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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풍경화로 미술에 혁신을 일으키다
조르조네
조르조 바르바렐리 다 카스텔프랑코(Giorgio Barbarelli da Castelfranco), Giorgione출생 | 1477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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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10년 |
국적 | 이탈리아 |
대표작 | 〈폭풍우〉, 〈세 명의 철학자〉, 〈잠자는 비너스〉 등 |
16세기 베네치아 회화의 창시자로 자연 현상과 풍경 묘사에 뛰어났다.
조르조네는 16세기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빛과 색채를 이용해 그림에 이야기와 시적 감흥을 담았으며, 철학에도 조예가 깊어 그림 속에 다양한 암시를 심어 놓아 그의 작품들은 유럽 회화에서 가장 미스터리하다고 평가된다. 16세기와 17세기 내내 높은 명성을 누리며 이탈리아 회화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인 티치아노가 그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조르조네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것은 극히 드물며, 이마저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단 두 가지 기록만이 전하며,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가 《이탈리아의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의 생애》에 기록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부이다. 본명은 조르조 바르바렐리 다 카스텔프랑코로, 조르조네(혹은 초르촌)라는 이름은 대(大) 조르조라는 의미이다. 초르촌은 베네치아 사투리로 키가 큰 조르조, 몸집이 큰 조르조라는 의미이다. 바사리에 따르면 그는 온화한 성격의 미남으로, 화가이자 탁월한 류트 연주자이며 가수였다고 한다.
1477년경, 베네치아 카스텔프랑코에서 태어난 조르조네는 어린 시절 조반니 벨리니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전하는 그림 수가 적고 기록이 전무한 만큼 그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507년 베네치아 두칼레 궁 접견실 장식화를 그렸으며, 이듬해 독일인 교역소 폰다코 데이 테데스키 외벽에 프레스코화의 일부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소실된 상태이다.
조르조네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것 중 확실한 것은 베네치아 귀족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이 작성한 베네치아 개인 박물관에 있던 것들로 〈폭풍우〉, 〈세 명의 철학자〉, 〈잠자는 비너스〉, 〈전원의 합주〉 등 약 5점에 불과하다. 이 중 〈세 명의 철학자〉는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잠자는 비너스〉는 티치아노가 완성했으며, 〈전원의 합주〉는 티치아노의 작품이거나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이라는 등 견해가 분분하다.
조르조네의 작품을 특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화가로 활동한 1500년 전후부터 흑사병으로 요절한 1510년까지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베네치아 회화에 위대한 변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또한 티치아노, 팔마 베키오, 로렌초 로토 같은 동시대 화가들을 비롯해 후대의 화가들이 그의 그림을 수없이 모방했다.
조르조네는 그림의 배경을 중시했으며, 특히 배경 풍경을 그리는 데 뛰어났다. 그는 종교화를 그리거나 신화, 고전을 다룰 때도 풍경을 주체적으로 담았다.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 조르조네의 초기작으로 인정되는 〈모세의 불의 심판〉, 〈솔로몬의 심판〉 등에서도 이야기 소재에 비해 풍경이 독립적이고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차분하고 감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성모자〉, 〈양치기들의 경배〉 같은 작품에서도 색채의 완벽한 조화와 몽환적인 배경 묘사가 뛰어나다.
조르조네는 따뜻한 빛으로 전체 화면을 감싸고, 스푸마토 기법각주1) 을 사용해 부드럽게 표현했으며, 그림 속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스푸마토 기법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앞서 사용한 기법이고, 후일 티치아노 기법의 특징이었는데, 조르조네가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을 직접 접했다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또한 조르조네는 풍경만을 다루기도 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풍경을 배경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다루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폭풍우〉를 비롯해 〈잠자는 비너스〉 같은 작품들은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주체적으로 다루며 풍경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개척에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풍경화는 17세기 이후 회화의 한 장르를 차지했다.
밤과 폭풍우 같은 자연현상과 이에서 비롯된 정취를 묘사하는 데 특히 뛰어났던 조르조네의 대표작은 〈폭풍우〉이다. 풍경을 독자적인 주제로 다룬 혁신적인 그림으로 르네상스 풍경화의 이정표가 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506년경 베네치아의 귀족 가브리엘레 벤드라민의 주문으로 제작되었다. 폭풍우 치는 언덕과 도시,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 병사 등 연관성 없는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주제와 의도가 무엇인지 해석이 분분한 작품이다.
애초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특정 주제 아래 상징적 알레고리로 작용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주제 없이 자유롭게 그린 그림인지조차 알 수 없다. 번개를 제우스의 상징으로 보아 신화적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아기를 모세로 보고 구약성서에서 이집트를 떠나 피신하는 중 휴식을 취하는 모세를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군인을 아담, 여인을 이브로 보고, 젖을 먹는 아기는 죄를 짓지 않은 상태의 카인으로 보기도 한다. 전경에 숨어 있는 뱀은 이브를 꼬여 낸 뱀으로, 배경의 번개 치는 언덕과 마을은 이들이 추방된 낙원으로 여긴다. 또한 베네치아에서 당시 유행하던 포에지각주2) 로 보기도 한다.
1510년, 조르조네는 흑사병으로 서른셋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작품 활동 기간은 10여 년에 불과했지만, 베네치아 회화에 이룩한 혁신은 컸다. 동시대의 화가인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와 티치아노는 그가 이룩한 혁신을 계승했으며, 그의 미완성 작품들을 완성했다. 이들의 지나친 열광으로 조르조네와 세바스티아노, 티치아노의 초기 작품 사이에 경계가 분명치 않아 조르조네는 후대에 이르러 그 존재 자체를 의심받기도 했다. 19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도 있다. 그의 이름은 어느 작품에도 나타나 있지 않으며, 무엇이 그의 작품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조르조네는 예술에 있어 불을 인간에게 전해 준 프로메테우스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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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친 100인의 예술가를 소개한다. 회화, 판화, 조각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역사와 예술의 관계의 흐름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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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조르조네 –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김영은,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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