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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장식 유리창과 빛을 통과시키는 물건들에 쓰이는 색유리.
'Stained'라는 영어 형용사는 전통적으로 그림 장식 창을 만드는 데 사용된 유리를 가리키지만, 엄밀히 말하면 모든 색깔 있는 유리나 녹아 있는 유리 원액에 여러 가지 금속산화물을 첨가해 착색한 모든 유리라고 할 수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 색깔의 기묘한 조화는 유리의 특정한 색상 그 자체에 의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통과하는 빛의 속성에 따른 효과와 사람의 시각이 선택적으로 인지하는 광선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적으로 서양에서만 쓰였던 스테인드 글라스는 12~13세기초에 이르러 창을 통한 빛의 화려하고 강렬한 효과를 강조한 고딕 건축에 융화되면서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다(→ 고딕 건축). 중세 고딕 양식 성당건축의 어둡고 침침한 실내를 보석같이 찬란하게 밝혀주었던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상 대비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디자인
개요
스테인드 글라스는 여러 가지 빛의 조작효과와 구조상 여건에 맞아야 하기 때문에 힘든 작업이 요구된다.
반면 어떤 재료보다도 더욱 직접적으로 고도의 동적인 현상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용해 비세속적이며 생생하고 재치 있는 독특한 효과를 낸다. 광선은 하루의 시간과 계절, 날씨에 따라 계속 변화해서 빛의 효과에 의한 색조와 강도가 부드럽고 온화한 것에서 찬란하고 화려한 것으로 끊임없이 바뀌게 된다. 또한 시간뿐만 아니라 장소(초원과 숲, 온실과 감옥 등)에 따라서도 느낌이 달라지며, 개개인이 취하게 되는 시각의 자발적인 선택과정도 각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창을 통한 광선으로만 건축물의 밝기를 조절했던 중세 교회 건축물에서 12~13세기초의 예술가들은 주변의 어둠과 대비하여 찬란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위해 깊고 진한 루비와 푸른색의 유리창을 창작했고, 또 효과적으로 광선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그리자유 화법으로 불투명 메시(mesh)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교회의 벽이 더 많은 광선을 받아들이도록 개방됨에 따라 14~15세기에는 전보다 완화되고 절제된 색상조화로써 덜 침침한 효과를 선호하는 실질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종교예술).
재료와 기술 유리를 만들 때 유리의 착색은 녹은 상태의 유리에 붉은색은 동(銅), 푸른색은 코발트, 자주색은 망간, 노란색은 안티모니, 초록색은 철과 같은 금속 산화물을 첨가하여 이루어진다.
중세의 유리판은 유리불기법(blow-molding)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녹은 유리를 대롱을 통해 방울을 불어 만든 다음 그것의 끝을 잘라 통형이 되게 한다. 한쪽 끝에서 길이로 이 통형을 갈라서 펴 판형을 만들고 이를 가마에 넣어 서서히 냉각시켜 완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얇은 색유리판은 스테인드 글라스 작가의 디자인에 따라 여러 조각으로 잘라낸 다음 이 색색의 유리조각들은 납띠를 가장자리에 고정시켜 모아 붙여서 전체 디자인에 맞게 구성한다.
이때 납띠는 그 자체도 디자인의 한 부분 역할을 하며, 개개의 납띠를 두른 조각들을 모아 철틀에 끼워넣어 유리창을 만든다. 또 유리조각들 표면에는 검은색 유리질 에나멜로 세부 디자인을 그려넣어 섬세한 장식 표현을 만들고 있다.
12~13세기에 만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은 우연이든 계획된 의도였든간에 유리의 두께가 일정치 않은 등 미숙하면서도 세련되어 이상적인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리기술이 발전해 더 크고 얇고 판판한 유리를 생산할 수 있었으나 이후에는 미학적으로나 시각적으로 이전보다 발전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후에 고딕 복고주의자들은 이런 결과를 인식하고 12~13세기에 쓰였던 소위 앙티크 유리의 색과 질, 음영효과를 발전시켜 초창기 수법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전통 수법
스테인드 글라스 예술은 '모자이크'와 '에나멜링'예술이 투명한 소재로 전환, 표현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모자이크 제작에서 여러 조각의 유리로써 기념적인 도상을 구성하는 개념이 생겨났고, 에나멜링에서는 금속 띠(테)로 유리조각들을 모아 붙이는 기술과 금속띠 자체를 디자인한 점, 또 세부장식이나 명문을 그려넣는 안료인 유리질 에나멜을 만들어 쓰는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에나멜 세공).
1110~40년 사이에 테오필로스(12세기 헬마쉬하우젠의 야금술사 루제루스로 추정됨) 수사가 쓴 〈공예 개설 Schedula diversarum artium〉에 최초로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기술이 서술되어 있다.
이 전통기법은 먼저 색깔의 구분이 나타나 있는 백도제(白塗劑)가 입혀진 탁자 위에 그려놓고, 색에 맞추어 각각의 유리판에 달구어진 뜨거운 철로 된 연장을 대고 움직여서 정확한 크기와 형태로 유리를 잘라낸 후, 눈금이 새겨진 인두(grozing iron)로 다시 가장자리를 다듬는다. 이때 조각들은 서로 접합시킬 납테를 두를 여분을 고려해야 한다.
필요한 세부 디자인은 유리질 에나멜로 유리조각 위에 그려넣은 후에 가마에 넣어서 에나멜이 유리에 녹아 붙기에 적절한 온도로 가열한다. 그리고, 탁자 위에서 2개의 긴 납띠로 유리조각을 서로 연결하여 모아 붙여 전체 디자인에 맞게 구성하게 되는데, 유리의 가장자리에 둘리어지는 홈이 패인 납띠는 그 단면이 H자형으로 되어 있다. 초창기 작품인 〈예언자 Prophets〉 같은 단일상으로 된 란셋 창에서는 납테에 의한 구획은 순전히 기능적이었으나, 이어 창의 크기가 커지면서 이런 구획은 다루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유리창을 수직과 수평으로 더 작게 분할하는 방법이 개발되었으며 따라서 유리창 전체 디자인에 맞도록 기하학무늬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사실 큰 고딕 성당의 원형 창이 생겨나는 시기에 맞춰 디자인된 독창적 변화라고도 할 수 있다. 화면·장식·구조의 완전한 화합이 각기 단독으로는 이룰 수 없는 어떤 힘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조화가 스테인드 글라스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14세기의 발달
14세기초에 이르러 여러 가지 발달을 보게 되는데 초창기에 불가능했던 2차적인 색깔, 즉 흐린 황색, 이끼색, 자주색의 일반화가 가능해졌고 은염(銀鹽)으로 그린 노란색 색조유리도 발명되었다.
유리화가들은 유리 전면에 반색조의 투명 매트를 붙이거나 강조할 부분을 유리질 에나멜로 음영을 표시하고 모델링하는 등 많은 기술 발전을 이룩했으며, 특히 15세기에는 점차로 선의 사용도 숙달되고 세련되어갔다. 또 기술상 새로운 방법들도 추가되었는데, 맑은 투명 유리를 녹은 색유리에 잠깐 담그어 얇은 색유리 막을 입히는 입힌 유리(flashed glass)라든가 스테인의 두께와 열의 정도 또는 마연법에 따라 색상의 정도가 다르게 표현되기도 했다.
이로써 납띠에 의해서만 좌우되던 스테인드 글라스의 디자인이 차츰 납띠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후기의 발달
15세기말경 유리질 에나멜의 새로운 영역이 개발되고, 16세기 중엽에는 유리 위에 에나멜 안료로 그리는 기술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유럽전역의 정치적 혼란으로 색유리가 귀해졌고 전통적인 색유리 기법은 점차 새로운 방법으로 대치되어갔다. 16~20세기까지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술의 발전은 순전히 실용적인 것이었다. 16세기에 다이아몬드로 된 유리 커터가 발명되고 18세기에 에칭 입힌 유리기법을 위해 플루오르화수소산이 사용되었다. 19~20세기에는 가스·전기가마·납땜인두(soldering iron)도 쓰였으며, 색·질·두께가 다양한 커다란 유리판도 역시 20세기에 개발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30년경 프랑스에서 납띠를 대신하여 콘크리트에 유리를 끼우는 방법을 포함한 여러 기술 혁신과 투명 합성수지 접착제에 유리를 접착시키는 것 같은 실험적 기술이 쓰이면서 현대의 스테인드 글라스 작가는 다른 것이 따를 수 없는 다양한 표현을 구사하게 되었다.
주제
중세의 교회예술은 교훈적인 내용을 근본으로 하므로, 유리창에 그려진 주제는 성서의 해설과 교회나 성인(聖人)들을 영광되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창문이 커짐에 따라 스테인드 글라스는 미적으로나 교리의 전달에서도 더욱 중요해졌다.
교회 건축에 쓰였던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의 도상학적인 배치계획은 몇 가지 요인을 고려하여 정해졌는데, 교회 건축의 십자형 평면은 그 자체가 4개의 중심지역으로 구분되고 각 지역의 건축형태나 태양의 방향에 따라 일정한 주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도상학). 예를 들어 샤르트르 성당에서는 성단의 5개 중앙 채광창과 북쪽 장미창은 성모 마리아에 봉헌되며 남쪽 장미창은 그리스도의 영광, 서쪽 장미창은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헌정되어 있다.
보통 성서에서 채택된 주제는 성인, 예언자, 그리스도, 성모의 생애, 최후의 심판 등을 포함한다. 그리고 12사도,〈신약성서〉·〈구약성서〉·〈요한의 묵시록〉의 내용, 황도12궁, 또한 이사악에서 그리스도에 이르는 계보 등이 가장 인기 있는 주제들이었다. 때로는 도상학적 배치와는 관계없이 유리창의 작품 헌납자의 뜻이나 개인의 기호에 따른 주제도 묘사되었다.
가장 큰 성당인 샤르트르 성당에서 보면, 176개의 창에 2,500㎡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쓰였으며, 3개의 장미창은 각각 직경 12m로 거대하게 구성되었는데, 이는 1203~40년 사이의 40여 년에 걸쳐서 9명의 작가가 완성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성직자들이 창의 드로잉을 유리 숙련공들에게 제공해 제작하기도 했는데 영국박물관의 12세기 문헌에는 성 구트락의 생애를 그린 것이 그 대표적인 예로 되어 있다.
중세 후기에는 글로 쓴 드로잉을 받아서 예비 스케치를 마련해 후견인의 승인을 받은 후, 실제 크기의 최종 도안을 완성했던 과정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글로 된 교시의 예는 헨리 7세가 영국 그리니치의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에 봉헌한 드로잉에서 볼 수 있다. 14세기에는 양피지나 종이 위에 그려진 각각 다른 모양의 완성된 도안들을 보관하는 것이 유리공들의 관습이어서 이러한 도안그림들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오랫동안 다시 사용되었는데 1450년에 죽은 요크 지방의 한 유리공은 유언으로 도안그림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중세 후기에는 숙련공의 유리공장은 고도로 조직된 사업체로서 각종 등급의 디자인을 후견인이나 주문자의 비용 여하에 따라 생산해내고 있었다. 봉헌자가 성직자이든 평민이든 간에 주제 선택과 표현방법에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최종 디자인은 반드시 당대 예술 성향을 구현할 수 있는 예술작가인 마스터 유리공(숙련 유리공)만이 완성할 수 있었다.
서양의 스테인드 글라스
스테인드 글라스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부터 있었으나 중요한 장식미술로서 진전된 것은 훨씬 후에 이르러서였으며 그 발전과정은 더디었다.
12세기 이전의 스테인드 글라스의 존재는 문헌기록과 발굴자료에서 확인되었으나 자료가 너무 간략해서 그 기술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충분히 살펴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라틴 교회의 교부들, 즉 락탄티우스, 프르덴티우스, 성 히에로니무스의 기록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 색유리창에 대해 언급되어 있으며 5세기의 시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프랑스 리옹의 색유리창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또한 교황 레오 3세(795~816 재위)는 로마의 산파올로 바실리카를 위한 색유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미 유럽에서는 카롤링거 왕조 이전부터 부자들의 건축물에 색유리창이 크게 퍼지고 있었음을, 669년의 영국 요크 대성당이나 영국 선덜랜드의 멍크웨어머스 수도원에서 발견되는 7세기말부터의 색유리창 조각들에서 알 수 있다. 이들 초창기 중세 유리창들은 상당히 다양해서 처음에는 창틀 부분에 얇은 대리석, 설화석고(alabaster), 석고 또는 나무판 등으로 메워넣고 여기에 구멍을 뚫어 색유리를 끼우는 '모자이크'창의 형태도 있었다.
이 모자이크 창은 서유럽에서는 로마네스크 시기에도 쓰였으며 11세기초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처 토르첼로 대성당과 피렌체의 산미니아토 교회에서도 보인다. 이런 초기방법에서도 창틀에 유리파편들을 붙일 때 납띠가 쓰였을 것이며 이미 4세기경부터는 유리창 끼우기에 납으로 된 띠가 쓰였음이 발굴에서 확인된 바 있다. 최초의 납테로 된 유리 디자인은 프랑스 랭 지방의 9세기경의 세리레메지에르 교회에 있는 작은 패널화(1918 파손됨)이다.
초기의 색유리창은 그림으로 장식되지 않고, 비교적 간단한 도안의 색유리로만 구성되어 있었는데 9세기까지는 그림이 도안된 색유리창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 글라스는 독일의 로르슈에서 발굴된 유리파편들인데 이들은 그리스도의 두부 형상으로 복원되면서 이 형상은 카롤링거 왕조의 회화와 형식이 유사함을 보여주는 9, 10세기 또는 11세기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완전한 스테인드 글라스 그림은 12세기초에 속하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성당에 장식된 5명의 예언자 상이다.
카롤링거 왕조와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에서는 구조상 창의 숫자가 적고 크기도 작았기 때문에 화려한 장식은 창보다는 넓은 벽과 둥근 아치형 천장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후기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에서는 창의 배치와 개방성을 강조해 이때부터 스테인드 글라스 그림이 주된 예술양식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북유럽에서는 교회장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카롤링거 왕조 미술, 로마네스크 예술). 그림을 그린 스테인드 글라스 창은 보통 서유럽에서 발명된 고유한 것으로 여겨져왔지만, 초창기 발전과정에는 아직 모호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12세기초부터는 비교적 합리적으로 발전되어갔는데 중세 후기의 스테인드 글라스의 정교함과 세련됨은 주제의 자연주의적 해석에 있어서 프레스코나 이젤 화가들의 기량과도 겨루게 될 정도로 예술적으로 크게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12세기의 다른 중요한 작품으로 파리 근교의 생드니 수도원에 남아 있는 것과 파리의 생샤펠에서 보이는 15개의 창에 1,134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찬란한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을 들 수 있으며 13세기의 작품으로 현존하는 것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은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을 예로 들 수 있다.
13~16세기까지는 중요작품들이 만들어지지만 스테인드 글라스는 예술형태로서 퇴보하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효과를 추구했는데 이러한 사실주의적 경향은 스테인드 글라스 기술이 덜 적절할 뿐만 아니라, 작가들이 고도의 광선-굴절 성질을 구사하던 작업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스테인드 글라스 예술이 쇠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19세기에는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에 대한 흥미가 부흥되었는데 이는 고딕 미술의 부흥과 관계가 있으며 많은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번 존스의 디자인이나 윌리엄 모리스 같은 미술공예운동의 지도자들과 미국의 루이스 컴퍼트 티퍼니 등에 의해 찬란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아르 누보 운동으로 스테인드 글라스는 장식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건축작품에서 크게 활용했다. 20세기에는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페르낭 레제 같은 유명화가들의 디자인으로 찬란한 현대의 유리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의 스테인드 글라스
서양의 장식예술인 스테인드 글라스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스테인드 글라스의 시작이 그러하듯 종교단체를 통해서였다.
1898년 초창기 서양식 건축(고딕 건축)인 명동대성당이 파리외방전교회의 의뢰로 프랑스의 베네딕토회 수도원 수사들에 의해 지어졌고 여기에 유리창 장식으로 스테인드 글라스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장식은 성서의 구절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예를 들어 잉태한 마리아에서 천상모후의 관을 씌워드리는 예수까지 그리스도의 일생을 묘사한 15편의 장면과 나뭇잎 모양 등을 기하학적 모티프로 응용하여 장식한 유리창 등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은 대중화되지 못했고 1968년에 들어서면서 가톨릭교도이며 종교미술에 심취한 화가 이남규가 스테인드 글라스에 깊은 관심을 쏟게 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뜻있는 사제의 주선으로 그는 오스트리아 수도원과 파리 베네딕토회 수도원 공방에서 3년 여 동안 제작기법을 익히고 돌아왔다.
그가 돌아와 예술성을 접목한 정통 스테인드 글라스를 성당건축에 설치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스테인드 글라스의 장을 열었고, 특히 각 성당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제작한 서울 중림동·혜화동·역촌동 성당, 인천 가좌동성당 등의 작품들은 그의 독특한 현대미술 성향과 전통기법을 조화시킨 예술품이다. 더욱이 1982~84년까지의 명동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복원작업은 서양 수사가 제작한 것을 한국의 예술가가 새로운 시각으로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종교단체를 통해 확산된 스테인드 글라스는 상업적인 일상용품으로 생산되기도 했는데, 제작과정이 번거롭고 비싸다는 단점 때문인지 크게 확산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건축물에서 예술공간의 부분장식으로 조금씩 다시 사용되고 있어 스테인드 글라스의 폭은 점점 넓어지고 있는 경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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