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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포루스 1세

다른 표기 언어 Saint Nicephorus I
요약 테이블
출생 758경, 콘스탄티노플
사망 829. 6. 2, 소아시아 칼케돈 근처 비시니아
국적 그리스

요약 축일은 3월 13일. 그리스 정교회 신학자, 역사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806~815).
(그). Nikephoros.

그가 쓴 비잔틴사 연대기들과 비잔틴의 성상숭배를 옹호한 책들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과 관행에 관한 자료들을 제공해 준다.

보수적인 정교를 믿던 니케포루스 가정은 이사우리아 왕조(717~820) 때 성상파괴론자들에게 박해를 받았지만, 그는 황궁서기관이 되었고,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 때는 황궁위원으로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이 공의회는 성상을 의식에 사용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수년 동안 수도원에 들어가 은거생활을 한 후, 여제(女帝) 이레네(797~802 재위)가 즉위하자 콘스탄티노플 빈민보호소 감독으로 초빙되었다.

그때까지 줄곧 평신도였던 그는 806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스토우디온 수도원에 소속된 열정적인 수사들은 그 조처에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은 니케포루스가 관례에 벗어나는 방법으로 총대주교가 된 것과, 황실의 부도덕한 혼인에 대해서 타협적인 입장을 취한 것, 일반적으로 신학에 대해서 회유적인 태도를 취해 온 것 등을 놓고 그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가 이사우리아 왕조에 속한 아르메니아인 황제 레오 5세의 성상파괴 정책을 반박하자, 수사들은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후 815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상파괴주의자들이 연 교회회의에서는 니케포루스를 총대주교직에서 물러나게 했고 칼케돈 근처 수도원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곳에서 반성상파괴주의에 관한 유력한 소논문과 비잔틴 연대기를 썼다. 그의 신학적 주장들은 황제 미카엘 2세(820~829 재위)로부터 어느 정도의 관용을 얻어냈다.

그의 신학 저서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주요변증 Apologeticus major〉(817)인데, 이 책은 성상숭배의 적법성을 철저히 옹호한 논문이다. 니케포루스는 반대편의 신학자들을 중립적인 위치에 서게 만드는 데 성공한 데 이어 9세기 중엽 마침내 성상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의 역사책 2권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중 하나는 〈니케포루스 약사 Breviarium Nicephori〉인데, 이 책은 602~769년에 비잔틴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한 것으로서, 불가리아인들의 정착 기원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다른 하나는 아담 시대부터 829년까지 군주와 성직자들의 목록을 나열해 놓은 연대표이다.

이 2권은 로마의 문헌관리인 아나스타시우스가 9세기말 라틴어로 편집한 〈연대기 3부작 Chronologia tripartita〉을 통해 서방에서 널리 읽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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