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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웃음의 화가
프란스 할스
Frans Hals출생 | 1581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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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66년 08월 26일 |
국적 | 네덜란드 |
대표작 | 〈해골을 들고 있는 남자〉, 〈하를럼의 성 아드리안 시민군의 장교들〉, 〈웃고 있는 기사〉 등 |
네덜란드의 초상화가이자 풍속화가로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프란스 할스는 네덜란드의 초상화를 창시하고 완성한 인물로, 네덜란드의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이자 풍속화가로 꼽힌다. 그는 얼굴 표정과 감정, 분위기를 표현하고, 인물들의 동작을 즉석에서 포착해 생생하게 재현하는 데 탁월했다. 〈흥겨운 사람들〉, 〈유쾌한 주정꾼〉 등의 작품에서는 순간적인 미소를 포착하는 그의 재능이 단연 돋보인다. 후기의 몇 작품을 제외하면 그의 작품 대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삶의 모습은 유쾌하고 자유분방하기 그지없어 관람객마저 즐겁게 만든다. 때문에 그는 ‘웃음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베를린 분리파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화가 막스 리버만은 “나는 할스의 그림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란스 할스의 생애나 작품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1581년경 플랑드르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났으며, 1591년 가족과 함께 하를럼으로 이주한 후에는 평생 그곳에서 활동했다. 네덜란드의 조르조 바사리로 일컬어지는 미술사가이자 풍속화가 카렐 반 만데르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1610년 하를럼 성 루가 길드에 등록하여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활동을 시작했던 당시 네덜란드는 경제적 번영을 중심으로 각종 문화와 산업이 성장하고 있었고, 그의 활동 무대인 하를럼은 암스테르담에 뒤이어 네덜란드 금융과 경제의 중심지였다. 이런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유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초상화를 비롯해 장식용 정물화, 풍경화 등을 주문하면서 미술 시장도 커졌다. 할스는 네덜란드 중산층과 교류하면서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전하는 작품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은 1611년작 〈야코부스 자피우스의 초상〉인데, 그마저도 일부가 전한다. 할스는 현대에 들어서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지만, 19세기 중반까지는 ‘유행에 뒤쳐진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많은 작품이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그림으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해골을 들고 있는 남자〉이다. 마치 스냅 사진을 찍듯 등장인물의 순간적인 포즈와 표정을 생생히 포착해 내는 그의 능력은 이 무렵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는데, 이런 표현 방식은 당대에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자유분방하고 활력이 넘치는 큼직한 붓놀림으로 그려 낸 인물들은 자세가 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고, 혈색 역시 생생하다.
1616년, 그는 등신 크기의 집단 초상화 중 첫 번째 작품인 〈성 조지 시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를 그렸다. 여기에서도 그는 각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를 개성 있게 표현하는 한편, 인물들의 성격을 드러내고 생동감을 부여했으며, 구성에서도 인물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당대의 집단 초상화에서 볼 수 없던 혁신적인 방식이었다. 그는 이 초상화를 통해 큰 명성을 얻었다.
할스는 1620년대와 1630년대에 엄청난 명성을 누리며 대형 집단 초상화들을 주문받았다. 〈하를럼의 성 아드리안 시민군의 장교들〉, 〈하를럼에서 열린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를 비롯해 〈암스테르담 라이니에르 레알 대위와 C. M 블라우 중위〉 등 실물 크기로 제작된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보이며, 얼굴 주름과 손동작, 옷 주름 하나까지도 예리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귀족 후원자들의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렸을 뿐 아니라 〈류트를 연주하는 어릿광대〉, 〈흥겨운 사람들〉, 〈유쾌한 주정꾼〉, 〈집시 소녀〉, 〈말라 바베〉 등 술 마시는 사람, 젊은 여인, 노래를 부르는 사람 등 평범한 인물들을 화폭에 담았다.
그가 인물의 찰나적인 포즈와 표정을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스케치를 하지 않고 단번에 그림을 그리는 실력과 빠르고 자연스러운 붓놀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준비 단계 없이 캔버스에 바로 그림을 그렸으며,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덧칠을 해 작품을 완성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작업들은 고도의 계산 아래 이루어졌다. 그는 먼저 약간의 물감을 칠해서 질감을 부여한 다음 밝게 강조해야 할 부분,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부분은 마지막 단계에서 추가로 처리했다.
그럼으로써 즉흥성을 포착한 동시에 인물의 혈색까지 살아 숨 쉬는 듯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런 한편 세심하게 다양한 톤의 검은 색조를 사용하여 인물에 우아함과 기품을 더했다. 〈암스테르담 라이니에르 레알 대위와 C. M 블라우 중위〉를 본 반 고흐는 “여태껏 이보다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유일하다. 들라크루아 역시 열광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할스의 전성기 작품은 유쾌하고 해학적인 면모가 가득 넘쳐 나는 반면, 중년 이후 그린 작품은 이런 특질이 사라지고 어두운 분위기를 풍긴다. 〈코이만스 가족의 초상〉, 〈여인의 초상〉, 〈하를럼의 성 엘리자베트 병원 관계자들〉,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다니엘 반 아켄〉 등과 같은 작품에서는 어딘지 그늘져 보이고 세상사에 지쳐 초탈함까지 느껴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는 높은 명성을 누리며 많은 돈을 벌었으나 경제적인 부분에는 문외한이었던지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결국 파산 선고를 받을 지경에 이르러, 1662년에는 시 당국으로부터 빈민 연금을 받아 생활했으며, 말년에는 하를럼의 양로원에서 지내다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러한 불운에도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으며, 말년에 들어 인간의 고뇌와 비극에 대한 깨달음이 느껴지는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구도가 단순화되고, 색채 사용이 절제된 반면, 흑백의 색조를 더욱 폭넓고 다양하게 구사하여 장중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색채가 최소화된 것은 물감을 살 수 없을 만큼 궁핍했기 때문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두세 가지 색만으로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한 셈이었다. 말년에 그린 〈하를럼 양로원의 여성 이사들〉, 〈하를럼 양로원의 이사들〉 등은 할스의 이런 특징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심리 묘사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들을 그릴 때 그는 여든이 넘은 노인으로, 손이 떨리고 시력이 약해져 형태를 비례에 맞춰 제대로 그릴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할스가 죽은 후 그의 작품들은 유행에 뒤떨어진 작품으로 취급받으며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테오필 토레 등의 비평가들이 즉흥적이고 유쾌한 그의 작품을 네덜란드의 상징적인 표현 방식으로 인정하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1865년 〈웃고 있는 기사〉를 둘러싼 하트포트 후작과 로스차일드 남작의 치열한 경매 경쟁은 그가 네덜란드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조했다.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양식, 빠르고 활달한 붓 터치와 물감 덧칠 기법은 마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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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친 100인의 예술가를 소개한다. 회화, 판화, 조각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역사와 예술의 관계의 흐름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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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프란스 할스 –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김영은,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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