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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642, 아라비아 메디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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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728, 이라크 바스라 |
국적 | 이슬람교 |
요약
초기 이슬람 사회에서 깊은 신앙심으로 금욕생활을 했던 이슬람교도.
정식 이름은 Abū Sa⁽īd ibn Abī al-Ḥasan Yasār al-Baṣrī.
전승에 따르면 초기 수니파(정통파)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두 파, 즉 무타질라(철학적 신학자들)와 아샤리(신학자 아샤리의 추종자들)의 창건자로 여겨진다.
하산은 예언자 마호메트의 사후 9년에 태어났다.
이슬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들 중 하나인 시핀 전투(657)가 끝난 지 1년 뒤, 하산은 페르시아 만에서 북서쪽으로 80㎞ 떨어진 군사도시인 바스라로 이주했다. 이 도시의 기지에서 동쪽지역을 정벌하는 군원정대들이 출진했는데, 청년 하산(670~673)도 동부 이란을 정벌하기 위한 몇 차례의 원정에 참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스라는 군사기지 이상으로 발전되었으며, 이슬람 역사상 바스라의 문화적 중요성은 그곳이 심도있는 종교적 학문적 활동 중심지가 되어 후에 이슬람사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데 있다.
바스라로 돌아온 후 하산은 이슬람 사회의 내부 갈등으로 야기된 종교적·사회적·정치적 대격변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684~704년은 그에게 특출한 설교활동의 시기였다. 그의 설교 중 불과 몇 개가 단편적이지만 초기 아랍어 산문의 대표적 견본으로 남아 있으며, 대단히 예민하고 독실한 한 이슬람교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산에게 있어 진정한 이슬람교도는 죄를 범하는 것을 자제해야 하고, 확실히 죽게 되는 것과 저승에서 맞이할 자신의 운명이 불확실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지속적인 불안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음처럼 전혀 의심할 나위 없이 확실한 것이 전혀 확실하지 않은 의심스러운 것과 더 닮았다는 사실을 나는 결코 보지 못했다". 세계는 믿을 수 없어, "그것은 뱀과 같아서 촉감은 부드러우나 그 독은 치명적이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자세로 이끈 양심적 자기반성(muḥāsabah)의 실천은 세계에 대한 세심한 주의와 결부되어 있는 하산의 경건성을 보여주며, 후에 이슬람의 금욕적 신비주의적 마음가짐에 영향을 주었다.
하산에게 이슬람의 적은 이교도가 아니라, 경박한 신앙심을 가지고 '집·거리·시장 등지에서 우리와 함께 있는' 위선자(munāfiq)였다.
중요한 자유의지·운명결정론 논쟁에서 그는 인간이 전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취했는데, 칼리프 아브드 알 말리크에게 보낸 중대한 편지에서 이런 입장을 체계적으로 논증했다. 이슬람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신학 문서인 그의 편지는 신이 인간 행위의 유일한 창조자라는 보편적인 견해를 논박했다.
그 문서는 정치적 함축성도 들어 있어 초기 이슬람의 신학논쟁은 당시의 정치적·종교적 논쟁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 충실한 신자들의 지도자여…… 폭정과 부정은 신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분의 뜻은 사람이 자신의 친척에게 선·정의·친절 및 관용을 베풀라는 그분의 계명이다." 그의 종교적 견해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그의 정치적 견해는 종종 그를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곤 했다.
705~714년 하산은 이라크의 강력한 총독 알 하자즈의 정책에 대해 자신이 취한 입장 때문에 은신생활을 해야 했다. 이 총독이 죽은 뒤에야 하산은 은신생활에서 나와서 바스라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바스라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을 치르는 데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아무도 모스크에 가지 않아 오후기도를 드리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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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알 하산 알 바스리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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