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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4세기경부터 고대국가로 팽창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여 668년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될 때까지의 고구려 시대의 공예 미술.
도굴 등으로 인해 현재 전하는 유물이 백제나 신라에 비해 희소한 편이지만 고구려의 공예도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화려한 직조 및 염색공예를 비롯하여 칠공예·금속공예·토제공예 등에서 선도적인 역할과 함께 고구려적인 특징을 형성하였다. 특히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출토된 금동투각용봉문장식은 1㎝ 두께의 나무판 위에 붙인 모자형으로 중앙에는 연주를 돌린 원 속에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를 두고 그 위에 봉황 1마리, 아래에는 2마리의 용을 투조한 것으로 율동감 넘치는 곡선표현과 섬세한 기법 등에서 고구려 금속공예의 뛰어난 역량을 엿볼 수 있다.
투조판 뒤에는 비단벌레 겉날개를 깔아 영롱한 색채가 투조구멍으로 비치게 하여 장식효과를 높였는데, 이것은 삼국시대 금속공예의 독특한 기법으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평양 만달산 7호분에서 출토된 굵은고리귀걸이와 가는고리귀걸이는 수식이 작은 것이 특징인데, 삼국시대 귀걸이의 범본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토기는 신라·가야지역에서 높은 굽이 달린 회청계 경질토기가 많이 보이는 데 비해 연질·와질계로 만든 회색·흑색의 굽이 없는 실용적인 것이 제작된 점이 다르다.
이밖에 고분에서 황록·황갈색의 연유도기와 부뚜막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일반토기에 비해 정교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와당에서는 귀면와를 비롯하여 고구려 특유의 힘이 깃들어 있는 연꽃무늬 숫막새기와 등이 일본 아스카 시대의 와당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분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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