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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인 100
인 식민지의 비애를 미로 구현한 화가
이인성
李仁星출생 | 1912년 08월 29일, 대구 남성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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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0년 11월 04일 |
대표작 | 〈가을의 어느 날〉, 〈경주의 산곡에서〉, 〈한정〉, 〈카이유〉, 〈여름 실내에서〉 등 |
조선의 향토적인 미를 구현하여 원시성과 서정성이 강하게 배어나는 작품을 남겨 ‘조선의 고갱’이라고 불린다.
이인성은 대표적인 근대 서양화가 중 한 사람으로, 조선의 향토색을 표현하여 일제 강점기 식민지 백성의 비애를 미적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된다. 그는 후기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양식을 바탕으로 소재와 색채 표현에 있어 조선의 미를 구현했다.
이인성은 1912년 8월 29일 대구 남성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양친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보통학교 역시 11세가 되어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3학년 때 담임선생의 권유로 도쿄에서 열린 세계아동작품전에 출품해 특선을 수상했으며, 6학년 때는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으로 개인 부문 특선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집안 형편 때문에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했으나, 사생대회에서 이인성을 눈여겨본 서양화가 서동진의 배려로 그가 운영하던 대구미술사에 기숙하며 그림을 배울 기회를 얻었다.
1929년, 18세 때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수채화 〈그늘〉로 입선했고, 1931년 제10회 선전에서는 수채화 〈세모가경〉으로 특선을 받았다. 이인성의 재능을 높이 산 대구 지역 유지들이 그의 도쿄 유학을 주선해 주었다. 이인성은 이러한 후원으로 1931년 미술용품을 만들던 킹 크레용 회사에 취직하여 그곳 화실에서 공부했으며, 이듬해 도쿄의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935년까지 미술학교에 적을 두고 도쿄와 대구를 오가며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1932년, 선전에서 〈카이유〉로 특선을, 그해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제전)에서 〈여름 어느 날〉로 입선을 차지했다. 그는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의 천재 소년 이인성 군’이라고 소개되는 등 한국과 일본에서 젊은 천재 서양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1944년 마지막 선전이 개최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으며, 일본 문부성 미술전람회와 제전, 광풍회전 등에서도 수차례 입선과 특선을 수상하며 ‘조선 화단의 귀재’라고 불렸다.
1935년, 이인성은 대구로 돌아왔고, 그해 대구 남산병원 원장 김재명의 딸인 김옥순과 결혼하면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이듬해 ‘이인성의 양화연구소’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했으며, 1937년에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선전의 추천 작가가 되었다.
짧은 그의 인생에서 20대의 젊은 날들이 예술가로서의 전성기였다. 그의 대표작 〈가을의 어느 날〉, 〈경주의 산곡에서〉, 〈한정〉 등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는 수채화로 그림을 시작했으나 유화로 매체를 바꾼 지 2∼3년 만에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유화로 완성했다. 그는 이미 〈카이유〉, 〈여름 실내에서〉 등에서 강렬한 원색 사용, 짧고 조밀한 붓 터치 등 수채화로 표현하기 힘든 강렬한 작풍을 선보인 바 있었다. 유화를 사용하면서 이런 기교를 더욱 발전시켜 거칠면서도 강한 붓 터치, 치밀한 공간 구성, 강렬한 원색 사용, 두터운 마티에르 등 후기 인상주의 기법에 더해 향토성이 묻어나는 색을 사용하여 조선의 토속성을 살리는 화풍을 형성했다.
무엇보다 이인성은 풍경과 인물을 결합한 구상화를 조선 화단에 최초로 도입한 화가이다. 〈가을의 어느 날〉은 한국 최초의 구상풍경화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가을 들녘을 배경으로 여인과 소녀가 화면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림 속 배경은 현실의 이미지가 아닌 작가가 재구성한 풍경이라는 데 혁신성이 있다. 또한 그때까지 풍경화에서는 인물이 배경의 일부로 처리되었으나 이 작품은 인물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삼는 독창적인 구도를 취하고 있다. 청명하고 푸른 가을 하늘과 짙은 흙빛을 한 인물의 피부색, 불그스름한 흙색은 원시적인 강렬함을 풍기는 한편, 조선의 흙색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추구한 이런 향토색은 〈경주의 산곡에서〉, 〈한정〉 등으로 이어지며 더욱 발전했다.
이인성은 이런 작품들을 통해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원시 세계로의 회귀를 추구했으며, 이것을 조선의 땅과 들녘, 즉 향토라고 표현했다. 그는 1935년 〈신동아〉에 기고한 〈조선 화단의 X광선〉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자기 개성을 존경할 필요가 있다고 믿으며, 자기 향토를 영원히 떠나서는 도리어 실망성이 생기리라고 생각됩니다. 근본적 색채는 어머님의 뱃속에서 타고난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출생 시의 타고난 자연이며 위대한 자연의 힘이 아닐는지.
1942년, 이인성은 아내와 사별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는 1940년대에 주변 인물이나 정물을 많이 그렸다. 이 시기 작품에서 그는 기존의 강렬한 색상 대신 담담한 색채로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주력했는데, 1944년 작품인 〈해당화〉에는 인물들의 애환이 잘 묻어나 있다. 이러한 화풍의 변화는 개인적인 아픔에 더해 시대 상황에 따른 고민과 성찰의 결과로 여겨진다.
그런 한편 1940년대 중후반에는 작품 활동보다 후진을 양성하고 화단의 중진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45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이듬해에는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설립 추진위원회에도 참여했다. 1949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1950년 11월 4일,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3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당시는 한국 전쟁 와중이라 경찰의 검문이 강화되었던 때였는데, 이인성은 검문하던 경찰과 시비가 붙은 와중에 어이없는 총기 오발 사고가 일어나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후 이인성은 화단에서 잊힌 화가가 되었다.
1954년, 회고전이 한 차례 열렸으나 가난을 극복한 천재 화가, 요절한 천재 화가라는 인생 역정에 더욱 많은 관심을 받았고,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그는 관전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 하나의 양식을 체계적으로 추구하지 못한 작가라는 비난을 받는 등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또한 일본 관전의 아카데미즘을 바탕으로 성장한 화풍 때문에 친일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4년 〈한국 근대 미술 60년전(展)〉과 함께 서울 한국 화랑에서 회고전이 열리면서 이인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국내 서양화가들은 1910년 서양화가 국내에 유입된 후 식민지 시대라는 열악한 상황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관점이 대두되면서부터다. 그러면서 조선의 향토색론이 대두되었고, 이인성은 조선의 향토성을 가장 잘 구현한 선구적 작가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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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친 100인의 예술가를 소개한다. 회화, 판화, 조각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역사와 예술의 관계의 흐름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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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인성 –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김영은,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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