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최우

다른 표기 언어 崔瑀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1249(고종 36)
국적 고려, 한국

요약 최우는 최충헌의 뒤를 이어 고려 무신정권의 최고집정자에 올랐다.
1219년(고종 6) 최고 집정자가 된 그는 동생을 포함한 반대파를 제거하여 지위를 굳히는 동시에 자신이 축적해둔 금은보화를 왕에게 바치고, 아버지가 빼앗은 공사전민을 주인에게 되돌려주었으며, 부패한 관리를 내쫓고 대신 가난하고 지체 낮은 인재들을 등용했다. 1225년 관리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정방을 자신의 집에 설치했다. 무력지배기구인 사병집단을 의미하는 도방을 확대하여 자신의 호위와 친척 및 외부에 대한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1231년부터 대대적인 몽골군의 침입이 개시되자 1232년 국왕을 받들고 강화로 천도했다. 또한 개성 사람들을 강화로 옮기게 하고, 여러 지역의 백성들도 산성과 해도로 피난하게 하는 등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선정을 베풀기도 했지만 사치와 전횡이 심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본관은 우봉. 뒤에 이(怡)로 개명했다. 아버지는 충헌(忠獻)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추밀원부사로 있다가, 1219년(고종 6) 최충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최고 집정자가 되었다. 그는 동생 향(珦) 등 반대파를 제거하여 지위를 굳히는 동시에 자신이 축적해둔 금은보화를 왕에게 바치고, 아버지가 점탈한 공사전민을 주인에게 되돌려주었으며, 부패한 관리를 내쫓고 대신 한미한 인재를 많이 등용했다.

1221년 참지정사·이병부상서·판어사대사가 되었는데, 동북면병마사가 몽골의 침입이 예상된다는 보고를 올리자 의주·화주·철관 등의 주요지역에 성을 쌓도록 했다. 1223년 황라성을 수축하면서 가병을 동원하고 은병 300여 개와 쌀 2,000여 석을 내어 그 비용으로 사용했으며, 황금 200근으로 13층탑과 화병을 만들어서 흥왕사에 두었다. 1225년에는 정방을 설치하여 사제에서 백관의 인사를 처리했다. 한편 도방을 확대, 내도방·외도방으로 편성하여 내도방은 자신의 호위를 맡게 하고, 외도방은 친척과 외부에 대한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1226년 광벽익대공신 칭호를 받았다. 1227년에는 서방을 설치, 문사들을 등용하여 숙직하면서 정권운영의 고문을 담당하게 했다. 이듬해 오대진국공신 칭호를 받았다. 1229년 격구장을 만들어 도방과 기병 의장대인 마별초를 모아서 격구나 창쓰기·말달리기·활쏘기 등을 하게 하고 재추·기로 등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또한 야간순찰이나 도둑단속을 담당하는 야별초를 새로이 조직함으로써 최씨정권의 무력기반을 확충했다.

1231년부터 대대적인 몽골군의 침입이 개시되자 1232년 국왕을 받들고 강화로 천도했다. 또한 개성민들도 강화로 옮기게 하고, 여러 도(道)의 백성들을 산성과 해도로 피난하게 하는 등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몽골의 침략). 1234년 천도의 공으로 진양후에 봉해졌다. 이듬해에는 각 주와 군에서 일품군을 징발하여 강화도 연안의 제방을 더 높이 쌓았다.

1242년 식읍을 더 받았으며 진양공이 되었다. 이듬해 국학을 보수하고 쌀 300곡을 양현고에 바쳤으며 사재를 내어 재조대장경의 비용으로 충당하게 했다. 선정을 베풀기도 했지만, 사치와 전횡이 심하여 백성들에게 원망도 받았다. 일찍이 기생첩 소생인 아들 만전을 중이 되게 했는데 1248년 병으로 눕게 되자 만전을 환속시켜 항으로 개명하게 하고 좌우위상호군·호부상서로 임명했다. 이어 추밀원지주사로 승직시키고 가병 500명을 주어 권력을 세습하게 했다. 해서·행서·초서에 모두 능했다. 강종 묘종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광렬이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Daum백과] 최우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