였다. 그들은 품팔이를 위해 떠나지만 이순탁은 세계일주를 위해 떠나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식민지 출신이라는 지울 수 없는 신분…. 이후부터 경험한 이순탁의 세계일주가 전문 지식인의 세계적 시야와, 어쩔 수 없는 식민지인의 열패감 사이에서 동요하고 부침하는 데는 이 부조화스런 존재의 분열이 자리잡고 있었다.

보편적 시선으로 자신의 삶터를 바라보다

무릇 여행은 바깥을 경험함으로써 안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가 가장 멀리 확장될 때 그 여행은 세계일주가 된다. 따라서 세계를 일주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세계라는 시점을 확보하는 행위이며, 이 보편적 시점을 통해서 자신의 삶터를 새로이 보는 행위라 할 것이다.

무엇이 세계일주인지를 정의하는 뚜렷한 기준은 없지만, 어쨌거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세계일주는 세계를 휩쓴 시대적 붐이었다. 1873년에 출간된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그런 세계사적 풍조를 보여주는 징표였다. 세계일주 붐은 세계가 지구와 동일한 크기를 갖게 된 시대, 즉 제국주의의 팽창이 전 지구를 장악하게 된 시대의 산물이었다. 서구인들 사이에서 세계일주단 참가는 일종의 첨단 유행이 되었다. 서구의 세계일주단은 저 멀리 ‘극동’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까지 발길을 들여놓고 있었다. 1909년 4월 28일자 『황성신문』의 “일주단래경(一週團來京)” 제하의 기사는, 영국의 여행사 토머스 쿡이 주관하는 세계일주단 10명이 4월 27일 아침에 부산에 입항해 기차로 그날 밤 경성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다.

근대 경성역의 모습

세계여행을 떠나는 이순탁은 서울에서 부산행 기차를 타고 첫발을 내딛었다.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를 앞장서서 추진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

이순탁이 세계일주를 했던 1930년 전후 무렵 세계는 정치와 군사, 경제 모든 면에서 우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특히나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 제국주의는 그 그늘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극히 일부였지만 조선 사람들의 세계일주 또한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 있었다. 이 극소수의 경험을 통해서나마 세계와 우리가 교차하게 되면서 조선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감각은 극적으로 전변했다. 세계일주 여행자가 전하는 말과 글들은 일본에서 전해오는 외신이나 서적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느낀 세계에 대한 원초적 체험으로 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세계일주 여행기는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로 분할된 세계의 현상, 그리고 그 현상 이면에 가로놓인 각국의 사회와 문화의 이면을 알려주었다.

이순탁의 「최근 세계일주기」는 이런 맥락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여행기 중 하나다. 그는 여행기에서 개인적인 감상은 절제하면서 당대의 세계정세와 각국의 상황이라는 양대 축을 세밀히 소묘해나간다. 그리고 이 두 축 사이에 식민지 조선이라는 조국이 처한 현실을 대입해나간다. 이처럼 이순탁의 세계일주 여행기는 지식인 여행기의 한 전범이라고 할 만하다.

「신지구양반구도」, 작자미상, 18세기, 53×78cm, 서정철 기증, 서울역사박물관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세계일주 여행은 세계를 휩쓸며 붐을 일으켰는데, 이것은 기존의 천문학자와 지리학자의 세계지도 제작에 힘입은 결과이기도 했다.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좌파적 지향과 우파적 행동으로 문제적 인물이 되다

효정(曉亭) 이순탁은 1897년 11월 7일 전남 해남에서 몰락한 양반집안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 되던 190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세는 더욱 기울어 소작농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립목포간이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학비 문제로 한 학기 만에 중퇴하고 고향의 면서기와 군청 고원 노릇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14년에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도쿄세이조(成城)중학, 고베고등상업학교 예과,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선과(選科)를 거쳐 본과에 편입한 후 1922년에 졸업했다.

그가 편입과 중퇴를 반복하며 여러 학교를 거친 것에는 학비 마련이 어려워 최대한 유학 기간을 단축해야 했던 사정이 있었다. 그나마도 학업이 가능했던 데는 도쿄 유학 시절 만난 수당 김연수의 도움이 컸다. 호남 대지주 집안의 자식으로서 이후 민족 자본가로 성장하는 수당과의 만남은 그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학 시절 이순탁의 사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의 스승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 교수였다. 가와카미는 일본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순탁이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에서 좌파 경제학자로 자리잡게 된 데는 가와카미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1922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이순탁은 경성방직과 조선상업은행을 거쳐 1923년 4월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학과장에 취임하면서 학교 교무위원이 되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일약 조선 경제학계의 총아로 떠오른 것이다. 이후 도쿄상과대학 출신 백남운과 미국 콜롬비아대학 출신 조병옥, 연희전문학교 상과의 제자이자 교토제국대학 후배 노동규 등을 교수로 영입했는데, 특히 백남운·노동규 등과 함께 연희전문 상과의 학풍을 좌파 색채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순탁이 문제적 인물인 것은 학계에서의 좌파적 지향과는 달리 사회활동에서는 오히려 민족주의 우파로 행동했다는 점이다. 그는 민우회, 조선물산장려회, 조선사정연구회, 신간회 등 민족 자본주의 노선과 민족협동론 노선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총독부의 억압이 강화된 1930년대에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조선음악학회 등 주로 문화활동에 주력했다. 1938년 4월에는 이른바 ‘연희전문 경제연구회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같은 학과의 백남운·노동규 등 동료 교수 및 학생들과 함께 구속됐으며, 치안유지법과 형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1940년 7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교수 복직이 불가능하지만 학교 측의 배려 덕분에 세브란스병원 경리과장으로 재직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좌파적 사상과 우파적 실천이라는 그의 독특한 행로는 해방 이후 중간파적 입장에서 좌우합작을 주도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우파인 한민당 재정분과위원장까지 역임했지만, 한민당의 좌우합작 거부에 반발해 탈당한 후에는 중간파 정치단체인 민중동맹에 참여했고, 미군정 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이 되어 토지개혁 문제에 주력했다. 정부 출범과 함께 이승만 정부의 초대 기획처장으로 발탁돼서는 농지개혁과 대일배상 요구 작업에 전력했다. 실제로 1949년에 단행된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은, 농지에 대한 자유매매 금지 등의 혁신적인 구상은 사라졌지만 이순탁의 구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순탁은 좌파 사상가였지만 중도 온건파의 노선을 걸었다. 대기업은 국영으로 하여 계획경제의 기반을 갖추되 중소기업은 자유를 보장하여 적극 육성하고자 했고, 지주제를 폐지하고 자영농이 중심이 되는 견실한 농업의 발전을 추구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의 노선은 후발 국가의 현실에 기반한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좌익의 찬탁운동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47년 좌우 대립이 격화된 가운데 좌우익 시위대가 갈라져 광복 2주년 기념행진을 여는 모습

좌파적 사상가이지만 우파적 실천가였던 이순탁은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좌우가 극한으로 치닫는 가운데 온건파 노선을 걸으면서 좌우합작을 주도했다.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좌우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던 해방 후 공간에서 그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은 점차 좁아졌다. 1949년 7월 정부를 떠난 그는 조선금융조합연합회 회장 등을 지내다가 1950년 5월 제2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한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에 북으로 사라졌다. 이순탁은 납북된 것일까, 월북한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좌파 사상가이면서도 우파 민족주의자의 길을 걸었고, 해방 후에는 좌우 합작파이면서도 이승만 정부에 참여했던 이력을 고려하면 자진 월북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이순탁이 남한 땅에서 사라진 지 50여 년이 지난 2004년 3월, 남한의 방북 취재단은 역사상 처음으로 평양 소재 재북인사릉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이순탁이 그곳에 묻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북측이 알려준 그의 서거일은 1950년 10월 20일. 북으로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을 다했던 것이다. 노인이 된 그의 장남은 제삿날이라도 알게 되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전한다.

아시아,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1933년은 이순탁이 연희전문 상과 교수로 부임한 지 만 10년이 되던 해였다. 오랫동안 맡아온 학과장직을 사임하게 된 데는 학과 내 교수 및 학생들 사이의 이념 갈등이 불거졌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연희전문 상과는 유심론의 문과에 맞서는 유물론의 상과로 불렸지만, 조병옥 같은 우파 경제학자도 있었고, 기독교 학풍상 학생들 중에도 우파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학교 측은 오랫동안 학과와 학교의 보직 교수로 공헌한 점을 고려해 1년의 안식년과 세계일주 경비의 일부 지원을 제안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이순탁의 세계일주 여정을 방문한 도시 순서대로 보자면 다음과 같다.

서울 → 교토 → 도쿄 → 상하이 → 홍콩 → 싱가포르 → 페낭 → 콜롬보 → 아덴 → 카이로 → 나폴리 → 폼페이 → 로마 → 밀라노 → 베른 → 제네바 → 파리 → 브뤼셀 → 헤이그 → 베를린 → 런던 → 케임브리지 → 옥스퍼드 → 리버풀 → 맨체스터 → 더블린 → 뉴욕 → 워싱턴 → 시카고 → 로스앤젤레스 → 샌프란시스코 → 하와이 → 요코하마 → 서울

대륙별로 분류하면 아시아 9개 도시, 아프리카 1개 도시, 유럽 16개 도시, 북미(미국) 6개 도시이니 세계일주라고는 해도 사실상 아시아, 유럽, 미국만 여행한 셈이다.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의 도시들은 사실상 모두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다. 식민지가 아닌 도시는 상하이와 카이로 정도뿐인데, 따지고 보면 상하이도 상당 지역이 열강의 조차지였고, 이집트 역시 1921년에 형식적인 독립은 이루었지만 실상 영국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더블린을 수도로 하는 아일랜드 또한 1921년의 독립선언 이후 여전히 영연방 내 자치지역으로 온전한 주권 획득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군국주의의 그림자 짙게 드리운 일본의 양면성

1933년 4월 26일, 이순탁이 첫 목적지 교토에 도착해서 처음 만난 지인은 교토제국대학 시절의 동료로서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던 다니구치(谷口)였다. 반가움을 감추지 못한 벗과의 만남, 어쩐지 연구실도 낯익은 느낌이었다. 다니구치는 그 방이 옛 스승 가와카미 교수의 방이라고 상기시켜주었다. 가와카미 교수는 시국 사건으로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면회를 가겠다는 이순탁을 다니구치가 막아섰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자네에게도 교수님에게도 이롭지 못할 테니.”

다시 돌아온 일본은 바야흐로 군국주의 바람에 휩쓸려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 침략을 본격화한 일본은 이후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독일·이탈리아와 삼국방공협정을 맺는 한편, 국내적으로는 정당정치의 종말을 맞고 있었다. 스승 가와카미 교수는 공산당 활동에 연루되어 1928년 체포·수감되어 있던 터였다. 좌파 계열은 물론이고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에게도 탄압의 손길이 미치고 있었다.

파쇼화가 한창인 일본 제국의 수도 ‘대동경(大東京)’에서 식민지 출신의 이순탁은 “촌놈 노릇밖에” 못 하고 있었다. 즐비하게 늘어선 마루노우치의 빌딩가에서, 미쓰코시, 마쓰야 같은 거대한 백화점에서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나 거대한 대도시의 이면에는 일모리(日暮里)와 같은 빈민굴이 공존하고 있었다. 음식, 의복, 주거, 인물의 불결한 모습이란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참으로 참혹한 것이었다.

17세기에 그려진 일본의 지도

이순탁의 첫 목적지는 일본의 교토와 도쿄였다. 그곳 도시는 현기증을 느끼게 할 만큼 대단한 규모였지만, 그 이면의 빈민굴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쟁의 폐허지와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에서

요코하마를 떠난 이순탁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중국의 상하이였다. 상하이는 1840년 아편전쟁의 결과 서구 열강에 문을 열어 개항장이 되었고, 공동 조계와 프랑스 조계 등에 잠식당한 반식민지 처지의 국제도시였다. 그가 상하이를 찾기 1년 전인 1932년 1월, 중일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급기야 제1차 상하이 사변이 터졌다. 무력 충돌의 결과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상하이 곳곳에는 전쟁의 상흔이 배어 있었다. 중국 문화의 보고인 출판사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포함하여 30여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던 부속 동방도서관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실로 전쟁이란 문화를 파괴하는 마물(魔物)”이라는 생각에 이순탁은 몸을 떨었다.

상하이를 둘러보며 이순탁은 일찍이 접했던 일본 소설 『일본의 전율』 속 한 구절을 떠올렸다. “지나인은 아무리 보아도 사람이 아니니, 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한 동물이다.” 그런데 요코하마에서 상하이로 향하던 배 안에서 만난 어떤 독일인이 그와 똑같은 말을 이순탁에게 건넸다. “중국은 아무것도 아니다. 민족주의도 없고, 영혼도 없으며, 사상도 없고 자비심도 없으며 동정심도 없다.” 이토록 잔인한 혹평에 이순탁 역시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일화(日貨) 배척운동을 벌인다 하여 중국 백화점에선 일본 상품이 자취를 감추었지만, 여전히 일본의 대중국 무역이 세계 2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일본 상품들이 상표만 가리고 팔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강(長江) 이재민 구제금과 의용군 의연금이 중간에서 다 사라지는 나라였다.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사법기관조차 뇌물로 판단을 한다는 부패로 가득한 나라였던 것이다.

이순탁이 방문했을 그 시기 상하이의 풍경

부두 뒤편으로 호텔과 은행, 세관 등이 자리잡고 있다.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중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상하이를 떠난 이순탁의 여정은 이후 홍콩, 싱가포르, 페낭, 콜롬보, 아덴, 카이로 등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도시로 이어졌다. 이 도시들의 공통점은 모두 서구 열강, 그것도 영국의 식민지라는 것이었다. 19세기 초에 일제히 독립한 남미의 여러 나라를 제외하면 세계 대부분이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한 시대였다. 같은 식민지인으로서 이순탁의 여행이 그저 즐거운 견문이 될 수 없음은 당연했다.

싱가포르와 페낭에서는 천혜의 자원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식민지가 되어 있는 이들의 현실을 개탄했고, 콜롬보에서는 인도 국민운동의 성공을 축하하면서 인도인들이 영국의 이간 정책에서 벗어나길 기원했다. 아덴을 거쳐 마침내 아프리카 대륙을 목도하게 되었을 때는 세계 문명에 공헌하고 인류에 무한한 보화를 제공해온 아프리카가 백인들의 요리장이 되었음을 통탄하며 분기할 것을 마음속에서 촉구했다. 이집트에서 만난 일단의 청년들이 이구동성으로 완전 독립을 이뤄내겠다며 굳은 결의를 보여주었을 때, 이순탁의 마음은 아마도 더욱 비참한 조국의 현실로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대서양」의 아프리카와 인디아 부분, 파리 프랑스 국립도서관

이순탁이 머물던 국가의 상당수는 제국주의 시대에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들이었다. 카이로와 같은 아프리카의 도시 또한 그의 여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와 식민지배 반대가 공존하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와는 달리 유럽에서는 감탄의 연속이었다. 처음 도착한 이탈리아에서는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장려한 유적들 앞에서 경탄했고, 스위스 베른과 제네바에서는 경이로운 자연과 잘 정비된 관개시설, 넓고 깨끗한 도로와 설비, 완전한 박물관과 미술관들에 탄복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건물들과 깨끗한 시가지, 화려한 장식과 아름다운 꽃, 카페들로 가득 찬 풍경 앞에서 과연 세계 제일가는 도시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든 것이 화려했는데 특히 여성들이 그러했고, 온 도시가 찬란한 예술로 가득했으니 그의 눈에는 파리가 이탈리아 도시들을 능가했다. 독일의 베를린을 보고는 파리를 모방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들의 소박함과 건실함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이순탁이 가장 오래 머문 도시는 런던이었다. 비록 저물어가는 제국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의 하나인 영국이었다. 그러나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는 넘쳐나는 걸인과 실업자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매연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더라도 영국에서 받은 가장 큰 인상은 자유가 넘친다는 사실이었다.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는 공산주의 선전에서부터 인도 독립,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각종 종교 선전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자유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세계가 두려워하는 공산주의와 자기네가 지배하는 식민지의 독립이 자유롭게 선전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감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사상적 위기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사상이야말로 자유로이 토론될 때 오히려 위험이 없다는 교훈을 되새길 수 있었다.

세계일주를 하면서 이순탁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영국의 런던이었다. 물론 가장 인상적인 곳도 런던이었는데,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식민지배와 식민에 대한 반대운동이 자유롭고도 오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 도시였기 때문이다.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런저런 유럽의 소국들에 대한 이순탁의 인상기 또한 서구인들의 문명과 민주주의, 애국심을 포함한 긍정적인 미덕에 대한 경의로 가득 차 있다. 1830년대부터 영세 중립국이 된 벨기에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침략에 맞서 싸운 벨기에 사람들의 용감함에 두 눈에 눈물을 머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참으로 잘 정비된 운하와 경지들,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이용하는 네덜란드인들의 검소함에 놀라기도 했다. 유일한 예외는 아일랜드였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오랜 무력 독립운동 끝에 1921년에 마침내 자치를 획득한 상태였다. 그러나 자치에 만족하는 세력과 완전 독립을 지향하는 세력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대운하」, 우타가와 도요하루, 종이에 목판 채색인쇄, 48×33.3cm, 1764~1789년경,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이순탁은 네덜란드의 잘 정비된 대운하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라는 신로마제국

1933년 9월 2일 오후 1시 30분 리버풀 항. 이순탁이 몸을 실은 2만 톤급 대형 기선 시디아 호가 뱃고동을 울렸다. 드디어 유라시아 대륙을 벗어나 ‘새로운 대륙’ 아메리카로 떠나게 된 것이다. 9월 12일 정오, 시디아 호는 세계 자본주의의 떠오르는 수도 뉴욕에 입항했다.

미국은 과연 근대 물질문명의 최정상에 오른 국가다웠다. 이순탁은 미국에서의 놀라움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무엇에 놀라는가. 첫째는 마천각(마천루)에, 둘째는 교통망에, 셋째는 인파에, 넷째는 화려함에, 다섯째는 광고에 놀란다.” 고국에서는 4~5층짜리 건물들이 최고 높이를 자랑하던 시절에 맨해튼에는 102층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비롯한 수십 층짜리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파리의 자동차 물결에 놀랐지만, 미국에 와보니 파리가 초라할 지경이었다. 1933년 1월 통계로 미국은 전 세계 자동차 등록 대수의 72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 인파, 저 사치, 저 광고, 저 상품. 여기 와본즉 파리의 호사도 옛말인 듯한 감”을 받았다. 요컨대 “금일 미국의 문명은 세계의 문명이며, 금일의 미국은 세계이다.” 경제력만이 아니라 학술과 문화, 유행에서마저 미국은 압도적인 세계 제일이 되어 있었다.

1930년대 뉴욕 맨해튼의 스카이라인. 왼쪽이 엠파이어스테이트, 오른쪽 끝이 크라이슬러 빌딩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순탁은 뉴욕에 이어 수도 워싱턴, 나이아가라 폭포, 시카고, 디트로이트를 거친 다음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태평양 연안의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다. 가는 곳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워싱턴은 파리를 본떴으되 거대한 백색 대리석으로 지은 관청과 적색 벽돌의 주택이 즐비하여 한층 인공미를 더했다. 모든 것이 거대했고 이채를 발했다. 나이아가라는 워낙 거대해 그 수력을 모두 발전에 이용한다면 미주 전체를 전력화할 수 있을 정도라 했다.

마침 한창 진행 중이던 시카고 세계 대박람회는 현대 문명의 모든 것을 집대성해놓았는데, 이미 다년간 관람객의 수가 조선의 전 인구수보다 많다는 말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제너럴 모터스 전시관에서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실제로 자동차가 생산되어 나오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쉐보레 제915만 3808호가 자신의 눈앞에서 완성되는 광경은 자못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순탁은 시간을 내 디트로이트 포드 자동차 공장을 견학했다. 자동화된 컨베이어 시스템에서는 매일 2000대의 자동차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물자의 홍수였고, 물질문명의 극한이었다. 이순탁은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 문명은 재즈와 댄스로 상징되는 향락의 절정에 올라 있기도 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이대로 방임하면 미국의 사회구조는 파괴될 것이며, 이 향락이 미국이라는 신로마제국이 멸망으로 치닫는 원인이 되리라 경고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혼율, 시험결혼의 성행, 여성들의 정조관념 희박화 등을 목격한 이순탁은 이것이 인간을 야만성과 동물성으로 이끌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이라는 신로마제국은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가?

파시즘, 대공황 그리고 세계대전의 시대

이순탁이 세계일주를 하던 1933~1934년은 대공황과 파시즘이라는 세계사적 사태가 한창 진행되던 무렵이었다. 1929년 말 미국에서 촉발한 세계대공황은 이 시기까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는 파쇼 정권이 들어섰다. 바야흐로 파시즘은 국제적 조류로 자리잡고 있었다.

파시즘에 대한 이순탁의 반응은 이중적이었다. 우선 이순탁은 원조 파시스트 국가인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일면 긍정적이었다. 무솔리니 정권이 자본과 노동 모두에 대해 강력한 통제경제 정책을 수행한 후 이탈리아는 대외 신용이 회복되고 재정도 건실해졌다. 실업 정책 또한 매우 적극적이어서 실업자도 상당히 감소했다. 높은 인구 밀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식민 정책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2의 로마제국을 꿈꾸는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의 행보가 “마기(魔氣)를 띤 변태적 상태”를 보일 것인지에 대한 염려의 한 자락을 지우지는 못했다.

파시즘의 악마적 기운에 대한 그의 염려는 나치당이 막 정권을 장악한 독일에서 한결 명확해졌다. 독일 나치 역시 ‘공익은 사익에 앞선다’는 전제 아래 통제경제를 실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의 사익 추구를 억압한다고 하지만 실제 탄압의 대상은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노동조합 등이었다. 자본가에 대한 탄압은 유대인에게만 집중되었다. 5월에는 대소 도시의 도서관에 쳐들어가 소위 비독일적 서적 수십만 권을 불태웠는데, 이순탁은 이를 현대판 분서로 보았다. 분서의 유래는 진의 시황제였으니, 그의 왕조가 2대를 넘기지 못했음을 기억한다면 히틀러 또한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이 이순탁의 예감이었다.

파시즘의 악마적 기운에 대한 이순탁의 염려는 독일의 나치당 정권을 목격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순탁이 세계일주를 할 당시 세계는 대공황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순탁은 조선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훌쩍 앞서나간 서구 선진국들의 모습을 보고 찬탄하기도 했지만 파시즘이나 대공황과 같이 어두운 이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순탁이 세계일주를 하면서 반드시 살펴보고자 한 것 중 하나가 대공황에 대처하는 세계열강의 자세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파시스트적 통제경제로 이에 대처하고 있었다면, 미국과 프랑스는 자유시장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으로 대공황을 극복하고 있었다. 미국에선 루스벨트의 민주당이 집권한 후 산업부흥국을 중심으로 신종의 통제경제, 공업부흥 행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는 금융정책에 신중하여 신용경제가 큰 타격을 입지 않고 건실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업자도 적고 불경기의 흔적도 없으니 “금일의 불란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나라”로 보였다. 반면 기존의 패권 국가 영국은 갈 길을 잃은 듯 보였다. 런던과 대도시의 거리는 걸인으로 가득 찼고, 실업자가 넘쳐났다.

그러나 대공황은 한 나라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순탁이 세계일주를 떠나기 전부터 반드시 참석하려 했던 일정이 그해 6월 12일부터 런던에서 개최될 세계경제회의였으니, 이 회의는 세계대공황에 대한 열강의 지혜를 모으려는 중차대한 시도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결국 결론을 맺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세계경제회의 결렬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세계대공황으로 각국은 물가 하락(디플레이션)과 무역 감소라는 곤경에 처해 있었다. 경제 규모 자체가 축소되는 비상 상태였다. 가장 손쉬운 대책은 정부의 재정지출을 통한 통화 팽창, 그에 기반한 물가 상승,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 그에 따른 수출 증대였다. 문제는 이러한 통화팽창 정책이 필연적으로 타국의 반발을 불러온다는 데 있었다. 통화가치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금본위제도의 유지를 주장하는 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경제회의는 각국 간 환율(당시 용어로는 위체) 변동의 안정을 위한 협정 체결에 합의했지만, 금본위제에서 이탈하여 통화 팽창정책을 추구하던 미국의 거부로 결국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이 결렬의 귀결은 무엇일까? 이순탁은 더욱 격렬한 경제블록화 및 블록 간 대립, 금본위 이탈국과 금본위국 간의 항쟁, 관세 인상, 쇄국적 경제정책으로 세계적 경제전쟁이 도래하리라 예견한다. 이 경제전쟁 다음에 올 것은 세계적 무력전쟁일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으니 이순탁의 식견은 상당한 것이었다.

지식인과 식민지인의 이중성 사이에서

이순탁의 세계일주 여행은 세계사적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지식인의 면모와, 그 세계사의 흐름에 뒤처진 식민지 출신자로서의 고뇌가 동반된 것이었다. 예컨대 이순탁은 스위스 베른의 역사박물관에서 조선에 관한 수집품 몇 점을 발견하고서는 깊은 수치심에 잠긴다. 조선에서도 구하기 힘들 정도로 낡고 저급한 것들뿐이었던 탓이다. 페낭에서 스리랑카로 향하던 배에서는 조선 간호부 대표로 파리의 만국간호부대회에 참석하던 길인 서양인 간호사 두 명을 만났는데, 반갑기는 했지만 조선인은 경비가 없어서 외국인이 조선을 대표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가 식민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것 같지는 않다. 여행기에는 특별한 차별 경험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영어를 꽤 잘 구사하는 지식인이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열강 일본의 여권을 소지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서구 열강과는 달리 일본은 대한제국을 법률적으로 합병했던 탓에 식민지 조선인들은 대외적으로는 일본 국민이었다. 제국의 판도 내에서는 무수한 차별에 시달렸지만, 그 바깥에서는 일본인일 뿐이었다. 이 복잡한 법적 지위와 정체성은 이순탁의 세계일주 여정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그가 가장 중요한 일정으로 여겼던 세계경제회의는 하필이면 그가 런던에 도착하던 날 결렬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이순탁은 7월 27일에 열리는 폐막총회라도 참가하려 했으나, 각국 정부의 공식 소개장이 없으면 입장이 불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가 폐막총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대사관의 소개장 덕분이었다.

싱가포르의 한 박물관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찌는 듯이 더운 날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데 말레이인 수위가 이순탁에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 일본 사람이지요. 나는 (일본 사람을) 대단히 좋아하오. 일기가 더운데 빙수 한 잔 먹고 싶소.” 이순탁은 “기뻐하는 얼굴로 일금 42전을 꺼내주었다.” 수위는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뜻을 표했다. 조국에서는 차별받는 식민지인이었지만, 해외에서는 열강 일본의 국민이었던 것이다.

이순탁은 말레이인 수위에게 굳이 자신이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 출신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하는 얼굴로 팁을 주었다. 이순탁의 태도는 때로 복잡하고 미묘해서 은연중에 식민 지배자의 시선을 보여주기도 했다. 말레이 반도의 천혜의 자원을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그 천혜를 이용할 줄 모르는 남국 주민을 불쌍히 여길 때면 마치 그가 열강의 지배자처럼 보인다. 요코하마에서 상하이로 가는 배 안에서의 대화도 흥미롭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미얀마인 승객을 향해 미얀마 사람이라면 신사가 아니라고 흉보는 일본 여고생에게 이순탁은 마음속으로 동조한다. 스스로는 전혀 못 느끼다가 일본 여고생의 한마디에 그를 비신사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중성이 이순탁만의 예외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적 시야를 갖춘 지식인이면서 동시에 식민지인이기도 했던 이 시기 많은 엘리트들의 면모이기도 했다. 자기 개인은 어디에 나가도 당당한 지식인이지만, 조국의 현실은 초라했다. 자신을 일본인으로 위장하는 것은 이 불편한 자각을 모면할 수 있는 편리한 도피처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위장은 조국으로 돌아오면 어차피 끝날 잠시간의 가면일 뿐이었다. 이순탁은 하와이와 요코하마, 도쿄를 거쳐 1933년 1월 20일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다. “떠날 때에는 용기백배로 온갖 호기심을 가졌지만 돌아와서 본즉 나에게는 이전 용기는 간 곳 없고 넋 잃은 사람 같으며, 모든 호기심은 다 사라지고 도로 옛날의 자신 그대로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조국의 자존이 박탈된 채 누리는 개인의 영광스런 체험은 이토록 신산하고 덧없는 것이었다.

『라루스 그림 소백과사전』에 나오는 아시아 도판

이 도판에서 유일하게 근대적 인물로 묘사된 것은 일본 군인이다. 그림에서 보듯 아시아에는 아편과 함께 쌀이나 차, 다이아몬드가 주어져 있으며, 아프리카에는 상아, 금, 대추, 오렌지 등이 주어졌다. 이 도판은 아시아의 인간을 강조해서 그림으로써 유럽과 구별되는 강한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순탁 역시 여행을 하면서, 가령 미얀마인을 만나면서 제국의 시선을 자신에게 투영시켜 마치 자신을 일본인인 듯 여기기도 하며 그들을 평가하곤 했다.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순탁의 세계일주 경로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Daum백과] 연희전문 교수 이순탁의 세계일주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전용훈, 글항아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