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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지도의 영어 이름인 map의 어원은 라틴어 마파(Mappa)에서 유래되었으며, 마파는 고대 카르타고에서 '신호용 천'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지도제작은 자신의 거주지역과 그 주변지역에 대한 지리적 지식을 문자 대신 그림으로 표현했던 문맹의 미개사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태평양상의 마셜 군도 원주민들은 야자잎줄기에 작은 돌이나 조가비를 달아서 섬의 위치, 해류·파도의 방향 등을 표시한 지도를 제작했다. 작은 돌이나 조가비는 섬이나 환초를 나타내며 직사각형으로 엮은 야자의 잎줄기는 지도의 테두리와 뼈대를, 사선이나 반원인 것은 해류의 방향을 나타낸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잦은 홍수로 인해 변경되는 경작지의 경계를 정확히 하고 조세(租稅) 공납을 위해 현대의 지적도와 같은 측량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점토에 그려진 BC 1300년경 누비아 지방의 금광안내지도(金鑛案內地圖)뿐이다.
사르곤 대왕의 원정 이야기를 기록한 BC 700년경의 점토판 지도는 바빌로니아의 지도 중 현존하는 최고의 세계지도인데 원과 직선으로 그려졌다. 2개의 큰 원 중에 안쪽의 것은 육지를, 바깥쪽의 것은 육지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를 나타낸 것으로 당시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바빌로니아인들의 세계관을 이어받은 히브리인들도 지도를 갖고 있었는데 그들은 세계의 중심을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지도
그리스의 아낙시만드로스(BC 610~546)는 최초의 세계지도를 만들었으며, 헤카타이오스(BC 550경)는 그의 지도를 수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세계원정은 그리스인들의 지리적 지식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점차 지구구형설(地球球形說)이 확립되었다. 지구의 크기를 측정한 에라토스테네스(BC 273~192)는 처음으로 지도에 경·위선을 표시했고, 그의 세계지도에는 인도·영국·아일랜드가 포함되었다.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90~168)는 지구의 둘레를 360°로 등분한 경·위선망을 설정하고, 원추도법에 유사한 지도투영법으로 제작한 세계지도를 그의 저서 〈지리학 안내 Geographike hiphgesis〉에 실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둘레값보다 적게 추정된 포세이도니오스의 자료에 기초했기 때문에, 특히 미지의 지역 부분이 실제보다 매우 작게 표현되어 후에 콜럼버스의 항해에 영향을 미쳤다. 프톨레마이오스에서 절정을 이룬 그리스인들의 업적은 로마인들에게는 계승되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당시 포이팅거 지도(Peutinger Table)로 불린 도로지도를 통해 로마인의 실용주의를 엿볼 수 있으며, 여기에는 로마 제국 영토 내의 도로, 도시, 역, 군 주둔지 등이 거리와 함께 표시되어 있다.
동서방향으로 심하게 변형되어 있어서 엄밀한 의미의 지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서양 지도학의 여명
중세 후반 십자군 원정 이후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상업과 해상 활동의 활발한 전개와 중국의 나침반 소개(12세기), 항해술·조선술의 발달은 지도의 발달에 새로운 전환기를 가져왔다.
항해시 나침반의 사용은 〈포르톨라노 해도 Portolano Chart〉라는 지중해 중심의 해도를 등장시켰고, 이는 지리상의 발견시대에 이르기까지 해도로서 널리 이용되었다(→ 색인:항해도). 이 지도는 해안선의 윤곽이 뚜렷하고, 해안선을 따라 지명이 조밀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방위선이 방사상으로 그려져 있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사조가 대두됨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서가 라틴어로 번역되고(1406), 그의 세계지도는 권위 있는 지도로서 오랫동안 명성을 누렸다. 포르투갈의 디아스(1450~1500)가 희망봉을 발견하는 일련의 지리적 발견을 통해 세계지도는 수정과 보완을 거듭했으나, 1492년에 제작된 베하임(1459~1507)의 지구의에서 보여지듯 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은 지속되었다.
이 지구의에는 유럽의 서쪽에 중국이 그려져 있는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무렵 유럽인들이 생각했던 세계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중세의 지도
중세의 폐쇄적인 봉건사회에서는 지역간의 교역과 문화적 교류가 중단되고, 성서의 기록만이 진리인 것으로 간주되는 암흑시대였다.
중세의 대표적 지도인 〈TO 지도〉는 지도라기보다는 종교서적의 장식용이라 할 수 있다. 이 지도는 중세의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서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환상의 바다와 지중해, 나일 강, 돈 강에 의해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대륙이 3분되어 있어 마치 T자와 O자를 결합한 것처럼 보인다. 지도의 중심에는 예루살렘이 자리잡고 있고, 낙원이 있다는 동쪽이 위에 자리한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지리학이나 프톨레마이오스 세계지도의 전통은 중세 유럽에서는 사라졌지만 아랍인들에게 전해져 이들이 천문학·의학·지리학 등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와 지리서를 아랍어로 번역하여 보전했는데, 12세기에 제작된 알 이드리시(1100~65/66)의 세계지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아시아 지역의 지리적 지식을 축적해 지도에 반영했다.
이슬람의 세계지도에는 육지의 형상, 산맥, 하천의 배열, 아시아 지역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지리상의 발견시대와 지도학의 부흥
유럽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육지가 지구 표면의 약 2/3를 덮고 있다고 생각했던 콜럼버스는 대서양 횡단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의 대서양 횡단은 대항해시대를 열었고, 마젤란(1480~1521)의 세계일주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한 탐험과 발견을 통해 수륙분포와 육지의 윤곽이 알려졌다. 지리상의 발견시대 초기의 지도학자인 네덜란드의 메르카토르(1512~94)는 세계지도를 만들면서(1538)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알려진 투영법을 고안했다(1569). 이 도법은 지도상의 임의의 항정선(航程線) 또는 방위선을 직선으로 나타내고 방위각이 항상 타각(舵角)이 되도록 고안된 것인데, 이는 시대적 필요성에 부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이 투영법은 해도로서는 가장 적합한 도법으로 쓰이고 있으며, 세계벽지도에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근대지도의 성립
프랑스에서도 상송(1600~67)과 그 후계자들에 의해 지도와 지도책이 많이 출판되었는데, 네덜란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점차 프랑스가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18세기에는 지도학의 발달을 주도하게 되었다. 지도 제작은 프랑스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카시니(1625~1712) 가문에 의해 주도되었다. 프랑스 학술원은 적도 부근의 페루와 북위 60° 부근의 라플란드에서 경도 1°의 길이를 측정하여 지구의 극반경이 적도반경보다 짧은 편평타원체(扁平楕圓體)라는 사실을 밝혔다.
또한 삼각측량(1740~44)에 의한 프랑스의 대축척지도인 축척 1/86,400의 지도형을 제작했다(1747~1818). 이 지도는 최초의 과학적인 근대지도로서 표현방법에서도 각종 기호를 사용하는 등 현대 지도의 원형으로 간주된다.
해리슨이 크로노미터를 발명한 이후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자 18세기 중엽부터는 3각측량과 수준측량을 기초로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당시의 지도는 경사가 급한 곳만 우모(羽毛)로 표시했으므로 기복 표현방법에서는 오늘날에 비해 뒤떨어졌다.
이 방법은 기복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어 19세기 후반부터 등고선식 기복 표현법이 사용되었다(→ 색인:등고선도법). 등고선식 표현법은 18세기 전반에 선박 항해를 위한 국지적인 수심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육상에서는 18세기말부터 사용되었다. 19세기에는 육지의 윤곽이 거의 정확하게 그려졌고, 대륙 내부도 많은 탐험으로 공백이 메워졌다. 또한 인쇄술이 발달함에 따라 지도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지도책들도 출판되었다.
20세기에는 양극지방의 탐험이 활발해지면서 세계의 윤곽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고도로 발달된 항공사진측량기술, 20세기 후반의 원격탐사(remote sensing) 기법 등이 지도제작에 이용되어 오늘날에는 지형도를 비롯한 각종 지도들이 대량으로 신속·정확하게 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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