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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에서 18세기말까지 서양의 실내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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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는 옛 고전 양식의 부흥운동이며 이것을 공정하게 평가한다면 고딕 시대라는 단절기가 경과한 후에 일어난 서양예술 본류로의 복귀였다.

그렇지만 로마 제국의 몰락과 르네상스 사이에는 1,000년이라는 세월이 가로놓여 있었으며,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이 로마의 고전 양식과 닮은 정도는 현대의 이탈리아어가 라틴어와 닮은 정도와 같은 것이다. 둘은 비슷하지만 결코 같은 것은 아니다. 다만 역점을 두는 곳이 달라졌을 뿐 르네상스는 로마의 장식용어를 다시 쓰게 했다. 특히 고전적인 기둥 양식(기둥이 주초·주신·주두와 엔타블레이처로 되어 있는 양식)이 채용되고 새로운 건축 양식에 맞추어 수정되었다.

건축가들은 공간처리가 고도로 숙달되었으며, 장식은 공간효과를 고전 양식으로 명확히 밝히고 풍성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6세기로 접어들면서 부흥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는 수정되기 시작했고, 결국 그 양식은 뚜렷이 서로 다른 두 분야로 갈라졌다. 하나는 전통을 충실히 지키는 길이었다.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고대 로마의 작품들을 모델로 삼았으며, BC 1세기에 비트루비우스가 10권으로 된 자신의 저서 〈건축에 관하여 De architectura〉를 통해 제시한 비례의 법칙에 따라 설계를 했다.

다른 하나는 미켈란젤로가 시작한 마니에리스모(manierismo)를 거쳐 바로크 양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마니에리스모와 바로크 양식은 다같이 과장된 형태로 전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의 엄격한 논리와 정밀성을 배격했으며, 자유롭고 활달한 움직임의 느낌을 전달하고 설계라는 드라마에 관객을 포함시키는 데 목표를 두었다.

바로크는 반(反)종교개혁의 양식이었으며, 개신교의 금욕적인 교리와 대조적인 예수회가 가톨릭 교회의 속권(俗權)과 풍요의 표현수단으로 이용했다.

바로크 양식의 연극풍(演劇風)은 곧 군주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들은 자기들이 짓는 궁전을 이 양식으로 꾸미기를 원했다. 기본적인 기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기법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의 제약은 대담한 연극적인 효과와 모델링의 관능적인 화려함 속에서 모두 사라졌다. 벽은 만곡(彎曲)되고, 박공은 끊어졌으며(즉 중앙부가 빠졌음), 기둥과 붙임기둥은 건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꼬아졌다.

이러한 양식이 이탈리아로부터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각 나라나 지방의 취향과 재능에 따라 다양하게 흡수되고 첨가되었다.

프랑스

15세기 중엽 이탈리아로부터 들어온 양식이 프랑스 건물들의 외관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서서히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고딕 양식의 디자인 위에 장식의 세부를 덧붙이는 정도에서 점차 전체의 대칭과 규칙성으로 확대되었다(문장학). 프랑스 르네상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근본적인 차이의 하나는 후자에서는 양식의 혁명 시작부터 전체적인 디자인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권력의 중앙집중과 프랑스 궁중 생활의 호사는 이미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와 장인들을 후원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프랑수아 1세(1515~47)의 치하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교회 건축의 필요는 위대한 고딕 건축 시대에 이미 충족되었기 때문에, 왕과 그의 봉신들은 장엄한 외관을 자랑하는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성곽들을 서로 다투어 짓기 시작했다. 건축용 석재와 목재는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석공과 목수들은 그것들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17세기초와 루이 14세의 오랜 재위기간(1643~1715)에는 의식(儀式)과 장엄한 분위기가 궁중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정교하게 장식된 일련의 큰 방들은 왕과 그의 조신들에게 호화로운 배경을 조성해주었다(루이 14세 양식). 특히 바로크 양식은 이러한 화려하고 당당한 느낌을 표현하기에 아주 적격이었다.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St. Nicholas Church)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

ⓒ Wolfgang Sauber / wikipedia | CC BY-SA 3.0

17세기 중엽에 건축되어 널리 모방된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궁중의 실내장식과 장치 양식을 낳았으며 이 궁전은 프랑스의 영광과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습 군주인 루이 14세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건립된 본보기였다.

18세기 중엽의 공상적이고 섬세한 로코코 양식은 바로크 양식에서 파생된 것이다.

바이에른 대성당(Bavaria cathedral)

로코코 양식으로 지은 바이에른 대성당

ⓒ Johannes Böckh & Thomas Mirtsch / wikipedia | CC BY-SA 3.0

바로코 양식이 부담스러운 제약에서 탈피했다고는 해도 고전적인 대칭 관념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18세기 초반까지는 수직으로 분할된 물체는 서로가 상대의 거울상이 되는 2개의 반부(半部)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남이 없었다. 그러나 곧 비대칭이 동시대의 장식에서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가 되었고, 그것이 로코코 양식의 중요한 일면이 되었다. 더불어 비대칭으로의 전환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비대칭의 디자인을 가진 수입된 동양자기였다.

로코코 양식의 특색은 꽃 장식과 곡선에 있으며, 가구의 다리는 우아하게 굽은 모양이었고 윗부분에 뱀의 형상을 장식했다. 로코코 양식이 끝나는 시점은 쉽게 알 수 있는데, 이 양식이 끝나는 시기에 의자의 다리가 금방 똑바르게 되기 때문이다. 로코코 양식의 비대칭적인 꾸불꾸불한 선들은 동시대 영국의 양식(대칭적으로 배열한 직선·직각·원·타원의 절제된 장식)으로 서서히 대체되었다. 가볍고 세련된 쇠시리는 보존되고 장식의 형상들은 또다시 건축의 틀에 의해 제한을 받게 되었다.

스페인

스페인에서는 무어인의 영향이 그후에 들어온 서양의 고전 양식과 혼합되어 장식 디자인에서 독특한 멋을 창출했는데, 이것을 무데하르 양식(12~17세기경)이라 하며 혼합된 그리스도교인과 아랍인들의 관념이 낳은 초기의 산물이다.

신세계를 발견한 뒤 스페인은 멕시코와 페루로부터 재화를 무제한 끌어들임으로써 16세기의 유럽 제국에서 우위를 점하는 스페인의 시대가 되었다. 건축이 장려된 그 시기는 르네상스의 사상이 유럽 전역에 보급되는 것과 때를 같이했다. 이탈리아 장인들의 영향은 귀금속이 풍부한 것과 합세하여 플라테레스크('은세공사 같은'이라는 뜻) 양식의 발전을 촉진했다. 그후 호세 베니토 추리게라의 영향하에 추리게라 양식이 스페인 특유의 양식이 되어 화려한 다색화법을 쓰면서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느낌을 표현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 스텔라 성당(Santiago de Compostela Cathedral)

추리게라 양식으로 지어진 산티아고 데 콤포 스텔라 성당

ⓒ Luis Miguel Bugallo Sánchez / wikipedia | CC BY-SA 3.0

18세기말에는 지방양식이 바로크 양식과 오래된 형태를 계속 통합하는 가운데 신고전주의 운동이 어느 정도의 발판을 획득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영향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퍼진 후 벨기에네덜란드로 침투하기 시작하여 독일 연방의 여러 나라에 이른 후 마침내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에서 사라졌다.

저지대 국가들과 북부 독일에서는 16세기의 르네상스 장식이 완전히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개작되었다. 후기 바로크 양식과 18세기의 취향은 특히 벨기에에서 프랑스의 모델들로부터 모방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16세기 후반에 독립을 달성한 후 그들의 장식을 보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발전시켰다. 독일에서도 전반적인 추세는 비슷했지만,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바로크와 로코코의 디자인에 새로운 자극과 개성이 주어졌다. 프랑스·네덜란드·영국의 혼합된 영향이 17세기 중엽에 스웨덴과 덴마크에 미쳤고, 러시아는 17세기말과 18세기에 외국의 디자이너와 양식들을 수입하여 표트르 대제와 그의 딸 옐리자베타, 그리고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서구화 운동의 영향하에 건축된 궁전들을 장식하게 했다.

영국

장미전쟁(1455~85)과 뒤이어 15세기말에 등극한 헨리 7세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봉건제도의 붕괴는 당시의 사회 구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결과 국내의 건물과 그 장식도 큰 영향을 받았다.

여건의 변화로 방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해졌으며, 큰 홀이 옥내 생활의 중심을 이루던 시절은 이제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부의 폭넓은 배분으로 수많은 시골 저택이 생겨났으며, 그후 400년 동안 영국인은 건축과 장식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이탈리아의 양식이 영국에 들어온 것은 16세기초였다. 그후 약 40년 동안 영국의 장인들은 낱낱의 이탈리아 장식 수법을 차용했고 종종 그것들을 전통적인 고딕 양식의 모티프들과 혼합했다. 16세기 후반기에는 로마와 단절된 결과 이탈리아 양식이 대부분 저지대 국가들과 독일의 뚜렷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대체되었다.

이탈리아 양식과 플랑드르 지방의 양식도 영국의 장인들에 의해 개작되고 어느 정도 중화되었으며, 그결과 영국 특유의 새로운 양식이 생겨났다(튜더 양식). 널찍한 침실과 긴 복도, 정교한 원통형의 천장, 가파르고 꺾임이 급한 중세식의 나선형 층계가 이 양식의 특징이었다. 그 직후에 고전적인 절제를 선호하는 풍조가 퍼졌다. 이무렵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고전주의 요소의 일부가 나타났지만 18세기가 될 때까지, 그리고 16세기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에게서 영향을 받은 팔라디오파(派)가 출현하기까지는 완숙하게 계발되지 않았다.

공화정 기간이 끝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바로크풍이 들어와 절제를 중시하는 고전주의와 융합하여 대조의 성공적인 균형을 이루었는데, 위대한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의 설계로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건축가의 영향이 주택의 외면으로부터 실내장식으로 확산되고 가구 자체의 디자인에까지 미침과 동시에 우수한 목세공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많은 실내장식이 프랑스 장식가들의 디자인에서 볼 수 있는 로카유(rocaille)라는 비대칭적 모티프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치장 벽토와 조각 장식의 디자인이 가벼워지면서 보다 몽상적이 되었다(치장회반죽세공). 시누아즈리(중국풍)가 되살아났고 탑, 중국 인형, 고드름과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그리고 색다른 나뭇잎과 새들이 로코코 양식의 절정을 이루었다.

야스나 고라 수도원(Jasna Góra Monastery)

치장 장식을 한 야스나 고라 수도원

ⓒ Skarabeusz / wikipedia | CC BY-SA 3.0

미국

영국에서 초기에 아메리카로 건너간 이주민들이 처음 마련한 집들은 기본 골격이 영국 남동부의 전통적인 작은 가옥을 모방한 것이었다.

뉴잉글랜드 남부의 집들은 건축 자재가 목재에서 벽돌과 석재로 바뀌어갔고 허드슨 강변 지방에서는 플랑드르 지방과 위그노 교도 출신 정착민들의 전통적인 오두막이 전형적인 농가가 되었다. 이무렵 벽돌로 지은 네덜란드식의 좁은 연립주택은 뉴암스테르담(나중에 뉴욕) 북쪽과 남쪽에 들어선 영국계 부락과는 다른 외관을 가졌고 버지니아와 남부에서는 제임스 1세 시대의 영주 저택과 유사한 식민지풍의 저택이 건립되었다.

이때까지 북부와 남부에서는 가옥 구조에 큰 차이가 없었다. 버지니아 북쪽에서는 1750년경까지도 대저택이 드물었고 남부에서는 대농장주들이 영국 조지 왕조의 초기 양식으로 된 영주 저택을 모방하여 지었다(조지 양식). 남부의 저택보다 일반적으로 작기는 했지만 북부의 것은 벽돌과 석재로 된 조지 왕조의 형태들을 목재에 쉽게 적용한 점이 독특하다. 18세기중에 펜실베이니아의 독일계 정착민들은 영국 전통이 지배적인 식민지에 독일의 전통적인 디자인 양식을 가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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