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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올로고스 왕조와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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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올로고스가(Palaeologus family)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쌍두 수리 문장

ⓒ Consta/wikipedia | Public Domain

1202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옛날의 위용을 상실했고 더이상 회복하지 못했다.

제국의 사방은 트라페준타 제국, 봉건왕국으로 분할되었고, 그리스 북부와 서부는 불가리아·세르비아·이탈리아·프랑스의 속령, 식민지로 점령되었다. 비잔티움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만이 하나의 거대한 성벽도시국가로 남아 있었다. 제국은 흔히 서유럽의 재정복 위협에 대해 교황청에 도움을 청했고 그때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교구하에 두는 문제가 거론되었다. 그러나 동·서 교회를 다시 화합시키려는 황제의 노력은 외교적 공작으로 보여졌고 이는 비잔티움인의 반발만을 샀다.

교황청으로부터의 구원이 용이하지 않은 것은 크게 보아 3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14~15세기에 걸쳐 교황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었고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일치 정신이 쇠퇴했다. 둘째, 서유럽 자체 내에서 여러 국가간의 경쟁과 갈등이 존재했으며, 셋째, 이탈리아 연안의 도시국가인 제노바·베네치아의 야욕 때문이었다.

베네치아는 비잔티움과의 관계에서 오직 상업적 이익 관계만을 고려했고 이에 어긋날 때는 서슴지 않고 비잔티움 선박을 침몰시키곤 했다. 비잔티움의 부활이 장차 투르크의 위협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이들에게 너무 늦게 떠올랐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소아시아 지역은 다시 아시아의 새로운 이민족인 몽골족의 침입을 1세기 가량 받게 되었다.

흔히 지방귀족들은 수도의 황제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몽골족과 협력하기도 했다. 비잔티움은 고질적인 양면 전쟁 때문에 용병을 고용했고 그 유지에 막대한 세입을 지출해야 했다. 몽골족의 점령이 누그러지자마자 다시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을 받은 아나톨리아의 주민들은 대량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해안 서쪽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비잔티움의 화폐 평가절하 정책에도 재정 궁핍은 끝내 나아지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높은 세금과 물가고 및 기근에 시달렸다. 유민이 속출하는 동안 1331년 아나톨리아는 투르크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했다. 1337년에는 니코메디아를 잃어 발칸의 1/3 크기로 축소된 비잔티움은 오스만 투르크와 협약을 맺는 것이 오히려 서유럽의 야욕 위협을 막는 데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1340~50년 각 도시에는 반란과 흑사병이 퍼져 중앙정치는 외국 세력의 경쟁의 희생물로 전락했다.

흑사병(plague)

죽음의 무도에 그려진 흑사병

ⓒ Il Dottore /wikipedia | Public Domain

1354년 투르크 용병대는 해협을 건너 갈리폴리를 차지했다. 일단 유럽 땅을 확보하자 투르크족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복 가능성은 눈앞에 다가온 셈이었고 종전의 우호조약은 이름뿐이었다. 교황청의 한계와 서유럽 국가들의 냉담 속에서 발칸의 북부 마케도니아 왕국,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투르크의 봉신국가로 전락했다.

헝가리가 한때 구원군을 파견했으나 1396년 니코폴리스에서 투르크의 우세한 군사력에 패했다. 비잔티움 황제 마누일 2세(1391~1425 재위)는 유럽을 순회하면서 그리스를 보호해달라고 호소했으나 교황청의 원조모금운동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사이 미스트라 시는 일시적으로 비잔티움 학자와 예술가들의 피난지가 되어 그리스 문화·교회의 마지막 재생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헬레니즘의 부활의 꿈은 점점 사라져가는 석양에 지나지 않았다.

1439년에 피렌체에서 동·서 화합을 위한 공의회가 개회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마침내 로마 교구에 종속할 것을 동의했다. 이 재결합은 폴란드·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로부터 환영을 받아서 십자군 모집의 새 움직임이 일어났으나 1444년 바르나전투에서 그리스도교 국가 연합군은 투르크에 마지막으로 패배했다.

바르나 전투(Battle of Varna)

1444년 바루나 전투

ⓒ Daroui Raid/wikimedia | Public Domain

하기아소피아 성당에서 교회 일치의 최후 순간에 시민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결국 비잔티움은 신앙을 희생시켰음에도 자신들의 자유를 되찾지 못했다. 1453년 1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은 7주간의 항전 끝에 투르크 포위에 함락되었다(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 투르크의 술탄은 수도의 약탈을 3일로 제한하고 신앙에 관용을 베풀 것을 약속했다. 수도에 이어 아테네·모레아·트라페준타가 굴복했고 1,000년 동안 찬란한 그리스도교 문화와 그리스 문화를 융화시켰던 비잔티움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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