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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4세기경부터 고대국가로 팽창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여 668년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될 때까지의 고구려 시대의 미술.
우리나라 고대미술의 발전에 선도적 구실을 하였다. 특히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난 고구려 미술에는 북방 유목민족의 기질과 고조선의 전통과 낙랑문화 등이 융합되었고, 중국 화북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앞서 발전하면서 고분미술과 불교미술을 중심으로 백제와 신라는 물론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미술품은 고분벽화를 제외하고는 매우 희소하지만 삼국미술을 주도했던 선진성과 함께 특유의 북방적인 강건함과 역동성을 각 분야에 걸쳐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회화
중국의 영향을 받아 4세기경부터 대두한 고분벽화를 통해 크게 발전하였다.
계세사상에 토대를 두고 지배계층의 사후세계를 장엄화하기 위해 조성된 고구려 고분벽화는 수도였던 통구(通溝)와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성행하여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유적을 남겼다. 현재까지 알려진 80여 기의 고분벽화는 5세기 중엽경까지, 즉 초기에는 묘주의 초상을 중심으로 다루어진 풍속인물화가 대종을 이루면서 후한대(後漢代)의 회화양식을 크게 반영하였다. 묘주초상의 경우 357년의 안악3호분과 408년의 덕흥리고분의 3각형 구도, 신상(神像)과 같은 자세, 유형화된 모습, 도안적인 착색법 등에서 후한대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6세기 중엽까지, 즉 중기에는 무용총(舞踊塚)과 각저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의 인물풍속화와 함께 사신도(四神圖)가 다루어지기 시작했으며, 묘주의 초상은 종래의 부부단독상에서 병좌상으로 바뀌면서 보다 서사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초기에 비해 중기에는 불교적인 색채가 짙어지고 인물풍속화의 내용이 다양해졌으며 표현법에서도 고구려적인 힘찬 움직임과 기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중기에 이르러 고구려화된 고분벽화는 668년 멸망할 때까지, 즉 후기에는 묘주의 초상과 인물풍속화가 없어지고 사신도 중심이 되면서 더욱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강서대묘와 통구사신총(通溝四神塚) 등에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듯이 통일적인 구성법, 입체적인 묘사법, 채색법에 의해 율동적이고 박진감 넘친다.
이러한 고구려 고분벽화의 흐름과 양식적 특징은 백제와 신라에 영향을 미쳐 고분벽화의 발생과 함께 고분공예화의 발전을 초래했으며, 멸망 후에는 유민들을 통해 발해와 일본 등지로 그 전통이 파급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이러한 고분벽화 이외에 불교회화도 372년 이래로 크게 성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유품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볼 수 없다. 다만 610년 일본에 건너가 호류 사[法隆寺]의 금당벽화를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담징의 활동을 비롯하여 〈천수국만다라수장 天壽國曼茶羅繡帳〉의 밑그림을 그린 가서일(加西溢)과 아스카[飛鳥] 시대의 불화공으로 보호 육성된 고구려 출신의 씨족화사인 황문화사(黃文畵師)와 산배화사(山背畵師)의 활약,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호류 사 소장의 〈옥충주자 玉蟲廚子〉 등을 통해 그 선도적 역할과 우수성을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고구려 서예
북조서법에 토대를 두고 강건하고 활달한 기풍을 형성하였다.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의 서체는 북위의 예서법을 가미하여 새긴 것으로 힘차고 웅장하면서 질박한 느낌을 자아내며, 광개토왕의 신하였던 모두루의 묵서묘지명은 예서의 풍미가 담긴 해서로서 활달하고 분방한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통은 6세기로 이어져 539년 추정의 연가7년명금동불입상의 광배명문과 569년 추정의 평양성 석각명의 해서체에는 북조의 기개가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7세기초에는 이러한 서풍에 토대를 두면서 당시 중국의 대가 구양순의 글씨를 구하고자 하는 등 구체 수용에 적극성을 띠었으며 이와 같은 경향은 통일신라로 계승되었다.
고구려 조각
372년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불교조각이 대종을 이루었다. 지리적으로 중국의 화북지역과 가까웠던 탓으로 북위와 동위 및 북제(北齊)·북주(北周)의 북조계 불상양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전개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불교조각 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예는 539년에 제작된 연가7년명금동불입상으로, 이 상에서는 북위 후기와 동위 초기의 양식을 토대로 보다 단순하고 강직한 느낌을 주는 고구려적인 특징을 형성하였다.
가늘고 긴 얼굴 위를 엷게 흐르는 심오한 미소, 예리한 각법, 힘있게 뻗친 옷자락 등은 북위불에 기반을 두고 고유화된 6세기 전반경 고구려 불교조각의 특색을 보여준다(→ 불상). 이러한 양태는 56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과 571년 추정의 신묘명금동삼존불입상을 거치면서 광배 무늬의 입체화와 더불어 얼굴 모습이 둥글게 되고 각법과 옷자락 등이 질감에 맞추어 부드럽게 누그러지는 등의 변화가 나타난다.
특히 6세기 후반경의 유품으로 추측되는 평양 부근 원오리 폐사지에서 출토된 니불들은 전체적으로 세련된 조각감각과 함께 사실적으로 진전된 양태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동위불상에 기반을 두고 변형된 평안남도 평천리 출토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의 양식과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는 후대의 반가사유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불교조각은 중국 북조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양식을 수용·발전시키면서 우리나라 고대조각의 전개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고구려 건축
건축은 궁궐건축과 귀족주거건축, 사찰건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궁궐건축의 경우 평양의 안학궁지(安鶴宮址)를 통해 배치양식과 함께 중국과 비견되는 방대한 규모를 엿볼 수 있다.
각 건축물의 목조기법은 고분건축에 그려진 건물그림이나 건물의 세부모습에 의해 짐작할 수 있는데, 배흘림이 있는 원주와 기둥머리의 비교적 소박단순한 두공양식(枓栱樣式) 등에는 중국의 후한에서 북위 사이의 기법이 반영되어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나 우진각지붕으로 만들고 지붕 용마루 끝에는 치미를 달았으며, 처마 끝에는 막새기와를 장식하는 등 근대 이전의 전통적인 목조건축과 기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매우 발달된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귀족의 주거건축 중 부엌이나 창고 등 부속건물의 경우에는 기둥 위에 두공을 돌리지 않는 도리집구조로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며 지붕에 초가나 너와를 쓰기도 하였다.
사찰의 가람배치는 금강사지(金剛寺址)로 생각되는 평양 청암리사지(淸岩里寺址)와 정릉사지(定陵寺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삼금당일탑식으로 이러한 배치양식은 백제를 거쳐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탑은 초기에 목탑이 주류를 이루었던 듯하며 497년 세워진 금강사지에는 한 변의 길이가 10m에 이르는 팔각목탑의 유구가 남아 있어 장대한 규모를 엿볼 수 있다.
고구려 공예
도굴 등으로 인해 현재 전하는 유물이 백제나 신라에 비해 희소한 편이지만 고구려의 공예도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화려한 직조 및 염색공예를 비롯하여 칠공예·금속공예·토제공예 등에서 선도적인 역할과 함께 고구려적인 특징을 형성하였다. 특히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출토된 금동투각용봉문장식은 1㎝ 두께의 나무판 위에 붙인 모자형으로 중앙에는 연주를 돌린 원 속에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를 두고 그 위에 봉황 1마리, 아래에는 2마리의 용을 투조한 것으로 율동감 넘치는 곡선표현과 섬세한 기법 등에서 고구려 금속공예의 뛰어난 역량을 엿볼 수 있다.
투조판 뒤에는 비단벌레 겉날개를 깔아 영롱한 색채가 투조구멍으로 비치게 하여 장식효과를 높였는데, 이것은 삼국시대 금속공예의 독특한 기법으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평양 만달산 7호분에서 출토된 굵은고리귀걸이와 가는고리귀걸이는 수식이 작은 것이 특징인데, 삼국시대 귀걸이의 범본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토기는 신라·가야지역에서 높은 굽이 달린 회청계 경질토기가 많이 보이는 데 비해 연질·와질계로 만든 회색·흑색의 굽이 없는 실용적인 것이 제작된 점이 다르다.
이밖에 고분에서 황록·황갈색의 연유도기와 부뚜막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일반토기에 비해 정교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와당에서는 귀면와를 비롯하여 고구려 특유의 힘이 깃들어 있는 연꽃무늬 숫막새기와 등이 일본 아스카 시대의 와당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분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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