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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라

다른 표기 언어 al-Baṣrah
요약 테이블
위치 이라크 남동부, 샤트알아랍 강 서쪽 연안
인구 1,414,000명 (2022년 추계)
면적 181㎢
대륙 중동
국가 이라크

요약 이라크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이자 첫째 가는 항구. 고대부터 아랍의 학문·시·과학·상업·금융의 중심지로 9세기 이전까지 아랍의 유명한 문법학자·시인·산문작가·문학가·종교학자들의 본거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보급 기지였으며 전후 이라크 석유산업이 성장하면서 정유와 석유수출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로 산업 기지가 크게 파괴되었고 미국과 이라크 간의 걸프 전에서도 폭격 피해를 입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생산성이 높은 비옥한 농업지대였다. 농작물로는 대추야자·옥수수·쌀·수수를 재배한다.

바스라(al-Baṣrah), Al Basrah Oil Terminal

ⓒ wikipedia | Public Domain

이라크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이자 첫째가는 항구이다. 샤트알아랍(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합류하여 형성한 수로) 서쪽 둔덕, 즉 페르시아 만 알파우 상류 110㎞ 지점 함마르 호(湖)에서 나오는 수로의 출구에 위치한다. 주변의 저지대에는 작은 지류와 수로들이 이리저리 교차하며 지난다.

고대부터 바스라는 아랍의 학문·시·과학·상업·금융의 중심지였다. 638년 제2대 칼리프 우마르 1세가 오늘날 이라크의 앗주바이르 시에서 약 13㎞ 떨어진 곳에 군야영지로 건설한 바스라는 페르시아 만에 가깝고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국경지방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거친 기후와 식수공급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명실상부한 도시로 성장했다.

665년에는 이슬람 건축 역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첫번째 모스크가 건립되었다. 바스라의 군대가 642년 나하반드에서 사산조(朝) 페르시아인들과 싸우고 650년 이란 서부의 주(州)들을 정복한 반면, 바스라 내에서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미망인 아이샤와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제4대 칼리프인 알리 사이에 카멜 전투(656)가 벌어졌다. 칼리프 알리의 통치기간(656~661)과 그후까지도 바스라는 이슬람교 내부의 경쟁적 분파들 사이에 일어난 정치분쟁의 중심지였다. 이런 정치적 알력은 위기일발의 사회적 상황 때문에 더욱 고조되었다. 아랍군이 귀족계급을 형성한 데 반하여 바스라의 원주민이나 인도·페르시아·아프리카·말레이에서 온 이주민들은 아랍 부족에게 예속된 평민에 불과했다. 7세기말부터 바스라의 역사는 소요와 반란으로 이어졌다.

칼리프의 권리를 주장한 아브드 알라 이븐 앗 주바이르(692 죽음)의 군대에게 잠시 점령되었다가 701년에는 이븐 알 아샤트, 719~720년에는 알 무할라브의 반란이 이곳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750년 칼리프의 자리를 이어받은 아바스 왕조 때에도 이런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고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820~835년 집시 같은 유랑생활을 하는 인도 부족인 조트족이 봉기했고 869경~883년까지는 메소포타미아에 농노로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 잔지족이 난을 일으켰다(잔지 반란). 923년 이슬람교 과격파의 하나인 카라미트파 사람들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바스라는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가 유명해짐에 따라 더욱 쇠퇴했다.

방치된 상태에서 몽골의 침략을 계속 받게 되자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원래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16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몇 ㎞ 상류에 위치한 고대 알우불라가 있던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8세기를 거쳐 9세기에 들어서기까지 바스라는 아랍의 유명한 문법학자·시인·산문작가·문학가·종교학자들의 본거지였다.

알 하산 알 바스리를 통해 이슬람교의 신비주의가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무타질라 학파가 이곳에서 발전했다. 서양사람들에게는 〈천일야화 The Thousand and One Nights〉에서 신드바드가 항해를 시작한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바스라는 1668년 투르크인들에게 점령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영국·네덜란드·포르투갈의 무역상들이 자리잡았고 19세기에는 바그다드로 가는 하천교통의 하역장소로 크게 발전했다. 이전에는 부두가 없었으나 1914년 현대식 항구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바스라를 점령한 영국은 이 항구를 통해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사이의 연락을 유지했다. 뒤이은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 바스라는 큰 발전을 이룩했고 도시와 항구 모두 중요성이 높아졌다.

1930년에는 항구시설 소유권이 영국에서 이라크로 이전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연합국이 바스라를 통해 소련군에게 보급품을 보내기도 했다. 전후 수십 년 동안 이라크 석유산업이 성장하면서 바스라는 정유와 석유수출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88) 이전에는 바스라에서 생산된 석유가 페르시아만의 알파우 시까지 수송되어 거기서 수출을 위해 대형유조선에 옮겨졌다. 그러나 바스라의 정유소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지 수개월 만에 크게 파괴되었고 시가의 건물들도 1987년 이란군이 바스라에서 10㎞도 채 안 되는 지점까지 진격해 포격을 가함으로써 파괴되었다. 주민들 대부분은 이때 도시를 빠져나갔다.

한편 바스라는 미국과 이라크 간의 걸프 전이 한창이던 1991년 2월 26~27일 영국 제1기갑사단과 미국 제24보병사단으로 구성된 다국적군 제7군단이 이라크의 공화국수비대를 대파한 곳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쿠웨이트 주둔 이라크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이곳으로 패퇴해오면서 이라크는 이튿날인 2월 28일 종전안을 받아들이고 쿠웨이트에서 철수했다.

오늘날의 바스라 시는 바스라·알아샤르·알마킬 등 3개의 소도시와 알아슈샤르 강 주위에 모여 있는 여러 마을들이 모여 이루어졌다. 이들 거주지 주변에는 배수로와 샤트알아랍의 주위에 형성된 폭 5㎞ 정도의 작은 만을 따라 광활한 야자나무 숲들이 펼쳐져 있다. 습지가 넓게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스라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생산성이 높은 비옥한 농업지대였다. 농작물로는 대추야자·옥수수·쌀·수수를 재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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