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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675/680경, 시리아 콤마게네 게르마니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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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741. 6. 18, 콘스탄티노폴리스 |
국적 | 비잔티움 |
요약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717~741 재위).
별칭은 이사우리아조(朝)의 레온(Leo the Isaurian).
목차
접기개요
이사우리아(또는 시리아) 왕조를 세워 아랍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성상(聖像)의 사용을 금해 비잔티움 제국은 그뒤 1세기 동안이나 갈등을 겪었다.
군사적 업적
그는 시리아 북부 게르마니키아(지금의 터키 마라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나이에 부모와 함게 트라키아의 메셈브리아로 옮겨갔다.
705년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복위를 도와 고위직인 스파타리오스(Spatharios:시종)에 올랐으나 곧 불신을 받아 먼 동쪽 변경으로 죽을 위험이 큰 임무를 맡아 알라니족에게 갔다. 그러나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으며 그다음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2세(713~715 재위) 때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테마(軍官區)인 아나톨리콘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715년 아나스타시오스 2세가 군인들의 반란으로 퇴위당해 수도원으로 쫓겨났으며 테오도시오스 3세가 그뒤를 이었는데 아르메니아콘 테마(소아시아에서 2번째로 큰 군관구) 사령관인 아르타바스도스와 제휴하고 있던 레온은 신임 황제를 인정하지 않고 아나스타시오스의 복위를 계속 주장했다. 한편 아랍인들이 소아시아를 침범하자 레온은 항복하겠다고 아랍인들을 속여 자신이 제위에 오르려는 데 대한 아랍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는 아랍인들을 설득해 비잔티움 영토에서 물러나게 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나약한 황제 테오도시오스 3세는 저항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제위에서 물러났고 레온은 717년 3월 25일 황제가 되었다.
레온의 첫번째 과제는 속은 것에 분개하고 있는 마슬라마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가 이끄는 아랍인들의 침입에 대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어태세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아랍인들은 717년 8월 15일부터 718년 8월 15일까지 육상과 해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으나, 레온의 능숙한 방어전술과 함께 그리스제(製) 화약(가연성 석유 혼합물), 혹독한 추위, 일부 아랍 함선들의 이탈, 트라키아에 주둔한 아랍군에 대한 불가리아인들의 공격 때문에 포위를 풀어야만 했다.
이 전투는 아랍인들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가운데 2번째이자 가장 규모가 컸던 사건이었다. 레온의 승리로 아랍인들은 유럽 남동부에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고 아랍 팽창주의는 큰 타격을 입었다. 레온은 과거 알라니족을 다룬 수완이나 아랍인들과 벌인 까다로운 협상을 통해 총명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군장교와 관리들이 아나스타시오스 2세를 복위시키기 위해 꾸민 음모를 분쇄함으로써 레온은 자신의 권위를 강화했고, 딸 안나를 협력자인 아르타바스도스와 결혼시켜 제휴관계를 더욱 굳게 다졌다.
레온이 제위에 있는 동안 아르타바스도스는 군대의 여러 요직을 거치며 제국의 제2인자로 군림했다. 720년에는 황후 마리아와의 사이에 난 아들 콘스탄티노스를 공동통치자로 임명했다. 외교능력이 뛰어났던 레온은 733년 자카프카지예 지역에 살던 하자르 족장의 딸과 콘스탄티노스를 결혼시켜 그들과 매우 귀중한 군사적 동맹관계를 맺고 아랍인들에 대항했다.
북쪽의 불가리아인들과는 평화관계를 유지해 아랍인들의 소아시아 침략을 막는 데에만 주력할 수 있었다. 740년 아크로이노스(지금의 아피온카라히사르)에서 아랍인들을 크게 쳐부숴 위협받고 있던 소아시아 지역을 지켰으며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5세(741~775 재위) 때 비잔티움 제국은 공세(攻勢)를 취해 예전에 아랍인에게 빼앗긴 일부 지역을 되찾았다. 또한 레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거대한 성벽을 보수하기도 했다.
정력적인 군인 출신 황제로서 몸소 병사들을 지휘한 레온은 군대의 효율성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군대의 사기를 높였다.
또 일부 테마들이 너무 크고 강력해지자 자신이 그랬듯이 테마의 사령관들이 왕위를 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거대한 테마들을 더 작게 나누었다. 이같은 행정적인 정비가 훗날 안정을 가져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는 이를 통해 군인들의 음모 앞에 속수무책이던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레온이 죽을 무렵 비잔티움 제국 군대는 그가 제위에 올랐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졌고 왕에게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전반적인 사회적·제도적 개혁을 계획했거나 실행했다는 얘기는 신빙성이 없다.
종교정책
레온은 군사적 업적으로 병사와 국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종교정책을 강력히 추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는 확고한 종교관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널리 퍼뜨려 실행하도록 하는 것이 황제의 의무라고 굳게 믿었다. 722년에는 유대인과 몬타누스파(그리스도교 이단 종파의 하나) 사람들에게 세례를 강요했으며 역시 이단인 바울로파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조사까지 했으나 그 추종자들을 처단하지는 않았다. 그의 통치기간 중 가장 이례적인 종교개혁조처였던 성상파괴정책(聖像破壞政策)의 유래와 성격은 모호하며 논란이 많다.
그는 신앙심이 깊었는데 예배 때 공경의 대상으로 삼던 성화(聖畵)와 성해(聖骸)가 신성모독적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던 것 같다. 레온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슬람교도와의 접촉을 포함해 어린시절 그가 시리아 북부에서 겪은 경험이 그의 성상파괴정책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서부 소아시아의 일부 주교들이 내놓은 성상파괴론에 어느 정도 공감한 것은 사실이다.
레온은 726년부터 성화 사용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레온의 이같은 정책에 반발해 727년 키클라데스 제도(諸島)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실패했다(성상파괴논쟁).
레온은 730년 성상파괴를 제국의 공식정책으로 선언했으며 교회에서 성상을 없애거나 부수라고 지시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게르마누스 1세가 이를 거부하자 그를 해임하고 아나스타시오스를 후임자로 임명했다. 반항하는 성직자들을 구타하거나 감옥에 가두는 등 필요할 경우에는 가혹한 대응을 했는데 그의 정책은 특히 수도원 성직자들의 반발을 샀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와 그레고리오 3세 역시 이탈리아에 있는 비잔티움 영토에 성상파괴정책을 적용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하자 레온은 남부 이탈리아가 교황청에 기부금을 내지 못하게 보복했다. 또한 시칠리아·칼라브리아·일리리아의 교회들을 로마 교황의 관할권에서 떼어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권한 아래 두었던 것 같다.
그의 이런 행동 때문에 비잔티움과 로마 교회 사이는 대단히 나빠졌다. 교황은 로마 교회를 보호해줄 새로운 세력을 찾아 점차 프랑크 왕국과 가까워졌고 이탈리아 반도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권위는 떨어져갔다. 그리고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에 무거운 세금과 행정적 조치를 시행해 이곳에서의 레온의 인기는 더욱 떨어졌다. 그 자신이 훌륭한 군사령관이었는데도 서부 지중해에 강한 해군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은 약해졌다.
법률상의 업적과 기타 업적
레온이 취한 가장 중요한 조치 중 하나는 법전인 에클로가(Ecloga)의 공포(726)이다.
법전의 길이는 그다지 길지 않으며 6세기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1세가 제정한 유스티니아노스 법전처럼 로마의 법적 관례(慣例)를 개정한 것이었다. 로마 법을 그리스도교 원칙에 맞추어 개정하려 한 레온은 에클로가의 상당부분을 결혼법과 재산권 조항에 할애했다. 그리고 예전 같으면 사형을 내릴 죄에 대해 신체를 절단해 불구로 만드는 형벌을 내리는 경우를 많이 만들었다.
또 재판관이나 관료들에게 선물이나 뇌물을 주는 부패한 관습을 막기 위해 사법관리들에게는 일정한 봉급을 주었다. 군법을 성문화했다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 이른바 군인법은 레온이 만든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이 법을 만든 인물은 불확실하다.
신학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 외에 레온이 어떤 지적인 관심사를 갖고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랍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통치기간 중 학술·문화를 위한 정책을 폈다는 증거는 거의 없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성직자 학교 문을 닫아버림으로써(성상파괴운동에 대한 교수진의 반대 때문임) 고등교육을 중지시켰다는 비난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그 시대에 이루어진 경제발전이나 인구증가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지만 지진이 많이 일어나 여러 도시와 농촌지역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다.
레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사도(使徒) 교회에 묻혔다. 그의 통치기간 중 마지막 8년 동안 제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정보는 불충분하지만 그가 성상파괴를 반대하는 세력을 잠재우지는 못했으며 사실상 성상파괴운동은 다음 세기에 가서 비잔티움 제국을 분열시켰다.
그는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에게 성상파괴론과 군사전술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르쳤으며, 콘스탄티노스는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거나 심지어 더 강화하기까지 했다. 성상파괴운동을 잘못된 정책으로 여긴 후대의 비잔티움인들은 레온을 비난했으나 다른 사람들, 특히 일부 군인들은 제국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인물로 레온을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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