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고대 카시트족, 후르리족, 아람족

다른 표기 언어

함무라비의 후계자들은 재위 기간 동안 바빌로니아 왕의 권력과 영토를 많이 잃었다. 아시리아는 다시 독립왕국이 되었고 새로이 등장한 카시트족이 바빌론 제1왕조의 붕괴 뒤 바빌로니아 본토에서 권력을 잡았다(BC 1600경). 바빌론 함락(BC 1650경) 전 약 60년 동안 후르리족은 안티오키아 평원이나 북시리아 각지에 살았다. 바빌론 함락에 이은 암흑시대가 지나간 뒤 후르리족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전역으로 흩어졌다.

이무렵(BC 1500경) 소수의 아리아족이 후르리족에게 협력했다. 이 아리아족은 고대 인도에서 알려진 언어를 썼고 베다에서 볼 수 있는 신들(인드라·바루나·미트라·나사티아 등)을 숭배했던 점에서 나중에 인도에 정착한 아리아족의 일파로 볼 수 있으며, 아마 이동 도중에 부족에서 떨어져나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곧 후르리족을 지배하는 계급이 되었으며 여러 소왕국을 건설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왕국이 미탄니이다.

미탄니는 BC 1500~1360년경 존속했고 북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강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왕국으로서, 서쪽으로 지중해부터 동쪽으로 누지(지금의 키루쿠크)까지 이르렀다. 미탄니 왕국은 봉건제를 토대로 조직되었고 전차를 모는 전사인 귀족계급과 봉신이 있었다. 미탄니에서 가장 뛰어난 지배자는 사우샤타르(샤우슈샤타르:BC 1480경)였다. 이집트 왕 투트모세 3세의 시리아 원정은 사우샤타르 치세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뒤 두 나라의 우호관계는 여러 명의 미탄니 왕녀가 이집트 왕들과 결혼한 데서 입증된다. 이른바 텔엘아마르나 문서에 따르면 이크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도 미탄니 왕가 출신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그뒤 히타이트 왕 수필룰리우마스는 후르리 왕 아르타타마와 동맹하고 카불 지역으로 남하해서 미탄니의 수도 와슈슈칸니를 약탈했다.

미탄니 왕 투슈라타가 그의 아들에게 살해당하자 후르리와 미탄니의 싸움은 얼마 동안 계속되었다. 투슈라타의 아들 마티와자는 수필룰리우마스의 딸과 결혼해 미탄니의 통치자가 되는 동시에 히타이트의 봉신이 되었고, 이후 미탄니는 히타이트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뒤 부상한 아시리아는 히타이트의 위험한 인접국이 되었으며, 아시리아 왕 샬마네세르 1세(BC 1275경~1245 재위)는 유프라테스 강 동쪽 전역을 정복했다. 그의 아들 투쿨티 니누르타 1세(BC 1245~1208 재위) 때에도 메소포타미아는 아시리아 제국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투쿨티 니누르타 이후 아시리아는 쇠퇴했고 메소포타미아에는 아람인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BC 1116~1076 재위)는 세력을 만회해 메소포타미아의 아람 부족 몇을 격파하고 터키 남동부에서 지중해까지 군사행동을 확대했다. 그러나 티글라트의 통치 뒤에 아시리아는 다시 쇠퇴했다. 아람인은 이 시기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일부에서 세력을 확립했고, BC 10세기 동안 시리아에 있던 과거의 많은 히타이트 도시들을 점거했다.

BC 900년경 아시리아의 여러 왕은 새로 영토 확대를 시작해 아시리아 서쪽 경계와 유프라테스 강 중류 유역에서 아람인과 싸웠고 아람인의 여러 왕국을 손에 넣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Daum백과] 고대 카시트족, 후르리족, 아람족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