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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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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서양 칠보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최초의 칠보는 BC 13~11세기에 걸쳐 미케네인의 금속공예품에서 발견된다(미케네 문명). 미케네인의 무덤에서 나온 6개의 반지(키프로스 코우클리아에서 발굴)는 상감과 칠보의 중간단계로 각 칠보색은 소성되기 전에 가루의 형태가 아니고 색유리 파편이었음을 보여주는 유선칠보 기법으로 장식되었다.

그외의 오래된 칠보는 BC 9~7세기로 추정되고 있는 카프카스 지방의 쿠반에서 발견된 것으로, 그리핀(griffin:독수리 머리와 날개 달린 사자 몸통이 합쳐진 상상의 동물)이 말을 공격하는 장면을 묘사한 마이코프 허리띠 장식이 특징이다. 좀더 초기의 유선칠보장식으로 현존하는 것은 서유럽의 청동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과학적으로 실험되고 상감된 산호, 연마된 돌(주로 라피스·라글리), 또는 색유리 등과 구별되는 진짜 칠보로 보기는 어렵다.

BC 3세기에 남러시아와 켈트의 공예가가 칠보작업을 했으리라 짐작되지만 만약 더 이른 시기라면, 산호 상감 대신 적(赤)칠보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로마 시대의 칠보는 유선칠보와 조금칠보로 청동에 입혀진 것으로 고대 켈트 지역에서 거의 만들어졌다. 켈트식 칠보양식은 적어도 12세기말까지 북부 유럽, 특히 아일랜드에서 주로 제작되었다.

중세

비잔틴 시대의 칠보는 6~12세기에 극적인 발전을 했다.

가장 절정을 이루었던 10~11세기의 비잔틴 칠보공예가는 보석같이 빛나는 색상으로 세밀화를 섬세하고 밀도있게 표현했으며 이 시기의 걸작은 1105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팔라 도로 Pala d'Oro〉(베네치아 산마르크 성당)이다. 비잔틴 칠보는 12세기말부터 쇠퇴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칠보가 제조되었다는 확증은 없다.

그러나 비잔틴의 금제 유선칠보가 7세기 이전에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시리아 문화와 연류된 유물을 그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이 유물은 1114~44년에 집권했던 아르투키드 왕자의 업적을 아랍어로 기록한 명문(銘文)이 들어 있는 접시로서 이슬람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 접시는 유선칠보 기법으로 제작되었으나 동제 바탕에 청동선이 땜질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접시에 씌어 있는 명문이 정확한 아랍어가 아닌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슬람권에서 유선칠보가 있었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

서유럽에서 7세기초 비잔틴 칠보는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롬바르디아 공예가들에 의해서 복제되었으며, 후에는 시칠리아와 다른 이탈리아 지역에서도 복제되었다고 한다.

9세기 영국 앨프레드 대왕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유명한 앨프레드 장신구는 비잔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오토 황제 시대에는 금제 유선칠보가 프랑스 동부에서 성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에센의 금세공가들과 트리어의 에그버트 대주교(937~993)의 공방에서 유선칠보가 주로 만들어졌다.

유선칠보는 12세기에 들어오면서 서유럽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구리와 청동 같은 금속 바탕에 구워지는 조금칠보 기법이 선호되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칠보 기법은 먼저 스페인에서 시도되었고 이어 라인 강과 뫼즈 계곡, 그리고 프랑스의 리모주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12세기 중엽 이들 지역 및 영국의 칠보 공예가는 로마네스크풍의 예술적 표현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모산 파는 12세기 유명한 공예가인 고드프루아 드 클레르와 베르됭의 니콜라 등과 함께 전에 없었던 특색 있는 조금칠보 작업을 했다.

가장 뛰어난 작품은 12~13세기 리모주에서 만들어져 상품화되었으나 13~14세기에 걸쳐 제품의 질이 서서히 떨어졌다.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금·은제 기물은 새로운 기법인 투태칠보로 다시 장식되었다. 이 기법은 1290년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후부터 이탈리아의 금세공가들, 특히 시에나와 피렌체의 장인들은 이 기법으로 그림 등의 걸작품을 만들었다.

투태칠보는 특히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성행했다. 1380년경 프랑스의 샤를 5세의 동생에 의해 제작된 '황실 금배'(대영박물관 소장)는 가장 뛰어난 투태칠보 작품으로 꼽힌다. 이 금배의 양 옆면과 뚜껑에는 당대 최고의 풍부한 색감과 정교한 솜씨로써 성 아그네스의 생애와 순교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투태칠보의 황금기는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막을 내렸지만 스페인과 독일 남부, 주로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17세기 중엽까지 인기를 누렸다.

15세기에서 현재까지

14세기말에서 15세기초의 금세공가들은 프랑스 궁정과 부르고뉴 궁정의 후원 아래 더욱 대담한 새로운 칠보를 고안했는데 그것은 반투명의 색상 칠보를 사용함으로써 스테인드 글라스의 효과를 살리는 성태칠보 기법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작품의 하나는 플랑드르 사람이 1430~40년경에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은도금이 된 메로드 큰 컵으로, 고딕형의 장식격자 무늬가 2개의 칠보안대로 장식되어 있다. 그외에 사용된 기법은 외곡도식칠보로서 큰 입체물과 작은 보석을 동시에 만들었다. 가장 정교하고 뛰어난 것으로 '가시면류관의 유물상자'(Reliquary of the Holy Thorn)가 있다. 보석이 박힌 가시 면류관은 최후의 심판 장면이 관 주위를 에워싸고 여기 그려진 20명은 칠보로 채색되어 있으며 대부분 환조로 장식되었다.

이와 같이 칠보로 장식된 금세공은 유럽의 궁전에 퍼졌으며, 고딕풍에서 르네상스풍에 이르기까지 그 제작 방식이 여러 번 변했지만 사치품으로서의 높은 수준은 계속 유지되었다. 국제적인 양식을 창조하는 데 기여한 많은 르네상스 금세공가들 가운데 오직 벤베누토 첼리니(1560경)만이 칠보에 대한 기술논문을 작성했다.

채유칠보는 1425~50년경에 부르고뉴 궁전을 장식하기 위하여 플랑드르 공예가들이 처음으로 받아들였으며, 1450~1500년 사이에 베네치아인과 북부 이탈리아의 칠보공예가들이 더욱 발전시켰다.

리모주 공방은 16세기에 들어와 채유칠보의 주도권을 잡았다(리모주 채색 에나멜). 이후 100년간 프랑스의 칠보 예술은 이 기법을 사용해 뛰어난 표현을 이루어 냈다. 때문에 우수한 리모주의 칠보공예가는 궁정의 후원을 받아가며 다른 공예가들과 함께 궁전의 방 치장을 완벽하게 했다.

그리세유 칠보는 1530~40년경에 이르러 뒤늦게 리모주에 소개되었다. 새로운 차원의 채유칠보가 1620~30년경에 프랑스 금세공가인 사토됭의 장 투탱과 블루아 등 의욕적인 공예가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흰 칠보 바탕에 채색칠보를 입혀 정교한 세밀화를 그리는 고도의 기술을 고안해내는 것이었다. 이 기법은 세밀초상화에 대한 당시의 열망에 부응했기 때문에 영국의 찰스 1세와 프랑스의 왕들은 장 프티토와 같은 탁월한 예술가를 고용해 이 기법으로 칠보를 제작하도록 했다.

채유칠보의 전사방법은 영국에서 발명되었고 1753~56년 런던의 배터시 공장에서 더욱 완숙해졌다(배터시 에나멜 도기). 디자인은 전사지에 의해 흰 칠보 바탕에 옮겨지고 채색칠보로 그려진 조각된 금속판을 그 위에 찍음으로써 칠보가 입혀지는 것이다.

17~18세기에 걸쳐 칠보공예가는 독일, 네덜란드 및 영국과 러시아의 섬세한 세밀화 기법을 칠보에 도입했다. 초기 칠보기법은 18세기에 금제 코담뱃갑을 만든 파리의 장인으로부터 20세기초의 샤를 파브르제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르네 랄리크 같은 아르 누보 장신구 작가, 조르주 브라크, 조르주 루오와 같은 현대화가 및 칠보공예를 계속 발전시켜 독창적인 효과로서 다량생산을 이끌었던 제르다 플록킹어 등 금세공가들에 의해 계속 사용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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