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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몽골은 13세기 초엽에 칭기즈 칸이 광대한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고려를 침략하였다. 최초의 침략은 1231년이었고, 총 6차의 침입이 있었고 1259년까지 이어졌다.
각지에서 백성들과 별초군이 몽골군에 대항하여 용전했으나 몽골군은 내륙지역을 철저히 유린하여 고려정부의 굴복을 받아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려 농민들의 생활여건이 극히 악화되었고, 고려정부의 타격도 심화되어 무인정권이 붕괴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인정권이 붕괴되자 1270년에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했고 1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개요
몽골은 13세기 초엽에 칭기즈 칸이 출현하면서 분열된 부족의 통일을 이루어 광대한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유라시아 구대륙의 대부분을 정복하는 전쟁과정에서 1231~59년 고려에 대한 침략을 진행했다.
약 30년 동안 계속된 침략은 대략 6차례나 되었다. 최초의 침략은 1231년이었고, 이후 1232년에 2차, 1235~39년에 3차, 1247년에 4차, 1253년에 5차, 1254~59년에 6차의 침입이 있었다.
30년간의 대몽전쟁
1231년 살리타이(徹禮塔)에 의해 지휘된 몽골군은 6년 전에 있었던 몽골 사신의 피살사건을 구실로 침략을 시작했다.
몽골군은 귀주·자주 등지에서 고려군의 치열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그 일부가 개경을 거쳐 충주까지 도달했다. 이에 궁지에 처한 고려정부는 침략군과 화의를 맺고 일단 몽골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몽골군이 철수하자 집정자 최우는 1232년 7월 정권유지와 장기항전을 위해서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강화도 천도 직후 몽골군은 고려정부의 개경환도를 요구하며 2차침략을 개시했다.
몽골군은 강화도를 직접 공략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경상도까지 진출하여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고려초조대장경을 불태웠다. 그러나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 주력부대는 광주를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경기도 용인군의 처인성에서 승려 김윤후가 지휘하는 고려농민군의 화살에 맞아 살리타이가 사살되는 등 패배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몽골군은 서둘러 철수했는데, 이는 광주나 처인성의 백성들의 용감한 항쟁에 의한 것이었다.
1235년 탕구(唐古)에 의해 인솔된 몽골군은 3차침략을 해왔는데, 이번에는 5년간이나 걸린 오랜 싸움이었다.
도합 3회의 침략으로 이루어져 1235년에 경상도지역, 1236년에 전라도지역, 그리고 1237~38년에는 다시 경상도의 경주까지 침입하여 신라시대에 건립되었던 황룡사를 불태웠다. 이에 고려에서는 군민이 합세하여 대항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온수군(溫水郡 : 지금의 온양)의 백성들이 과감하게 싸워 포위한 적을 물리쳤으며, 죽주(竹州 : 지금의 죽산)에서는 15일간에 걸친 몽골군의 맹렬한 공격을 막았다. 한편 강도(강화도)정부에서는 광주와 남경의 주민을 강화도로 오게 하여 강화도 연해에 둑을 더 쌓아 도읍의 방어를 한층 강화했다.
육지에는 야별초를 파견하기도 하고, 각지의 산성에 방호별감을 보내 백성들의 항전을 독려하는 등 침략군의 격퇴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군사적인 열세가 너무 심하여 최우를 비롯한 지도층은 부처의 가호로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 새로운 대장경의 조판에 착수했는데, 이는 적절한 대책이 되지 못했다. 전쟁이 장기화되어 피해가 심해지자 강도정부는 마침내 1238년 12월에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를 몽골에 파견하여 철군을 호소했다.
이때 몽골도 고려의 끈질긴 저항에 지쳐 있었으므로 이듬해 4월에 국왕의 친조를 요구하면서 군대를 철수했다. 그러나 고려는 국왕을 대신해서 왕족인 신안공 전(新安公佺 : 현종의 8대손)을 몽골로 보내었다. 그러자 몽골은 해도에 들어가 있는 민호를 내륙으로 옮길 것, 그 민호의 수를 점검하여 보고할 것, 뚤루게(禿魯花 : 인질)를 보낼 것, 반몽골 행위를 한 고려의 관원을 체포하여 보낼 것들을 요구하며 이어서 국왕의 친조를 촉구했다.
이에 고려는 3번째 조건에만 응하여 왕족인 영녕공 준(永寧公綧)과 귀족의 자제 10명을 뚤루게로 보냄으로써 일단 분쟁을 마무리했다. 그뒤 몽골에서는 태종이 죽어 정치가 복잡해졌으므로 한동안 침략은 없었다.
그뒤 1246년에 구유구(貴有 : 뒤의 정종)가 즉위하고, 1247년 앞서 요구했던 개경환도와 국왕친조가 되지 않은 것을 구실로 아무간(阿母侃)이 이끄는 몽골군이 4차침략을 시작했다.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을 노략질했으나, 이듬해에 정종이 갑자기 죽자 몽골군은 곧 철수했다.
1251년 몽케(蒙哥)가 즉위하여 헌종이 되고나서 고려에 대해 국왕의 친조와 출륙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가 응하지 않자 1253년 여름에 또다시 출병하여 5차침략을 단행했다. 예꾸(也窟) 휘하의 몽골군은 군사공략을 전개하는 한편 강화도에 사자를 보내 국왕의 출륙을 촉구하며 공격했다. 고려정부는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충실도감을 두고 각 영의 군력을 보충하여 수전을 연습시키고, 대륙의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옮기도록 조처했다. 그리하여 실제로 별초군이 몽골군과 교전을 전개하고, 특히 김윤후가 지휘한 충주민들의 영웅적 항전으로 빛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각지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과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므로 고려에서는 결국 개전 이래 처음으로 국왕이 강화도의 새 궁궐에 나와 예꾸가 보낸 사자를 접견했다. 이어서 안경공 창(安慶公淐)이 몽골로 입조의 길을 떠남에 따라 1254년 정월에 몽골군도 철수했다.
그러나 출륙할 때 시중 최항을 비롯한 고려의 대신들이 나오지 않았고 몽골에 항복한 관리들을 처형한 사실을 비판하며 자랄타이(車羅大)가 이끄는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와 6차침략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1254~59년 6년간이나 도합 4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몽골군은 내륙지역을 철저히 유린하여 강화도 고려정부의 굴복을 받아내고자 했다. 강도정부는 경상·전라의 별초군을 뽑아 올려 도읍의 경비를 강화했고, 각지에서도 백성들과 별초군이 몽골군에 대항하여 용전했다. 이때 몽골군도 피해를 입었지만 고려의 피해는 더욱 커서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만 20만이고, 죽은 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1255년 일단 몽골군은 북상하여 철수했다가 다시 침공하여 해도공격을 시도했으나, 강도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책과 입보민(入保民)의 분전으로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듬해 9월에 철군했다. 그후에도 고려가 출륙환도와 국왕의 친조에 전혀 응할 기세를 보이지 않자, 1257년 6월에 다시 와서 국왕의 친조 대신에 태자가 입조하여도 좋다고 밝혔다. 고려도 이 조건에 응하여 몽골군은 철수했으나, 약속과 달리 태자의 동생인 안경공 창을 보냈다.
그런데 이듬해 3월 유경(柳璥)·김준(金俊) 등이 집권자 최의(崔竩)를 제거하고 최씨정권을 종식시킨 무오정변이 일어났다. 이때 자랄타이가 다시 침입을 감행해와서 고려가 약속을 어긴 사실을 추궁하고 국왕의 출륙과 태자의 입조를 거듭 촉구하며, 강화 대안에 군사를 집결시켜 강화도를 위협하는 한편 각지를 노략케 하는 사태가 있었다. 이에 고려는 화의가 불가피하여 1258년 12월에 박희실(朴希實)을 보내어 출륙환도와 태자입조를 약속했고, 이듬해 태자가 몽골로 출발함으로써 양국의 무력충돌은 끝났다.
일반백성들의 대몽항쟁
강도정부와 떨어져 있는 내륙에서는 몽골군 침입에 대하여 정면적 저항보다는 주로 소규모의 유격전을 펼쳤다.
또한 산성에 들어가 피하고 있던 농민들이 저항하여 산성을 중심으로 한 공방전이 주로 벌어지게 되었다. 몽골군은 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대포와 같은 각종 무기들을 동원하기도 하고 성 밑으로 굴을 파들어가거나 성을 불지르는 화공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의 공성전은 광주(1232)·죽주(1236)·충주(1253)·춘천(1253)·장성(1256) 등 여러 지역에서 벌어졌는데 각지에서의 전투는 기록상으로 대략 60건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당시의 집권층인 무인정권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으나, 강화도에 있었기 때문에 내륙전투에 대한 상당한 한계점을 보였다.
따라서 일부지휘관의 선전분투만으로 몽골의 대군을 물리치는 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각 지방에서 스스로의 생존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농민들의 자위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이들은 민병들로서 정부의 별다른 지원 없이 스스로 임시편성의 방어군을 조직하여 침략군과 대결했다. 귀주나 광주에서는 민병이 정부군과 협력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용인·충주·상주·진천 등지에서는 순수하게 농민군만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심지어 용인 처인성에서 침략사령관이 고려 농민에게 사살당하기까지 했다. 고려정부가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몽골과 대적하여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의 좋은 지리적 조건과 수전에 약한 몽골군의 약점도 있었지만, 일반백성들의 끈질긴 항몽투쟁에 의지한 바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대몽강화와 개경환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려 농민들의 생활여건이 극히 악화되었고, 강화도의 고려정부도 재정적으로 타격이 심화되어 무인정권의 지도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정부는 몽골과 타협책을 점차적으로 모색하게 되었고, 그결과 고려태자의 몽골 입조가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몽골도 고려의 반응에 따라 군사침략을 중지하고 사태추이를 관망하게 됨으로써 더이상의 무력침략은 재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1259년에 전쟁이 중단되고도 개경환도가 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259년에 고종이 죽고 새로이 즉위한 원종은 김준 등 무인정권의 반대에 부딪혀 출륙환도를 못하고 있었다.
1268년에는 김준이 같은 무장인 임연(林衍)에게 죽음을 당하고 새로운 집권자인 임연은 강화를 더욱 노골적으로 반대하여 원종을 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몽골의 압력으로 원종이 복위되고, 그러한 상황에서 임연이 등창으로 죽었다. 그의 아들인 임유무(林惟武)가 뒤를 이었는데, 원종에게 제거당함으로써 무인정권은 완전히 몰락했다. 항몽책을 견지하던 무인정권이 붕괴되자 강화 10년 만인 1270년에 원종이 몽골의 군사적 뒷받침을 받아 개경으로 환도했다. 당시 강화도에 있던 주전(主戰)세력은 정부의 조치에 반발하여 삼별초군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진도·제주도 등을 거점으로 항전을 지속했고, 남방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상당히 세력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1273년에 삼별초 항쟁이 진압된 뒤 고려는 1274년과 1281년에 원의 일본정벌에 동원되었으며, 1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원의 정치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려의 왕실은 몽골 황실과 혼인했으며, 또한 고려의 변경지역은 원의 영토로 편입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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