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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회화의 역사는 질그릇에 물감을 칠해 그린 때부터만 해도 4,000년이나 되며, 이름 있는 화가가 남긴 그림만 해도 약 1,600년이 된다. 중국회화의 형식과 내용이 현격하게 풍부해진 당대 이후 관념적인 조형은 '대상의 이상화'로서 작용하며, 자연적 조형은 자연주의의 표현으로 치환할 수 있는 조형현상이 되었다.
중당에 흥성한 수묵화는 중국회화의 전통적인 선묘형식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뚜렷하게 변용시킨 데서 성립하며, 명말의 직업화가 가운데 다수가 문인화가적인 성향을 지향했던 것은 자연주의적 조형보다도 관념적·환상적 자연경치의 재현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디까지나 자연대상의 이상화라는 이념이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의 조화를 최상의 조형활동으로 생각하는 자에게는 매우 파행적인 회화로 다루어지고 있다.
중국회화, 특히 산수화는 숙명적으로 비자연주의적인 조형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림을 배우고 연습하는 과정에서 이전의 작품과 과거의 명품을 모사하는 것이 선행했던 까닭이다. 남제(南齊)의 사혁은 회화 제작의 기본이념으로서 6가지 원칙을 생각해냈는데, 그중 하나가 '전모이사'이다(→ 사혁). 이 글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지만, '옛 그림을 모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이것은 기법의 습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화가의 제작을 규제하여 작품의 유형화를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것을 타파하고 자신의 표현의지와 묘사기법을 찾아내는 것은 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산수화는 대부분 현실에서 보여지는 자연과 전혀 비슷하지 않게 되었다.
화가는 자신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조형의욕을 단적으로 화폭에 표현하고 싶어한다. 다른 한편 화가들은 초상화로 대표되듯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그려야만 하는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같은 경우에도 중국의 화가는 단순히 얼굴 모습이 비슷한 것만을 추구하지는 않았으며, 늘 인간 전체 또는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표현을 문제로 삼았다(→ 인물).
날카로운 대상 관찰과 깊이 파고드는 사실성은 단순히 초상화 분야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산수화가 역시 광활한 중국의 명산과 대천을 편력했지만 자연을 그대로 화폭에 재현시키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묘사형식의 제약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현실의 자연을 더욱 미화시키고 이상적인 산수화를 제작할 숙명을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경관과 괴리되지 않은 채, 이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화된 자연을 화폭에 재현시키는 것을 회화 창작의 최종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중국회화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유럽 미술의 인상주의나 표현주의 같은 운동이 없었으며, 추상적인 표현법도 흥성하지 못했다. 늘 자연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박한 사실주의가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관적·주의적인 창작태도를 제1의 의로 삼았던 수묵화의 범주로도 이해할 수 없는 표현활동이 활발했던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원대의 회화표현에서 이같은 현상을 찾을 수 있다. 당시의 산수화는 결코 이상주의나 자연주의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묵과 색채의 대비라든가 다양한 묘선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구조 또는 율동감의 강조 등으로 감상자의 시각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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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중국회화의 조형이념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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