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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의 3개 별초군을 총칭한다. 고종 때 최우가 도적을 잡기 위해 야별초를 설치했는데 뒤에 그 군사가 많아지자 좌·우별초로 나누었고, 몽골의 고려 침입 때 몽골에 잡혀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을 모아 부대를 창설하여 신의군이라 불렀다. 삼별초는 경찰·전투의 임무 외에 도성의 수비와 친위대로서의 임무도 수행했다. 삼별초는 고려의 정규군인 2군6위의 활약이 눈에 띄지 않는 가운데, 1232년 고려 정부가 강화로 천도한 뒤 대몽항전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력으로 활약했다. 무인정권이 붕괴된 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자, 이에 반발하여 1270년 반란을 일으켰다.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우고 개성 정부와 몽골에 대항하여 3년 동안 싸우다가, 1273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섬멸당했다.
좌별초·우별초·신의군(神義軍)의 3개 별초군(別抄軍)의 총칭이다. 고종 때 최우(崔瑀)가 도적을 잡기 위해 용맹한 자를 뽑아 야별초(夜別抄)를 설치했는데 뒤에 그 군사가 많아지자 좌·우별초로 나누었고, 몽골의 고려 침입 때 몽골에 잡혀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을 모아 부대를 창설하여 신의군이라 불렀다.
삼별초가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사〉의 기록에는 최우가 설치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몽골이 고려를 침입한 것은 1231년(고종 18)이고 1232년 기록에 야별초의 기사가 나오므로 최우가 집권한 1219년 이후부터 1231~32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와 달리 신의군에 관한 기사가 1257년에 처음 나오고 좌·우별초에 관한 기록은 그 다음해 기사에 처음 나오므로 그 전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별초라는 임시군대의 편성은 이미 1174년 조위총의 반란 때 나타났다. 별초군은 최우집권기에 중요한 구실을 하며, 특히 대몽항전기에 큰 활약을 했다. 삼별초는 경찰·전투의 임무 외에 도성의 수비와 친위대로서의 임무도 수행했다. 삼별초는 고려의 정규군인 2군6위의 활약이 눈에 띄지 않는 가운데, 1232년 고려 정부가 강화로 천도한 뒤 대몽항전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력으로 활약했다. 자주 강화도에서 나와 전국 각지에서 몽골군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려 경별초(京別抄)로 불리기도 했다( 몽골의 침략).
삼별초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병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공병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사병으로 보는 견해는, 그것을 설치한 사람이 최우였다는 것과 〈고려사〉 병지에 나오는 "권신이 집권하자 이들(삼별초)을 조아(爪牙)로 삼고 녹봉을 후하게 주며, 혹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기도 하고…… 권신은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고 이들은 앞을 다투어 힘을 다했다"라는 기사에 크게 의거한다. 이에 반해 삼별초는 국가 재정으로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지출했다는 사실과, 삼별초는 당시 무인집권자의 사병이었던 도방이나 마별초 등과 엄격히 구분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삼별초를 공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별초가 정부군으로서 독립하지 못하고 권신의 수족이 되어 그 정치권력과 깊이 유착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집권자가 국가의 공병을 사병처럼 이용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무인정권이 붕괴된 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자, 이에 반발하여 1270년(원종 11)에 반란을 일으켰다.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우고 개성 정부와 몽골(원)에 대항하여 3년 동안 싸우다가, 1273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섬멸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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