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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가 체결한 협정(1938. 9. 30).
이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서쪽의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합병되었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독일 본토로 흡수하는 데 성공한 뒤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탐내기 시작했다. 당시 주데텐란트에는 약 300만 명의 게르만 혈통 주민이 살고 있었다. 1938년 5월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이 체코슬로바키아 점령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체코슬로바키아는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의 군사원조를 기대했다.
소련도 역시 체코슬로바키아와 조약을 맺고 있었으며 만일 프랑스와 영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방어하기로 결정한다면 기꺼이 이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위기가 계속되는 동안 소련의 역할은 별로 없었다.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독일인들은 그들 조국으로 재결합해야 한다는 선동적인 연설을 계속하자 전쟁이 임박한 듯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방어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독일과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9월 중순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 총통과 개인적으로 상황을 의논하기 위해 베르히테스가덴에 있는 그의 휴양지로 가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서 히틀러는 앞으로 사전협의 없이는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기로, 체임벌린은 주데텐란트 국민투표의 결과를 받아들이도록 영국 내각과 프랑스를 설득하기로 합의했다. 그뒤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외무장관 조르주 보네는 런던에 가서 주데텐 독일인이 50%를 넘는 지역은 모두 독일로 넘겨준다고 규정하는 공동안을 준비했다.
이 논의에 참여하지 않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으나 9월 21일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9월 22일 체임벌린은 다시 독일로 가 고데스베르크에서 히틀러를 만났으나 히틀러의 강경해진 요구에 실망해야만 했다. 이제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를 점령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을 10월 1일까지 철수시키려고 했다.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 데 동의했으나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를 거절했고 영국 내각과 프랑스도 역시 거절했다.
9월 24일 프랑스는 부분동원령을 내렸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보다 이틀 앞서 총동원령을 내렸다. 9월 27일에는 영국 함대가 동원되고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전쟁을 막기 위한 막바지 노력으로 체임벌린은 분쟁 해결을 위해 즉시 4강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히틀러가 동의해 9월 29일 히틀러, 체임벌린, 달라디에,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뮌헨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무솔리니는 서면계획을 소개했고, 이 계획은 참가국 모두에게 받아들여져 뮌헨 협정으로 불렸다(몇 년 뒤 이른바 이 이탈리아의 계획은 독일 외무부에서 준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음). 이 협정은 고데스베르크 제안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독일군은 10월 10일까지 주데텐란트를 완전 점령하고, 다른 분쟁 지역의 앞날에 대해서는 국제위원회가 결정하기로 했다.
뮌헨을 떠나기 앞서 체임벌린과 히틀러는 평화보장을 위한 협의를 통해 의견차를 서로 해소하겠다는 희망을 밝힌 서류에 서명했다.
달라디에와 체임벌린은 의기양양하게 귀국해 전쟁의 위협이 사라졌다고 환영군중을 안심시켰다. 체임벌린은 영국 국민들에게 "명예롭게 평화를 이룩했다. 우리 시대는 평화롭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해 3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영토를 합병하고 9월에는 폴란드를 침입해 제2차 세계대전을 촉발하자 체임벌린의 정책은 신용을 잃었다. 뮌헨 협정으로 연합국은 군비를 증강할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이 협정은 팽창주의적 전체주의 국가에게 양보를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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