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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제국의 로마적·그리스도교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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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 Jebulon/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로마적 전통은 비잔티움에게 커다란 유산을 남겨주었다.

라틴어, 화폐제도, 로마군의 국제적 성격, 도시의 수송로, 법률, 지혜로운 인간으로서의 황제의 인간상, 시민적 문화 등이 그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아우구스투스 이래 지중해 세계의 통일과 번영을 가져다준 원천이었다. 이 전통은 물론 끊임없이 다른 도전을 받곤 했는데, 정복사업은 로마의 막강한 지배하에서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영역들, 지방적 관습과 관행, 이교도 사원, 유대인 장로회,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도와 부딪혔고 자급자족적인 영지나 속주 등의 경제적 단위 등은 제국 내의 통일성보다는 원심적 다양성을 추구하며 황제의 통제력을 벗어나려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혁

이 두 황제는 후기 제국을 보다 통일적으로 재조직하기 위해 세습적 황제계승권의 원칙을 세우고 행정을 정규화하기 위해 제국을 4개의 대관구로 나누고 그 하위의 작은 도시에 이르기까지 행정적 관료제 질서를 확립하는 대개혁을 시도했다.

군사와 민간행정을 엄격히 분리해 정치적 내란을 막으면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공인된 신앙으로 허용해 이교도를 통합했다. 통화제의 개혁으로 가격·임금을 통제하고, 보다 안전한 방어조건을 갖춘 동방으로 수도를 옮겼다. 동방은 로마와 달리 집중된 토지, 즉 라티푼디움의 수가 적어서 자영소농(自營小農)이나 도시 납세자가 많았기 때문에 도시 성장이나 원로원들의 군사적·재정적 봉사 능력에 유리했다.

3세기말부터 후기 로마인들의 사회적 유동성은 두드러지게 줄어서 동방에서는 상업경제적으로 활력이 넘쳤다. 로마 제국 말기의 동서 로마의 차이점 중 또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민족과의 관계였다. 동·서고트족이 훈족의 추격을 피해 갑자기 4세기 후반에 도나우 강을 넘어왔을 때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변경지(feoderati)를 하사해 융화정책을 쓰려 했다.

이들은 프랑크족·롬바르드족과는 달리 아리우스파로 개종했고 매우 호전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원로원 귀족제도에 호의를 느끼지 않았다. 그결과 동로마에서 고트족은 대규모나 조직적인 방법으로 정착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제국군대조직 속에 충원되는 경향을 띠었다.

종교적 논쟁

6세기부터 동로마 제국에는 종교적인 논쟁이 제국의 통합을 위협할 정도로 가열되었다.

아리우스파의 이단 선언 이래로 2번째의 중요한 이단설은 단성론(Monophysite)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등의 신학자들은 성자(聖子) 예수의 신성(神性)만을 강조하고 인성(人性)을 부정했다. 이에 반해 안티오키아의 네스토리우스파들은 2가지 특성이 분리 병존하는 것으로 보고 오히려 인성을 강조했다. 오랜 논쟁 속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력이 컸던 단성론을 배척하고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택한 양성론을 지지했다.

단성론자들의 탄핵과 그에 뒤이은 갈등은 정치적·군사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단성론은 이집트·시리아에서 계속 인기가 있었고, 중앙의 지배에 저항했기 때문에 7세기 이슬람의 침입 때까지 황제는 이 지역의 분리주의적 전통과 싸워야 했다.

결국 황제는 서유럽에서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동방의 단성론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서유럽의 정통설을 만족시키는 교회를 형성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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