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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우리아 왕조(717~820)와 아모리아 왕조(820~867) 사이의 약 150년간 비잔티움은 역대 황제들의 성상파괴운동으로 최대의 종교적 내분을 겪었다. 서유럽에서는 로마 교회가 세속 권위보다 우월한 권위를 행사했지만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황제가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를 복종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성상파괴 분쟁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명백한 경계를 그으려는 노력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성화상 공경의 관행은 692년 퀴니섹스트 공의회 이래로 더욱 강화되어왔으나 이에 대한 반대이론은 730년 레온 3세(717~741 재위)의 성상파괴칙령에 의해 불붙게 되었다. 성화상 공경론자나 성상파괴론자들은 다같이 그리스도교도가 성상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갖지 않으면 번영할 수 없으리라는 신념을 지녔지만 8세기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해서 성상은 신의 상징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으며 신은 육화를 통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지 창조는 정당하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파괴론자들은 일부 이슬람교와 단성론자들의 영향을 받아 일체의 종교적 우상을 거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했다. 이들이 보기에 예수의 육체적 이미지는 신성모독이었다. 이와 동시에 콘스탄티노스 5세는 754년에 광신적 수도원의 박해를 결정하고 성상을 황제 초상화로 대체하려 했다.
그는 수도원과 교회의 권위가 황제와 세속 학문의 세계를 경멸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또한 황제권의 휘하에 봉사하던 온건파 성직자들 역시 수도원의 광신파에게 대립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세속적 봉사와 교육에 의한 훈련을 중시했던 것이다. 이들 군사 및 관료귀족층은 성직귀족층과 대등한 권위를 누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성상파괴운동은 비잔티움 사회의 인종적·사회적 이면에 보다 더 깊은 종교적 분열을 하나 더 보태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성상파괴운동은 비잔티움과 로마 교회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레온 3세의 이 박해운동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게다가 롬바르드족이 점령한 라벤나와 일리리쿰 지역의 교회재판권을 비잔티움 대주교에게 넘기게 됨으로써 양쪽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게다가 교황 스테파노 2세가 피핀을 서로마 황제로 대관한 일은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사상과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9세기 후반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경쟁을 부추기는 더욱 심각한 사태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중부 유럽의 슬라브인과 발칸의 불가리아인·루스인의 개종과 교회 사법권을 둘러싼 문제였다. 포티오스 총대주교는 외교수완을 발휘해 비잔티움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는 경쟁관계로 치닫던 동·서 교회의 대분열의 조짐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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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비잔티움 제국의 성상파괴운동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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