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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목칠공예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목공예 기술이 발달하고 전문 장인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소목장, 대목장을 기본으로 조각장·목장·목소장 등으로 구분되어 직능별로 활발한 제작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소목장은 실내용 가구나 식기·제기 등을 제작했던 장인으로서 목공예 기술의 핵심적 영역을 담당했다.
목차
접기개요
마감재로 옻칠을 쓰는 경우가 많아 목칠공예라고도 한다. 한국은 예로부터 건축물은 물론 가구와 용기류·생산도구 등 공예품의 상당부분을 목재로 제작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목공예 기술이 발달하고 전문 장인(匠人)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목공예 기술을 가진 장인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신라에서는 목척 또는 재인(梓人)이라 했고, 고려시대에는 목업이라 불렀다. 이 무렵까지 기술은 몇 가지로 분화되었으나 그에 따른 별도의 직능별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경공장이 세분화되면서 명칭도 소목장(小木匠)과 대목장(大木匠)을 기본으로 조각장(彫刻匠)·목장(木匠)·목소장(木梳匠)·목혜장(木鞋匠)·안자장(鞍子匠)·목영장(木纓匠)·거장(車匠)·통장(桶匠)·선장(船匠) 등으로 구분되어 직능별로 활발한 제작활동이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소목장은 장(欌)·농·반닫이·사방탁자 등 실내용 수장가구나 식기·제기 등 각종 목재 기명류(器皿類)를 제작했던 장인으로서 목공예 기술의 핵심적 영역을 담당했다. 소품가구류를 제작하는 소목장에 비해 대목장은 규모가 큰 건축일을 맡아 한 데서 붙여진 용어이다.
재료와 특징
한국 목공예의 재료는 그다지 풍족한 편이 아니다. 가래나무·은행나무·오동나무·피나무 등이 판재로 사용되었으며, 참죽나무·물푸레나무·버드나무는 재질이 질겨 요긴하게 쓰였다. 특히 느티나무·느릅나무·들메나무·포구나무 등은 나이테가 선명하여 별다른 장식이 없이 목재 본연의 자연미를 추구했던 조선시대의 고급가구재로 사용되었다.
가구의 문판에는 먹감나무·배나무·박달나무 등을 사용해 조형효과를 높였다. 고대에는 전나무·분비나무·이깔나무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궁중·사대부를 비롯한 특수층 사이에서는 화류·흑단·침향목 등 고급목재를 중국을 통해 수입해 쓰기도 했다. 또한 대나무·버들가지·싸리채도 목공예 재료의 하나로 널리 쓰였다. 남부지방에서만 자라는 대나무는 산지 중심으로 제작활동이 이루어졌지만 버들가지와 싸리채는 한국 전역에 걸쳐 자생했던 보편적인 공예 재료로서 활용도가 매우 높았다(→ 목재). 한국의 목공예품은 건축과 마찬가지로 못을 쓰지 않고 짜맞춤 위주로 제작했으며, 화려한 치장보다는 자연 목리와 결구(結構)의 구조미 구현에 주된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다. 재질상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마감재로 일찍부터 옻칠기술이 발달했으나 흑칠·주칠의 단색 또는 나전칠기에 주력함으로써 조칠(彫漆)·시회(蒔繪)가 중심인 중국·일본의 칠기와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한국 목공예의 역사
한국 목공예의 역사는 재료의 수급과 가공이 다른 재료에 비해 쉬우며 매우 오래되었다.
다만 보존이 어렵다는 재질상의 단점으로 인해 시대를 거슬러올라갈수록 유물의 수가 많지 않아 구체적인 연구가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삼국시대 이전의 유물은 거의 없어 그 실상을 알기 어려우나, 최근 다호리(茶戶里)와 석촌동고분의 목공예품들을 통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던 삼국시대 이전의 목공예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시대의 목공예는 풍속장면이 그려진 5~7세기경의 고분벽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안악3호분과 무용총 등에서는 목재로 만든 다양한 형태의 수레가, 덕흥리1호분·감신총(龕神塚)·매산리사신총 등에서는 평상(平床)이 눈에 띈다. 또한 무용총과 각저총의 식탁과 그 위에 차려진 여러 종류의 칠기류가 주목을 끈다. 비록 그림이지만 내주외흑(內朱外黑)의 칠기 모습이 뚜렷이 확인되며, 사방에서 떠받치듯 긴 4개의 다리를 벌린 식탁은 말발굽 모양[馬足床]의 다리가 특징이다.
서울 특별시 석촌동고분에서 백제 초기에 해당하는 대형의 원형 칠기편이 출토되었고, 김해의 다호리 가야고분에서도 옻칠한 사각접시 및 고배·대바구니 등이 다량 발굴됨으로써 당시 활발했던 목공예 제작활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경주의 적석고분군에서 신라시대의 많은 양의 칠기가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의 목공예 가운데 주목되는 유물은 목칠관(木漆棺) 내의 부장품이다.
특히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두침(頭枕 : 국보 제164호)과 족좌(足座 : 국보 제165호)는 연단(鉛丹) 위에 먹과 백분으로 봉황·초화 무늬 등을 그려넣었으며, 옻칠 바탕에 금판을 오려 귀갑형 문양대를 구획한 기법은 통일신라에서 유행했던 평탈(平脫)기법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어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목공예와 관련이 있는 관서들이 설치되어 보다 조직적인 제작활동이 전개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궤장(机杖)과 소반을 제작하던 궤개전(机槪典), 목기를 만들던 마전(磨典), 버들고리를 만들던 양전(楊典), 옻칠과 평탈 또는 주칠로 문양을 그려넣는 칠전(漆典) 등 목공예 관서가 기록되어 있다. 버들가지로 만든 고리는 의복을 넣어두던 농(籠)의 역할도 겸하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을 전문적으로 만들던 집단은 양수척(楊水尺)이라는 천민들로서 조선시대까지 특정지역에 무리지어 살았다.
이와 같은 제작 여건을 바탕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목칠공예가 더욱 발달하면서 토기는 점차 서민용으로 정착되고 목칠공예는 금·은 기물과 함께 상류계층에서 사용하는 고급공예품으로서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상생활용기가 대량 발견된 안압지 유물들을 통해 확인된다. 안압지의 칠기류는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목심(木心) 제작기술에서 매우 진전된 양상을 보인다. 대접의 형태는 버드나무나 전나무 줄기를 마름모꼴로 쪼개고 서로 잇대어 성형했으며, 기벽이 수직으로 올라간 찬합형태는 나무를 종잇장처럼 얇게 떼내어 여러 겹을 겹쳐 바르는 일종의 타래쌓기 기법으로 성형했다.
그 위에 안팎으로 삼베를 바르고 옻칠을 올려 마감함으로써 그릇의 강도를 높였다. 이밖에 목기의 표면에 얇은 금·은판을 오려 옻칠과 함께 부착하는 평탈기법과 황금빛이 도는 특수도료인 황칠(黃漆)의 존재는 문헌기록이 뒷받침하는 귀중한 목칠공예의 제작형식으로서 주목을 끈다.
고려시대는 불교의 이념적 기반과 통일신라시대의 문화적 성과를 토대로 해 수준 높은 미술문화를 창출했던 시기이다.
목공예도 역시 어느 시기보다 정교하고 세련된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현재 전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목공예품은 모두 20여 점에 이르나 나전칠기가 대종을 이루며, 기능별로는 불교의 의례용이 대부분이다. 나전칠기는 고려·조선 시대를 통해 한국 목공예의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었던 대표적인 양식이지만 고려시대 이전의 유물이 거의 없이 언제부터 제작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고려시대의 나전칠기는 조선시대에 비해 여백이 없이 촘촘하고 규칙적인 당초문양을 정성들여 시문했을 뿐 아니라 기형 또한 당당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어 고려시대 귀족문화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 질적 우수성에 대해서는 12세기초 우리나라에 온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에서 '세밀가귀'(細密可貴), '극정교'(極精巧)로 평가했던 것에서도 잘 입증된다.
고려 나전의 주요기법은 1㎝ 내외의 작은 문양단위들을 몇 개의 부분으로 각각 오려내어 이를 규칙적으로 배치하는 정교한 줄음질과 당초무늬의 곡선에 금속선을 사용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얇게 간 대모(玳瑁)의 뒷면에 색칠해 색이 은은하게 우러나도록 한 대모복채(玳瑁伏彩) 기법은 꽃의 자방(子房) 등에 제한적으로 사용했는데 밝은 나전 빛깔과 어우러져 화사한 장식효과를 낸 것이 고려 나전의 또다른 특징이다.
조선시대의 목공예는 기명의 종류·형태·문양 등에서 전반적으로 고려시대와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기명의 종류는 의례용(儀禮用) 기명보다는 일상용 기명 중심으로 바뀌었고, 형태나 문양 등은 화려한 치장을 삼가하는 대신에 목재의 자연 목리를 살리기 위해 투명칠로 마감했으며, 견실한 결구의 구조미와 뛰어난 기능성, 간결한 선, 명확한 면처리를 통해 격조 높은 공예미의 창출을 새롭게 시도했다. 특히 가구들은 이러한 조선시대 목공예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조선시대 목공예 양식의 창출은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이었던 유교적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이에 의해 고려시대와 형식상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불필요한 장식을 삼가하고 일상생활에서의 견실한 실용적 기능미를 중시하는 제작 태도는 유교의 생재론(生財論)에 기반을 둔 절용과 숭검정신(崇檢精神)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국미의 한 전형이 되었다. 엄격한 남녀유별의 유풍에 따라 남성용의 사랑방 가구와 여성용의 안방 및 주방 가구의 성격이 뚜렷이 구분되는 것도 조선시대 목공예의 한 특징으로 꼽힌다.
조선 초기의 나전칠기는 문양에서 고려시대의 당초무늬 계통을 일부 계승했으나 기형과 조형 등에서는 실용기물 위주로 크게 바뀌었다. 조선 후기 이후에는 서민부유층에까지 폭넓게 저변화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 목공예의 흐름과 특징은 제작여건이 크게 바뀐 근대 이후에도 그 영향이 상당기간 지속되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 대학에 공예과가 신설되고 각종 공목전에서 작가 개인의 창의성을 요구하면서 조형미술의 영역 속에 새롭게 편입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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