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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인 100
인 창조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춘 화가
조토 디 본도네
Giotto di Bondone출생 | 1267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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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37년 01월 08일 |
국적 | 이탈리아 |
대표작 | 〈성흔을 받는 프란체스코〉, 〈성모와 아기 예수〉,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 등 |
회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감정 표현에 따른 묘사와 최초로 배경을 그려 넣는 등 르네상스 미술을 꽃피웠다.
조토 디 본도네는 토스카나, 나폴리, 북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화가로, 유럽 미술사에서 창조성과 예술성을 지닌 최초의 화가로 일컬어진다. 그의 이름이 곧 ‘화가’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여겨질 만큼 당대부터 죽은 지 7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꼽힌다.
르네상스 미술은 그의 스승인 치마부에부터 시작되었다는 관점도 있지만, 비잔틴 미술이라는 중세적 관습에서 벗어나 르네상스 미술의 물꼬를 튼 진정한 주도자는 조토였다.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단테는 《신곡》에서 “치마부에의 시대는 갔다. 지금부터는 조토의 시대다.”라고 말했으며, 최초의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는 그가 자연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재현하려는 화가의 본능과 잊힌 회화의 기법과 규칙을 부흥시켰다고 평했다. 또한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수세기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회화예술에 빛을 던진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조토는 1267년경 이탈리아 피렌체 북부의 베스피냐노에서 농부 본도네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토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는데,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어린 조토는 집안일을 도우려 양떼를 거느리고 다니면서도 돌이나 땅바닥에 수시로 그림을 그렸는데, 10세 무렵 피렌체의 화가 치마부에가 볼로냐로 가는 도중 땅바닥에 양을 그리는 그를 보고 재능에 탄복해 제자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 실력과 관련된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조토는 스승 치마부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치마부에가 그린 그림 위에 파리를 한 마리 그려 넣었다. 그림 속 인물의 코 위에 그린 파리가 어찌나 실감났던지 되돌아온 치마부에가 파리를 쫓으려고 손을 휘저었다고 한다.
조토는 치마부에 아래에서 로마, 피렌체 등지를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고, 1297년 무렵부터 치마부에가 작업하던 아시시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를 다룬 작품인데, 이를 비롯해 조토의 작품에서는 자연주의와 서사성이 돋보인다.
스승인 치마부에를 비롯해 동시대의 화가 두초가 그랬듯 조토의 그림 역시 대부분 제단 장식을 목적으로 한 종교화였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성서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그림으로 표현했고, 때문에 회화는 독립적인 예술 작품이 아닌 교훈과 교화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조토가 활동하기 전까지 회화는 평면적이고, 정적이며, 장식적이고 비사실적이었다.
그러나 조토는 등장인물 간에 깊이감을 표현하고 단축법, 투시법, 명암을 이용해 입체감을 부여했다. 또한 회화에 최초로 배경을 그려 넣었으며, 인물의 표정과 감정을 드러내고 동작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이야기에 서사성을 불어넣었다. 그럼으로써 장식적 제단화에 불과했던 회화를 화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매체, 즉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이런 감정 표현에 따른 인간미와 사실적인 묘사는 이후의 화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즉 르네상스 미술이 꽃피는 토대가 되었다. 조토라는 위대한 천재 한 사람으로 인해 무려 10세기 가까이 회화를 지배한 비잔틴 양식이 소멸하고 르네상스적 미술이 새로이 탄생한다.
이후 조토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에서 〈성흔을 받는 성 프란체스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등의 패널화를 그리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306년경 조토는 파도바 아레나 예배당의 장식을 맡았다. 설계 단계부터 프레스코 벽화를 염두에 두고 지은 예배당 네 벽의 벽화와 천장화는 모두 조토의 작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성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로, 〈성모와 아기 예수〉, 〈수태고지〉, 〈최후의 심판〉,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각 그림들은 서사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조토는 스승 치마부에의 형식적인 인물 묘사에서 탈피해 감정과 동기를 지니고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 냈다.
무엇보다 조토는 앞으로 닥칠 사건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세 살이던 성모 마리아를 성전에 데리고 갔을 때 마리아가 아무 도움 없이 15개의 계단을 올라갔다는 일화를 묘사한 〈성전에서 마리아의 봉헌〉을 살펴보자.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의 어머니, 대제사장의 박진감 넘치는 표정과 동작, 다양한 포즈로 수군거리는 주변인들은 그림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중대성을 보여 주며, 동시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인체 표현, 원근감에 따른 3차원적인 공간 묘사는 조토 시절에는 해결되지 않았고,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발전된 양식으로 확립된다.
이후 조토는 로마에서 활동하며 오니산티 성당의 〈성모(오니산티의 성모)〉 등 제단화로 쓰일 패널화들을 그렸다. 1313년에는 로마 생활을 정리하고 피렌체 등지를 오가다 이듬해 산타 크로체 성당의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세례 요한의 일생을 주제로 한 〈수태고지를 받는 자카리야〉, 〈세례 요한의 탄생과 명명〉, 〈헤롯 왕의 연회〉와 사도 요한의 일생을 그린 〈패트모스 섬에 있는 사도 요한의 환영〉, 〈드루시아나의 부활〉, 〈사도 요한 승천〉 등이다.
산타 크로체 성당에는 조토의 후기 걸작이 더 있다. 바로 1327년 바론첼리 가족 예배당 제단화로 그려진 ‘바론첼리 다폭 제단화’이다. 이 작품의 하단 중앙에는 ‘피렌체의 거장 조토의 작품’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OPUS MAGISTRI JOCTI DE FLORENTIA’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무렵 조토는 수많은 도제들을 거느리고 공방을 운영하는 명망 있는 화가였다. 이 명문은 화가로서 원숙미가 절정에 다다른데다 젊은 시절부터 거장으로 추앙받던 자신감의 표현인 동시에 장인으로 취급받았던 당시에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한 시도로 여겨진다.
1329년부터 조토는 나폴리에서 앙주 왕의 궁정 화가로 활동했으며, 약 5년 후 피렌체로 돌아왔다. 피렌체 시는 그에게 ‘카포마에스트로’ 작위를 내렸고, 조토는 시 전체의 건축을 총괄 감독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피렌체 대성당(두오모)의 캄파넬라를 설계했고, 피렌체 성채 건설을 감독했다.
1337년 1월 8일, 조토가 사망하자 피렌체 시는 그의 업적을 크게 기려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렀고, 그의 시신은 산타 레파르타 성당(이 자리에 현재의 두오모가 세워졌다)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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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친 100인의 예술가를 소개한다. 회화, 판화, 조각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역사와 예술의 관계의 흐름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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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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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조토 디 본도네 –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김영은,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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