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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

다른 표기 언어 螺鈿

요약 목공품의 표면을 장식적으로 꾸미는 칠공예 시문기법의 하나.

전이 금속판을 이용한 장식을 의미하듯이 나전은 얇게 간 조개껍질을 여러 가지 형태로 오려 목기의 표면에 감입하거나 붙여 장식하는 것을 통칭한다. 따라서 조개껍질만이 아니라 대모갑·상아·호박 따위를 새겨넣어 장식하는 것도 넓은 의미의 나전에 속한다. 다만 금·은판을 오려붙이는 것은 따로 평탈이라고 한다. 나전이라는 말은 중국·한국·일본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한자어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자개'라는 고유어를 함께 써왔다. 그리고 우리나라 칠공예의 장식기법은 자개를 주로 이용했기 때문에 칠기와 나전칠기라는 용어가 혼용되고 있는 예가 많다.

고려 나전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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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기법

나전

자개보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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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기법이 전래된 초기에는 야광패을 사용하였으나 후대에는 청록빛깔을 띤 복잡한 색상의 전복껍질을 많이 사용하였다. 구공라·오색자개 등으로도 부르는 전복껍질은 한반도의 동남 근해에서 잡히는 것이 가장 영롱한 빛을 발하며 근년에는 진주조개를 사용하기도 한다(→ 할리오티스속).

칠기에다 무늬를 놓아 전복껍질을 붙이려면, 0.3~0.5㎜의 박패(껍질을 갈아서 얇게 만든 것)를 만든 후 이를 물에 담가 유연하게 한 뒤에 거두로 상사(가늘고 길게 썬 것)를 만들거나 줄질을 해서 여러 가지 형상으로 다듬는다.

상사는 기하학적인 무늬나 식물의 줄기 등을 끊음질로 표현하는 데 쓰였다. 상사나 여러 가지 형상으로 만들어진 박패를 붙이는 방법에는 나전의 문양대로 목심을 도려내고 거기에 끼우는 감입법, 문양을 아교나 풀로 붙이는 첩부법, 나전을 잘게 썰어 뿌리는 살부법이 있다.

역사

나전

자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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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기법은 중국 당에서 성행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나전칠기의 변천은 고려시대 이전의 유물이나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고려시대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고려미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물로 나전단화금수문경(螺鈿團花禽獸紋鏡)이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호박과 담청, 녹색의 돌, 청석 등은 미안마 북부의 미트키나와 페르시아, 티베트 원산이어서 수입품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 나전에 관한 문헌상의 첫 기록은 〈동국문헌비고〉의 11세기에 문종이 요의 왕실에 나전칠기를 선물로 보냈다는 것이며, 12세기초부터는 고려의 나전제품이 〈교빙지 交聘志〉의 기록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에 대한 평가는 1123년 고려에 왔던 송의 서긍(徐兢)이 〈고려도경〉에서 "그릇에 옻칠하는 일은 그리 잘하지 못하지만 나전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라고 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고려의 나전장(螺鈿匠)들은 관청수공업체에 소속되어 왕실 소용의 기물을 제작하였다. 통일신라의 제도를 참고로 하던 고려의 관제가 10세기말 성종대에 재정비됨에 따라 나전칠기 제작소도 이 무렵부터 본격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몽고침입 이후인 1272년에는 경함류(經函類)를 생산하기 위하여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기도 했으며 여기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경함들은 대부분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 산재하고 있다.

고려의 나전칠기 유물은 경함을 비롯하여 염주합·향갑(香匣)·불자(拂子), 화장용구인 모자합(母子盒)과 유병(油甁) 등 다양하다. 그 특징은 흑칠 바탕에 나전·대모·은사·동사를 감입하여 다채로운 문양효과를 낸 것이다. 이 시대의 자개는 전복껍질을 종잇장처럼 얇게 갈아서 사용했는데, 이 박패법(薄貝法)은 중국 당에도 없던 것이다.

대모는 조개껍질 대신 거북의 등껍질을 쓴 것을 말하는데, 얇게 간 그 뒷면에 주칠을 하여 우러나오도록 하는 까닭에 복채(伏彩)라고도 하며 국화꽃잎 등에 사용되었다. 재료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대모가 많이 사용되지 못했지만 그 기법은 조선 후기의 화각공예(華角工藝)로 이어졌다. 당초무늬의 줄기나 문양 사이의 경계선 등에 다양하게 사용된 금속선도 고려 나전칠기의 대표적인 특징이며,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끊음질기법으로 대체된다.

조선 초기의 나전칠기는 고려시대의 문양과 기법을 계승하였지만 기술면에서는 현저히 성기고 거칠어졌다(조선시대 미술). 단정하고 정형화된 문양처리도 흐트러지고 공간을 많이 남기는 조선적인 특징으로 변하였고, 수요층도 특수한 소수에서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저변화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와 함께 문양의 내용도 십장생, 문자 모양 등 길상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조선 말기에는 사회구조의 변동으로 나전장들이 관청수공업체에서 독립하여 민영공방을 운영, 저변화된 민간의 수용에 대응하였고 제작활동도 다소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나전칠기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일본적 취향을 반영하는 등 기술전통이 크게 왜곡·변질되기도 하였다. 8·15해방 이후에도 거듭된 사회혼란과 캐슈라는 대용 칠의 범람으로 기술적 퇴보를 거듭했으나 1970년대를 전후하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나전칠기의 기술전통이 점차 활기를 되찾고 있다.

현재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호육성하기 위해 나전칠기장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로, 끊음질은 제54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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