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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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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

나전칠기장, 김규장, 2006대한민국명장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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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칠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실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상당수의 한대 칠기가 삼국의 칠기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낙랑 이전인 BC 3세기경의 유적인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 남성리와 황해도 서흥군 천곡리,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경상남도 의창군 다호리 유적에서 발견된 다수의 칠기는 한국 칠기의 역사를 청동기시대로 앞당기고 있다. 발견된 칠기는 원형 또는 정방형의 칠두(漆豆), 칠필관(漆筆管), 칠기개(漆器蓋), 칠궁(漆弓), 청동검의 칼집과 칼자루, 쇠도끼자루와 낫자루 등 다양하며 한대의 칠기와는 조형상으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이때 사용한 옻칠은 중국과는 달리 흑칠·산화철·주사(朱砂)를 배합한 것임이 확인되어 독자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의 칠기 유물은 매우 드물지만 강서고분에서 건칠관(乾漆棺)의 파편과 강서 우현리 중묘에서 채화흑칠기(彩畵黑漆器)의 단편이 발견되어 칠기를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것으로는 19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에서 칠관·채화두침(彩畵頭枕)·채화금장족좌(彩畵金裝足座)·채화족좌 등 채화칠기류가 발견되었다. 익산 미륵사지에서는 목심흑칠(木心黑漆) 접시가, 석촌동 토광묘에서는 거치문 칠반(漆盤)의 잔편이 칠잔·칠괘(漆櫃)와 함께 발견되었다. 신라의 것으로는 5세기 이후의 고분에서 상당량의 칠기가 발견되는데, 주로 칠반·조형칠배(鳥形漆杯)·고배칠편(高杯漆片)·칠화기편(漆畵器片) 등 용기로서 우수한 칠기들이 많이 제작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또한 조양동 고분에서 옻칠된 금속유물이 발굴되었다. 당으로부터 새로운 문화를 적극 도입했던 통일신라시대에는 일상용기로서의 칠기가 다른 기물보다 훨씬 많이 사용되었음이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33점의 칠기와 100여 점의 칠기편을 통해 확인되었다.

명문칠기·목심칠현·화형칠장식·목심칠기·주칠빗 등이 주요유물이며, 칠기류의 대부분은 내주외흑(內朱外黑)으로 되어 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은평탈보상화문경(金銀平脫寶相華紋鏡)과 백동금은평탈경(白銅金銀平脫鏡)이 주목된다. 평탈이란 〈삼국사기〉에 '평문'(平文)이라 기록되어 있는 칠기의 장식기법으로 옻칠한 위에 아주 얇은 금판이나 은판을 문양에 따라 오려붙인 후 다시 옻칠을 해서 갈아내는 방법이다.

또한 나전단화금수문경(螺鈿團花禽獸紋鏡:호암미술관)은 소라나전·호박·터키석 등으로 장식된 특이한 예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에는 칠전(漆典)이란 관서(경덕왕 때 飾器房으로 개칭)가 있었고, 관영의 공장에서 칠기가 조달되었다고 하므로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칠기제작을 위해 힘썼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나전상감칠기수법은 12세기 중엽의 청자상감기법이나 이보다 앞선 청동은입사기법 등과 함께 대표적인 고려 공예기술이다.

1123년 국사로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그릇에 옻칠하는 일은 그리 잘하지 못했지만 나전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나전칠기가 고려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그 의장과 기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고운 자개편을 사용한 꽃무늬나 동선(銅線)을 이용한 곡선의 표현과 대모복채 등이 특징이며, 국당초(菊唐草)를 주로 하는 자개무늬는 정연하고 조밀한 의장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장식이 없는 무문칠기도 많으며 목제나 협저(夾紵)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고려사〉 원종 13년(1272)에 의하면 나전기의 제작을 감독하는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이 설치되었다고 하며, 또한 궁정조도(宮庭調度)로서 나전기를 제작하던 곳으로는 중상서(中尙署)가 있어서 이곳에는 화장(畵匠)·소목장(小木匠)·나전장(螺鈿匠)·칠장(漆匠)을 두어 각각 여러 공정을 분업적으로 수행했다고 한다.

일본 나라[奈良] 당마사(當麻寺) 소장의 나전대모국당초문염주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나전구갑복채국당초문봉과 나전묘금포류수금분향갑,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의 나전국화문경함, 일본 교토 북촌(北村) 미술관 소장의 나전목단당초문경함 등은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밖에 칠항(漆缸)·주칠탁잔(朱漆托盞)·하회가면 등에 광범위하게 옻칠이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불교적인 의장을 이어받았지만 18세기경에는 서서히 화조(花鳥)와 자연풍경 같은 회화적 문양이 나전칠기에 나타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전국의 각 군·현마다 옻나무의 그루수를 헤아려 3년마다 대장에 기재해놓도록 명시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관(棺)에 옻칠하는 것은 왕의 직계에 한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정책적으로 옻칠의 수급을 제한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말과 19세기초에는 가구류에서부터 각종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옻칠이 보편화되었다.

이것은 왕권의 약화로 옻칠이 민간에까지 보급되면서 대중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칠기들은 흑칠·주칠 위에 문자·십장생·쌍룡·학·연화·사군자 등이 나전으로 시문된 목심칠기이다. 이들 칠기의 문양은 우리 민족의 기복관(祈福觀)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 후기 칠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나무·종이·대나무·금동·가죽 등에 옻칠된 무문칠기도 상당수에 이른다. 창덕궁에 소장되어 있는 주칠나전이층장·주칠나전농·주칠나전문갑·화류화조자수병·쌍룡문주칠원반·용봉문지장합·인궤·교피인궤·어도·주칠용교의 등은 주칠로 화려하게 장식된 조선왕실의 훌륭한 유품이다.

이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목제화약통·목조도색도형표자(木彫塗色桃形瓢子)·지제건칠표자(紙製乾漆瓢子)·죽제칠합(竹製漆盒)·나전함지·나전빗접·나전침(螺鈿枕),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나전상(螺鈿箱)·관대함(冠帶函)·나전베갯모·나전반짇고리·나전반·찬합·나전전통(螺鈿箭筒), 온양 민속박물관 소장의 대모흑칠팔각함·어피흑칠퇴침, 한국자수박물관 소장의 지승석(紙繩席)·대자·나전빗접 등은 생활 속의 아름다운 옻칠기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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