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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여러 승려들이 한데 모여 불도를 닦는 곳으로 후세에 절·가람이라 부르게 되었다. 석가모니의 사리와 그것을 담은 그릇, 화장에 사용한 숯 등을 보관하려고 스투파라는 반원형의 무덤을 만든 것이 불교사찰의 효시가 되었다. 사찰의 주요구조물은 금당과 사리를 모신 탑이므로 사찰 구성도 탑과 금당의 관계로 배치 형식이 분류된다.
불교가 중국·한국·일본 등으로 전파됨에 따라 절도 각기 고유한 형태로 발전되었다. 중국의 절은 주로 탑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초기에 사찰이 조성되었는데 중앙에 하나의 탑을 중심으로 구성된 형식이었다가 통일신라시대에 탑이 2개로 분화되는 사찰로 변했다. 고려시대부터는 산지가람배치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는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인도어의 상가라마(Saṃghārāma)는 한문으로는 승가람마(僧伽藍摩)로 표기되며, 승가(僧伽)란 중(衆), 람마(藍摩)란 동산[園]의 뜻으로 이는 중원(衆園), 즉 여러 승려들이 한데 모여 불도를 닦는 곳이다.
이것을 후세에 절[寺]·가람(伽藍)이라 부르게 되었다.
석가모니의 사리와 그것을 담은 그릇, 화장에 사용한 숯 등을 나누어 보관하기 위해 스투파(Stupa)라는 반원형의 무덤을 만든 것이 불교사찰의 효시가 되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종교로서 정착되자 스투파가 대형화되고 장식이 화려해지면서 스투파를 중심으로 한 가람이 지속되던 중 BC 2세기경부터 마치 이집트 석굴신전의 출현과 같은 일석굴사원(一石窟寺院)이 유행했다. 이는 불교의식인 선(禪)과 기도의 새로운 양식과 의식에서 연유된 것으로 건축적인 내부공간이 필요해졌음을 뜻하며, 사리를 안치한 탑인 스투파에서 불상의 출현으로 인해 공간적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음을 의미한다.
불교가 중국·한국·일본 등으로 전파됨에 따라 가람도 각기 고유한 형태로 발전·전개되었는데 중국은 2세기말부터 주로 탑을 중심으로 가람이 조성되었다.
가람배치의 형식은 중국의 궁궐건축과 인도의 불탑(佛塔) 요소가 복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이것이 한국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사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조물은 존상(尊像)을 봉안한 금당과 사리를 모신 탑이다. 따라서 가람의 구성에 있어서도 탑과 금당과의 관계에 의해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이탑일금당식(二塔一金堂式)·무탑식(無塔式) 등으로 배치 형식이 분류된다.
우리나라에는 AD 4세기 후반에 불교가 도입되면서 고구려에서는 375년(소수림왕 5)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가 창건되었고, 백제에서는 385년(진사왕 1)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창건하고 10명의 승려를 두었으며, 신라에서는 544년(진흥왕 5) 2월에 흥륜사(興輪寺)를 조성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각 나라에 최초로 창건된 이들 사찰의 위치와 규모 등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어 그 모습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가까운 중국으로부터 가람구성도 함께 도입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시대에 평양에 세워진 청암리사지(淸岩里寺址)는 남아 있는 사지 중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가람배치로 추정된다. 이 사지는 중앙에 팔각의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과 서에 당(堂)이, 남으로는 중문지(中門址), 북으로는 동서의 당보다 큰 당이 있는 일탑삼금당식이다.
이는 〈사기 史記〉의 천궁서(天宮書)에 나타난 오성좌(五星座)의 구성을 그대로 적용해 지상에 재현시킨 중국 궁궐과 유사한 배치원리를 가진 것이다. 이와 유사한 배치를 한 가람으로서 정릉사지(定陵寺址)가 있는데 중앙에 팔각의 목탑지를 중심으로 좌우에 당우를 마주보게 배치하고, 탑지의 북측으로 회랑을 경계로 하여 금당원이 있다. 이 사지는 청암리사지와는 달리 금당원과 탑원이 회랑을 경계로 하여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지로는 군수리사지·동남리사지·금강사지·정림사지·미륵사지 등이 있다.
이들 가람의 구성은 대부분 남북축선상에 중문·탑·금당·강당을 일직선상으로 배치한 소위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이다. 익산의 미륵사지는 이와 같은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가 중원과 동·서원으로 나뉘어 구성된 '品'자 형의 대규모 가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제의 불교).
신라에서는 분황사와 황룡사 등의 가람지가 있는데, 황룡사지는 백제의 가람배치와 유사한 일탑식에 금당이 횡으로 배열된 일탑삼금당식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탑이 금당 앞에서 좌우 2개로 분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탑과 당과의 관계에서 불상을 모신 금당이 탑(사리)보다 더욱 중요한 예불의 대상이 되고, 탑은 하나의 상징적 조형물 역할을 하게 되면서 나타난 배치 현상이라고 추정된다.
당시에 창건된 가람으로서는 사천왕사·감은사·불국사 등이 있는데, 이들 가람은 이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를 보인다. 통일신라 하대에 들어서면서 가람은 이전의 평지에서 구릉이나 산지로 입지가 변하면서 그 배치 형식도 이전의 정연한 모습에서 자연지세와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화된다.
이는 당대(唐代)에 널리 유행하기 시작한 선종(禪宗)의 영향으로 외형의 격식과 형식보다는 내재된 내용에 더욱 비중을 두어 구도(求道)의 길을 걷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가람은 부석사·해인사·범어사·화엄사 등이다.
고려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모든 가람은 자연지세와 어울리는 입지 및 배치를 한 산지가람배치가 주류를 이루게 되나, 불일사나 흥왕사 등과 같이 이전의 일탑식 또는 이탑식의 가람배치 형식을 따른 가람도 함께 창건되었다(→ 고려의 불교). 또한 중기 이후에는 산신각·칠성각과 같은 도교나 민간신앙의 예배대상을 불교에서 습합하는 현상이 나타나 가람은 복잡한 배치양상을 띠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정책으로 말미암아 특별하게 나라의 지원을 받는 몇몇 사찰을 제외하고는 불사의 건립이 위축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찰들이 주불전 앞의 중정을 중심으로 문루·승방·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지는 산지가람배치로 건립되었다. 청평사(淸平寺)와 봉은사(奉恩寺)는 이러한 예이며, 이전에 중요한 예불의 대상이었던 탑은 규모가 축소되거나 소멸되는 경향도 나타났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삼국시대 초기에 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되면서 예불과 강학을 위한 공간으로서 가람이 조성되었는데 고구려에서는 일탑삼금당식, 백제에서는 일탑일금당식, 신라에서는 일탑삼금당식의 가람배치가 주류를 이루었다.
모두 중앙에 하나의 탑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가람구성을 보이다가 통일신라시대에 탑이 2개로 분화되는 이탑식 가람으로 변했다. 고려시대부터는 풍수지리설과 선종 등의 영향으로 산지가람배치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는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가람배치의 변화는 당시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 요인과 불교 자체의 예불대상 및 종파의 교리변화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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