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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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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628 |
국적 | 페르시아 |
요약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말기의 왕(590~628 재위).
(그). Chosroes Ⅱ. (아). Kisrā Ⅱ. Khosrow는 Khosrau, Khosru, Khusrau라고도 씀. 별칭은 Khosrow Parvīz(페르시아어로 '승리자 호스로우'라는 뜻).
목차
접기개요
치세중 사산 제국을 최대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비잔틴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왕실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폐위·처형당했다.
제국의 확장
호르미즈드 4세의 아들 호스로우는 혼란기인 590년에 왕이 되었다.
호르미즈드의 장군 바람 쿠빈은 라지카에서 비잔틴 군대에게 패한 뒤에 공개석상에서 국왕에게 모욕당했다. 왕의 암살로까지 치달은 보스탐과 빈도에(호르미즈드의 매형들)의 궁정반란중에 바람 쿠빈은 왕에 대한 그의 군대의 충성서약을 철회했다. 새 왕 호스로우는 부득이 메소포타미아로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다. 호스로우의 추격자들은 그의 삼촌 빈도에의 군사전술로 더 추격하지 못했고 마침내 비잔틴 황제 마우리키우스가 호스로우에게 군대를 보내어 그의 적대자를 패배시켰다.
바람 쿠빈은 후에 암살당했다(비잔틴 제국).
불안정하고 인기 없는 호스로우는 자신이 의존했던 빈도에를 포함하여 아버지의 살해와 관련된 사람들을 제거했다. 그는 비잔틴 군단으로 형성된 호위병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할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르메니아에 비잔틴 사람들이 들어오는 데 대해 분개했다.
마우리키우스가 살해되고(602) 포카스가 비잔틴 황제로 즉위한 것을 구실로 이용하고 또 비잔틴 군을 지휘하여 호스로우를 왕위에 올린 나르케스가 포카스를 승인하지 않는 사실에 용기를 얻어 호스로우의 군대는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침입했다. 메소포타미아의 비잔틴 군대는 나약하여 다라·아미다·에데사는 곧 함락되었다(604). 호스로우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히에라폴리스와 베로이아(알레포)를 점령했다.
내부의 불화로 인해 동부 비잔틴 지역은 쉽게 정복되었고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 중앙부도 페르시아군에게 짓밟혔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항구적으로 점령당하여 통치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610년 헤라클리우스가 황제가 되어 화평을 요청했을 때까지 페르시아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613년 호스로우의 가장 뛰어난 장군 샤르바라즈는 메소포타미아를 다시 침공했다.
다마스쿠스가 그해에 점령되었고 614년 예루살렘도 함락되었다. 그는 예수의 성묘를 파괴하고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를 크테시폰까지 옮겨왔다.
호스로우 자신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대했지만 샤르바라즈는 수천 명의 그리스도교 포로가 유대교 지원군에 의해 고문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616년 알렉산드리아가 점령되었고 617년 호스로우의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인 샤힌에게 오랫동안 포위되어 있던 칼케돈(비잔티움 반대편)이 페르시아군에게 마침내 함락되었다.
승승장구하던 페르시아인의 기세는 헤라클리우스가 622~627년에 세운 몇 차례의 화려한 전공으로 반전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해상권을 장악한 후 이수스로 진출하여 아르메니아 경계선 근처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패주시켰다. 카프카스 산맥 북쪽 하자르 왕국과 동맹한 그는 623년 다시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며, 칸자카 근처에서 페르시아 왕의 군대와 싸워 이겼다.
이 도시와 배화교 사원은 전통적으로 조로아스터교에 관련된 우르미아 호에 있는 사원 등과 함께 파괴되었다. 624, 625년에는 북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전투가 벌어져 결국 사라스 강가에 있던 샤르바라즈의 군대가 퇴각했다(팔레스타인).
호스로우는 626년에 군대를 집결시켜 그당시 비잔티움과 사이가 좋지 않던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어, 한편으로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헤라클리우스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샤힌이 패배했다. 또 한 군대는 628년 헤라클리우스가 크테시폰 북쪽 113km에 위한 왕의 도읍지 다스타기르드를 급습해 선수를 빼앗겼다. 니네베 근처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지만 비잔틴 군대가 다스타기르드에 다시 접근하자 호스로우는 도망갔다. 샤르바라즈의 도움을 요청하는 그의 편지를 비잔틴 군대가 중간에서 가로채 재원이 크게 고갈되었지만 그는 평화조약을 거절했다. 호스로우는 권위도 실추된데다 병까지 났다. 궁정반란이 일어나 샤르바라즈가 처형되고 샤힌의 시체가 모독되었다.
호스로우에게도 사형선고가 내려져 집행되었으며(628) 그의 막내 아들이며 세자인 마라단샤는 그의 눈앞에서 살해당했다. 맏아들 카바드(코바드) 2세 셰로에가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문화적·경제적 영향
호스로우는 예술을 크게 후원했다.
그의 재임기간 중 은세공과 카펫 직조가 최고의 수준에 다다랐다. 정원을 구도로 한 거창한 카펫 '호스로우의 봄'이 여러 사료에 언급되어 있다. 파리의 프랑스 독립도서관에 있는 화려한 은접시에는 호스로우로 여겨지는 왕이 전통적인 사산 왕조의 사냥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타크에보스탄(케르만샤)에 있는 석굴들을 호스로우 2세 시대의 것으로 보고 그것들을 그의 재위기간이 암석조각의 부활기였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내세웠다.
여기에는 왕의 사냥하는 모습과 하프를 켜는 사람들을 향해 꼼짝하지 않고 듣고 있는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특히 하프를 듣는 모습은 유명한 음악가 바르바드와 사르카시가 호스로우의 궁궐에서 생활했던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당시의 건축물은 주로 카스르에시린(하나킨 근처)과 하우스크쿠리 근처의 거대한 이미라트 에 호스로우 궁궐 유적지에 의해 알려졌다.
지방의 궁전으로는 요르단의 카스르 알 무샤타가 있다.
호스로우는 노획물과 세금으로 수천 마리의 코끼리·낙타·말 및 많은 여자들을 거두어들여 거대한 부를 얻게 되었다. 아랍의 역사가 앗 타바리(9세기 활동)는 가단주금과 석면 냅킨 외에 루비로 다리를 받친 황금옥좌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광범위한 무역망과 개인재산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번영했다는 증거는 없다.
많은 세금과 전쟁으로 인한 사회불안은 상인계급에게 불리한 여건으로 작용했다. 무관 귀족계급의 출현으로 인해 호스로우 2세의 왕권이 약화되었고, 그의 행정개혁과 중앙집권으로 지방왕조들과 그들의 봉건 군사력이 제거되었으므로 그가 죽은 지 12년 후에 침략해온 아랍족에 대해 대항하지 못했다. 이미 611년에 아랍족은 두카르에서 사산 왕조의 군대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라크 서부의 라흠 왕조와 시리아의 가산 왕조 등 그리스도교 아랍국이 호스로우 2세에 의해 파멸된 것도 이란이 아랍족의 공격에 노출하게 된 주요요인이 되었다.
아르메니아인 그리스도교도 아내에 대한 호스로우의 애정이 12세기 시인 네자미의 〈호스로우와 시린 Khosrow-va-Shῑrῑn〉을 비롯해 여러 시인들의 시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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