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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홉스

다른 표기 언어 Thomas Hobb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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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88. 4. 5, 잉글랜드 윌트셔 웨스트포트
사망 1679. 12. 4, 더비셔 하드윅홀
국적 영국

요약 초기 자유주의와 절대주의의 중대한 이론적 전제가 되는 개인의 안전과 사회계약에 관한 저서로 유명하다. 토머스 홉스의 대표 저작물인 〈리바이어선〉에서 그는 국가를 성서에 나오는 괴동물 리바이어선에 비유하여 전제군주제를 옹호하며 근대적인 정치체제에 있어 정치적 의무의 문제를 제기했다. 홉스는 정치이론에서 처음으로 평화와 안전의 필수적 조건을 분석하고 사회계약이론을 통해 이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되는 이상국가 건설의 방책을 제시했다. 사상가로서의 홉스의 명성은 주로 인간철학에 대한 공헌에서 비롯된다. 홉스는 형이상학의 대가였을 뿐 아니라 언어에 대한 생동하는 관심과 언어의 덫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비판철학자였다. 홉스는 스콜라 철학의 불합리성을 지적함으로써 근대 논리분석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오랫동안 영국의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여겨져왔다.

홉스(Thomas Hobbes)

ⓒ John Michael Wright | Public Domain

개요

초기 자유주의절대주의의 중대한 이론적 전제가 되는 개인의 안전과 사회계약에 관한 저서로 유명하다(개인주의). 신경질적인 교구 목사였던 토머스 홉스의 아버지는 교회의 문간에서 말다툼을 벌인 뒤 맘즈버리의 부유한 장갑 제조자인 자신의 형제에게 세 자녀를 맡기고 사라져버렸다.

토머스 홉스는 웨스트포트의 한 학교와 사립학교를 거쳐 옥스퍼드대학교의 모들린 칼리지에 입학했고, 여기서 여행기를 읽거나 지도를 연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1608년 대학을 졸업한 뒤 데번셔 2대 백작이 된 윌리엄 캐번디시의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이로써 홉스와 캐번디시 가문과의 일생 동안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홉스는 자기보다 몇 살 아래의 제자를 매우 아꼈다.

1610년 토머스 홉스는 캐번디시와 함께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는데, 이 여행중에 과거 옥스퍼드대학교 시절에 배웠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갈릴레오와 존 케플러의 이론에 의해 붕괴되는 과정을 목도하게 되었다. 귀향하자마자 홉스는 고전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고전연구 분야에서 홉스의 주요업적은 투키디데스 저작의 해석이었다. 1629년 이를 발표할 당시 홉스는 당대의 사회적 혼란에서 받은 영향으로 고대 아테네의 몰락이 민주주의의 운명을 예고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 토머스 홉스는 저버스 클리프턴의 아들과 함께 외국 각지를 여행했다.

〈기하학원본〉

이무렵 토머스 홉스는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 원본 Stoicheia〉에 제시된 공리의 증명을 통해 그 진리를 확정짓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하나의 이론적 전환점이 되었다.

1630년 토머스 홉스는 윌리엄 캐번디시를 다시 가르치기 위해 파리로 갔다. 이때 식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감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아무도 이에 답하지 못했으나, 홉스는 "만약 물질적 소재와 그것의 모든 부분이 정지해 있거나 동일하게 운동한다면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고 지각할 수도 없다"라고 했다.

따라서 만물은 운동의 다양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토머스 홉스는 운동원리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기하학을 연구했는데, 이러한 사상이 최초의 저서인 〈제1원리에 대한 소고 A Short Tract on First Principles〉에 담겨 있다.

젊은 캐번디시 백작과의 3번째 해외여행에서 토머스 홉스는 유럽 대륙의 신사상가들과 교제하면서 과학과 철학에 더욱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토머스 홉스는 운동이라는 사상에 몰두하여, 운동하는 물질이야말로 근본적인 실재라고 결론짓고, 엄격한 논증(기하학과 같이)을 통해 이러한 원리로부터 만물의 본질을 연역하려 했다. 홉스는 파리의 마린 메르센 모임에서 이러한 견해를 개진했다. 1636년에 갈릴레오와 이에 대해 토론한 뒤 홉스의 철학 3부작을 계획했다.

제1부 〈물체론 De Corpore〉(1655)은 운동의 관점에서 신체적인 현상을 설명한 것이고, 제2부 〈인간론 De Homine〉(1658)은 어떤 특정한 육체적 운동이 인간의 지각과 충동에 연관되는가를 밝힌 책이며, 제3부 〈시민론 De Cive〉(1642)은 인간 사회의 고유한 조직을 논급한 것이다.

1637년 영국으로 돌아간 토머스 홉스는 국내 정세가 내전 직전의 정치적 소요에 휩싸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홉스는 이러한 현실적인 압력 때문에 우선 계획된 철학서의 후반부를 발간하기로 결정하고, 왕권이 주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증명하는 일에 착수했는데 당시 주권은 왕에 귀속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1640년 인간과 시민권에 대한 저서 〈법의 원리 The Elements of Law, Natural and Politic〉가 필사본의 형태로 발간되었다. 여기에는 인간은 절대적인 주권에 스스로 종속되는 데 동의할 때만 평화적인 공동생존이 가능하다는 토머스 홉스의 독특한 사상이 구체화되어 있었으며, 〈시민론〉·〈리바이어선 Leviathan, or the Matter, Form,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1651)에서 재론되는 정치적·심리학적 이론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저서는 직접민주주의가 최초의 제도화된 국가(commonwealth) 형태라는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 〈리바이어선〉과 대별되었다. 토머스 홉스에 따르면 개인간의 사회적 계약에 의하여 형성된 민주적 주권이 개인이나 소수에 권력을 넘김으로써 군주정치와 전제정치가 대두된다.

불행하게도 토머스 홉스는 당대의 입헌적 투쟁의 와중에서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파리로의 망명

1640년 영국 내의 정세가 악화되자 안전을 위해 파리로 이주한 토머스 홉스는 곧 영국의 다른 망명자들과 교제하기 시작했다.

토머스 홉스는 메르센의 모임에 재가입했으며, 데카르트의 저서 〈명상 Meditationes〉·〈굴절광학 Dioptrique〉에 대한 반박문을 집필했다. 저서 〈시민론〉에서는 〈법의 원리 The Elements of Law〉 2부의 내용을 더욱 자세히 논증하면서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상세하게 다루는 종교부문으로 끝을 맺고 있다. 홉스가 믿는 교회와 그리스도교 국가는 일체(一體)로서 그 정점은 바로 군주이다. 따라서 군주는 성서를 번역하고, 종교분쟁을 중재하며, 대중이 어떤 종교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결정할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토머스 홉스는 그뒤 4년 동안 광학(光學)의 연구와 〈물체론〉을 쓰는 데 전념했다. 1646년 나중에 찰스 2세가 된 웨일스의 왕자가 파리로 도피해오자 홉스는 그의 수학 선생 자리를 수락했다. 영국에서 온 망명자들과의 교제 때문에 자연철학 연구에만 전념할 수 없게 되자 홉스는 한 번 더 정치철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1647년 토머스 홉스는 〈시민론〉의 증보판을 발간했으며, 1651년에는 그 영역본을 발간했다. 1650년에는 〈법의 원리〉가 〈인간의 본성 Human Nature〉·〈정치조직에 대하여 De Corpore Politico〉의 2부작으로 발간되었다.

〈리바이어선〉

토머스 홉스는 대표적 저서인 〈리바이어선〉의 '인간에 관하여'와 '국가에 관하여'라는 2개의 장에서 초기의 사상을 수정했다.

또 '그리스도교 국가', '어둠의 왕국' 등 끝부분의 2개의 장에서는 성서의 토론을 다루고 있으며, 군주의 권능에 도전하려는 로마 가톨릭과 장로교회에 강한 비판을 가했다. 사상가로서의 토머스 홉스의 명성은 주로 인간철학에 대한 공헌에서 비롯된다. 홉스는 이를 통해 이기적인 심리이론을 제기했다. 홉스는 일반적으로 공리주의 학파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홉스는 '평화로운, 사회적인, 단란한 삶'이라는 완전히 세속적인 토대에 의한 도덕법칙에의 복종을 정당화했으나 한편으로는 자연법칙을 신의 명령이라고 주장했다.

토머스 홉스는 정치이론에서 처음으로 평화와 안전의 필수적 조건을 분석하고 사회계약이론을 통해 이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되는 이상국가 건설의 방책을 제시했다. 홉스의 근본개념은 자연법이라기 보다는 본질적으로 자기보존의 권리를 의미하는 자연권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의 안전에 해가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되면 어느 누구도 자연법에 따라 행동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연법이 준수되지 않는다면 평화는 달성될 수 없다. 홉스의 해결책은 개인을 보호하기에 충분한 권력을 창출함으로써 만인에게 타인의 선행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선택된 몇몇 사람들이 전체의 평화와 보호를 위해 요구하는 명령이 모든 개인에 의해 수행될 때 이러한 권력이 창출될 수 있다. 이리하여 옹립된 군주는 모든 신민들이 그를 폐위하려 해도 존속할 수 있다(주권). 군주의 권력과 권한은 절대적이며, 그는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이는 신민들에게 부당한 것이 아니며, 또한 신민들과의 계약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다.

1651년 찰스 1세가 죽은 뒤 왕당파 운동은 희망이 전혀 없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이에 따라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선〉의 말미에서 새로운 군주에게 합법적으로 복종할 수 있는 조건을 정의하려 했다. 홉스는 자신을 더이상 보호해 줄 수 없는 군주를 폐위하고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는 신민의 권리를 주장했다(인권). 그러나 〈리바이어선〉의 이러한 견해는 찰스 왕자 고문들의 노여움을 샀다.

이들은 토머스 홉스가 영국으로 귀향하기 위해 새로운 정권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망명지에 갇혀 있는 데다 교황에 대한 공격으로 프랑스 당국의 감시를 받던 홉스는 파리 생활이 견디기 힘들었다. 홉스는 1651년말 영국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정권과 화해했다.

논쟁

영국으로 돌아온 이즈음에 토머스 홉스는 나이가 63세였으나 그후 25년 이상 더 살았다.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선〉의 출간으로 인해 옥스퍼드대학교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는 〈리바이어선〉이 여전히 교황을 신봉하고 구래의 학문에 집착하여 사회적 악폐가 되었던 옥스퍼드대학교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옥스퍼드대학교 측은 1655년에 발간된 〈물체론〉을 홉스를 비판하는 데 좋은 기회로 삼았다.

토머스 홉스는 갈릴레오의 역학에 관한 업적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

토머스 홉스는 만물과 감각 자체를 신체의 운동의 원리로 설명하려고 했다. 따라서 자연철학에 대한 홉스의 선험적인 접근법은 경험적 귀납법을 옹호한 베이컨과는 대치되는 것이었다. 홉스의 이러한 기계적 형이상학에 반대한 사람들은 천문학교수인 세스 워드와 〈산술적 무한대 Arithmetica Infinitorum〉의 저자 존 월리스로서 두 사람은 홉스보다 뛰어난 수학자였다.

토머스 홉스는 저서 〈옥스퍼드대학교의 수학교수에 대한 여섯 강의 Six Lessons to the Professors of Mathematics in the University of Oxford〉(1656)를 통해 그들의 반론에 답했다. 1660년 봄 홉스는 대화체의 저서 속에서 수학적 분석의 새로운 방법에 대해 맹렬히 비판했다. 홉스는 저서 〈물리학에 대한 대화 Dialogus Physicus, sive de Natura Aeris〉(1661)에서 당시 〈물체론〉의 연역적 방법에 반대하여 경험적 연구를 중시하던 왕립학회(1660)의 로버트 보일과 월리스의 다른 친구들을 맹렬히 비판했다.

월리스는 신랄하고 지독한 풍자로 이에 대응했다. 그는 토머스 홉스가 청교도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의 후원 아래 〈리바이어선〉을 집필했으며, 왕을 저버렸다고 비난했다. 홉스는 〈홉스의 충성심·종교·명예·예의에 대하여 Mr. Hobbes Considered in His Loyalty, Religion, Reputation, and Manners〉(1662)라는 제목의 월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러한 비난에 답했다. 훌륭한 전기적 가치가 있는 이 글에서 홉스는 자신과 월리스의 '반란기 동안의 조그만 이야기……'에 대하여 논했다.

이 비판이 매우 주효했기 때문에 월리스는 이에 응수하지 못했다.

이후 시작된 토머스 홉스의 논쟁활동의 3기는 그가 90세가 되던 해까지 계속되었다. 홉스의 〈원리와 기하학적 추론에 관하여 De Principiis et Ratiocinatione Geometrarum〉(1666)는 기하학자들의 저작이 불명료하고, 오류 투성이임을 증명함으로써 그들을 비판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저서 〈원의 면적, 구의 부피, 입방체의 제곱 Quadratura Circuli, Cubatio Sphaerae, Duplicatio Cubi〉(1669)에서 토머스 홉스는 기하학의 논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지만 이는 즉각 월리스에 의해 논박되었다. 1678년 홉스의 마지막 저서인〈생리학에 대한 10가지 질문 Decameron Physiologicum〉이 출간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생리학적 문제에 대해 문답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왕정복고기

1660년부터 왕정복고기 동안 토머스 홉스는 다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예전에 토머스 홉스에게 수학을 배웠던 찰스 2세가 기꺼이 그를 초빙했던 것이다. 홉스가 궁정에 나타나자 주교들과 대법관들은 분개할 수밖에 없었지만 왕은 홉스의 기지를 좋아했다. 왕은 홉스에게 1년에 100파운드의 연금을 지급했으며, 홉스의 초상화를 궁정에 걸도록 지시했다. 1666년 하원이 무신론과 불경죄에 대한 법을 제정하자 홉스의 처지가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법을 논의하는 위원회는 〈리바이어선〉을 조사하기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무렵 80세에 접어든 홉스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이단성 여부에 관한 심문을 받게 할 만한 논문들을 모두 소각해버렸다.

그에 대한 심문 결과는 3편의 짧은 대화록과 〈이단과 처벌에 관한 역사적 서술에 대하여 An Historical Narration Concerning Heresy and the Punishment Thereof〉(1680)라는 소책자에 담겨 있다. 이 글에서 토머스 홉스는 고등법원의 폐지 이후 이단을 심판할 수 있는 법정은 존재하지 않으며, 니케아 신경(信經)에 모순될 때를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이단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의회가 무신론에 대한 법안을 철회했으나 토머스 홉스는 그뒤로도 인간행위에 관계되는 주제를 담은 책의 출판을 금지당했는데, 그에 대한 새로운 반감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찰스 2세가 그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말년의 홉스와 역사적 영향

토머스 홉스는 국내에서는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해외에서 그만큼 평판이 높은 영국의 사상가도 없었다.

영국을 방문하는 저명인사들은 항상 지적인 능력과 신선함이 소진되지 않는 토머스 홉스에게 존경을 금치못했다. 말년에 홉스는 청년기의 고전 연구로 돌아가면서 큰 즐거움을 누렸다. 홉스가 84세 되던 해에 유쾌한 유머, 비애, 숭고한 자족감 등을 담은 라틴어 자서전이 출간되었다. 1675년 홉스는 〈서사시의 미덕에 관하여 Concerning the Virtues of an Heroic Poem〉라는 생동감 넘치는 서문이 실린 〈오디세이아 Odyssey〉를 투박한 영시의 운율에 맞추어 번역했다.

다음해에는 〈일리아스 Iliad〉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죽기 4개월 전까지도 토머스 홉스는 출판업자들에게 무언가를 영역해줄 것을 약속할 정도였다.

토머스 홉스는 형이상학의 대가였을 뿐 아니라 언어에 대한 생동하는 관심과 언어의 덫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비판철학자였다. 홉스는 스콜라 철학의 불합리성을 지적함으로써 근대 논리분석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오랫동안 영국의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여겨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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