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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코(calico)·친츠(chintz)·팰럼포(palampore)와 같은 인도 기원의 단어들은 서양의 인테리어 디자인 역사에서 인도산의 직물들이 갖는 중요성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인도인들 스스로는 이런 역할을 분명히 자각한 적이 전연 없다. 그만큼 그들 고유의 실내는 카펫이나 기도용 융단을 제외하면 석조 바닥과 무늬없는 흰 벽의 단조로움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지극히 단순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주거를 만드는 데 이용된 자재가 내구성이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다 웅장한 건물에서는, 그리고 보통 힌두교와 불교의 사원에서는 벽에 그림들을 그렸는데, 이 관례는 문헌의 기록만으로도 멀리 마우리아 왕조(BC 321~185)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굽타 왕조(320~600)의 동굴 사원들에 남아 있는 그림은 으레 활동적인 가공의 생물이나 인물의 무리를 묘사하며, 물결 모양의 선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후기의 한 표본은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 코친의 마탄체리 궁에 있는 17세기초의 미완성 벽화들에서 볼 수 있다. 준보석(準寶石)들의 상감, 조각되고 까치발을 댄 기둥과 주두(柱頭)들, 그리고 투각 세공의 대리석 패널들도 지방 통치자들의 저택 장식으로 쓰였다.
가구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인도의 위치는 독자적인 양식의 창조자로서의 위치라기보다 수입된 서양 양식의 개조자 또는 변형자로서의 위치이다. 유럽에서 알려진 의미로서 실내 가구는 인도에서는 16세기까지 전통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테이블이나 의자 같은 친숙한 물건들도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의 가구가 보급되기까지는 쓰이는 일이 드물었다. 18세기에 인도에서 영국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영국의 영향력하에 인도-유럽의 모든 가구 양식이 갈수록 증가했다.
유럽인 구매자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갈수록 유럽의 가구 양식들을 좋아하게 된 인도의 통치자들을 위해서도 치펜데일과 셰라턴의 양식으로 된 가구 일습이 상아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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