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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로의 제1차 선교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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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바르나바의 조카인 요한 마르코를 대동하고 키프로스로 여행을 떠나 살라미스와 파포스(바포)를 방문한 내력을 묘사하고 있다.

그후 그들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로 건너가 페르가(베르게, 지금의 무르타나)에 상륙했다. 이곳에서 마르코는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피시디아(비시디아)와 팜필리아(밤필리아)에서 활동을 벌였다. 피시디아와 팜필리아는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지금의 얄바치 근처)에서 시작되는 로마의 속주 갈라디아의 남부지방이다.

〈사도행전〉은 유대인 회당에서 바울로가 행한 설교를 기록하고 있다. 이 설교는 신약시대에 사도들이 유대인 청중에게 신앙을 증거한 하나의 표본이다. 이코니움(이고니온, 지금의 코니아), 리스트라(지금의 하툰사랴 근처), 데르베에 머문 뒤 그들은 오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페르가까지 갔고, 그곳에서 아탈리아(지금의 안탈랴) 항으로 내려가 안티오키아로 가는 배를 탔다.

새로운 개종자들 가운데 몇 명이 유대교 지역공동체 출신이고 몇 명이 이방인이었는가는 〈사도행전〉의 기록으로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유대인들의 유일신론과 엄격한 도덕성에 이끌려 유대인 회당에 참여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교 선교에 수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된 특별한 이유는 바울로가 그리스도교적 친교를 위해 할례와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전적으로 이방인으로만 새로운 회중이 구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당시 그리스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는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안티오키아에 파견된 사람들은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울로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 것은 이때문이었다. 바울로는 자신과 바르나바가 '계시를 받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증언한다. 아마도 이 말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루살렘의 소환에 따라 그곳으로 간 것이 아니고 한 예언자의 메시지에 공감한 나머지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안티오키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간 사람들 가운데는 디도가 끼여 있었다. 이미 바울로는 이 이방인을 자신의 선교 팀에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의 기록과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의 내용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선의 방법은 이 둘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상이한 기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는 다음의 3가지 주요조치가 취해졌던 것 같다. 첫째,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야고보·베드로·요한과 사적인 면담을 가졌다(예루살렘 공의회). 이 면담에서는 선교를 하면서 설교한 내용들을 서로 비교했으며, 그 내용이 기본적으로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이방인 개종자들의 할례가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바울로의 주장이 승인되었다는 뜻이다.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해야 한다는 강경파의 주장은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둘째, 대규모의 협의회가 개최되었다. 그것은 이방인 선교에 관해 모든 것을 알려줌으로써 성령의 능력이 이방인 선교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결과 개종자들을 유대화하기 위해 더이상의 압력을 가하지 않고 이방인 선교를 계속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바울로는 안티오키아로부터 이방인 선교를 계속 수행하고,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기지로 삼아 유대인들에게 계속 선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예루살렘 교회가 확고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을 유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셋째, 이방인 개종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알리는 서신이 안티오키아로 발송되었다.

이교의 희생제의에서 사용된 고기를 삼갈 것, 유대교 관습에 따라 정결한 고기만을 사용할 것, 성 관계에 대한 유대교의 규례들을 준수할 것 등이 그것이다. 나중에 일어난 사건들을 종합해보면 이 서신의 내용은 바울로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서신은 바울로가 안티오키아를 떠난 직후 유대와 시리아의 수많은 유대계 그리스도인 회중과 바울로의 관계를 규제하려는 추후적인 시도의 일부였다고 추정된다.

바울로의 견해는 베드로의 지지를 받았다.

곧이어 베드로는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했다. 확실히 그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섞인 회중의 삶을 함께 나누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으로부터 몇 사람의 강경파가 안티오키아에 오자 그는 이방인 교인들과 식사를 나누는 일을 삼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르나바를 포함한 다른 유대인 교인들도 그들의 압력에 굴복했다. 그러나 바울로는 그런 일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예루살렘에서 부친 서신이 이미 바울로에게 보내졌다면 이런 위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위기는 이미 합의한 내용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되었음이 틀림없다. 바울로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인물들도 정결 규정이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섞여 있는 회중의 친교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디도를 둘러싼 분란으로부터, 강경파가 회중을 두 집단으로 나눌 것을 요구하고 회중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이방인 개종자들의 유대화를 필요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명확히 드러났다. 바울로는 합의에 대해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바를 고집했고 방문자들은 안티오키아를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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