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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2 북송 ∙ 남송의 흥망
송과 금의 항쟁
요나라가 멸망한 후 얼마 있다가 송나라와 금나라의 우호 관계에도 금이 가 항쟁이 시작되었다. 항쟁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살펴보자.
송나라와 금나라가 해상의 맹약에 따라 요나라를 멸망시켰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송나라로선 이렇다 할 전공이 없었다. 금나라는 이것을 이유로 만리장성을 국경선으로 정한다는 당초의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금나라의 여러 장수들도 연경은 자신들의 힘으로 얻은 것이며 연경을 공격한 것도 송나라의 요청에 의한 합법적인 것이었으므로 반환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연경의 주민들까지도 금나라에 복속하는 것을 환영하여 송나라에 반환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송나라와 금나라는 여러 차례 담판을 벌인 결과 마침내 금의 태조 아골타는 송나라와의 맹약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연경을 반환하기로 하였다. 그 대신 ‘빈성(空城)’으로 인도할 것과 매년 은 20만 냥, 비단 20만 필 외에 연경 특별세 1백만 관전(貫錢)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였다.
1123년 4월 금나라 군사가 연경에서 일단 철수하였으나 성내의 모든 재화와 주민들까지 북쪽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송나라에 돌아온 연경은 그야말로 완전한 폐허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송나라 조정에서는 이런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2백년 가까이 꿈에 그리던 연운 16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연경과 그 주변의 6주를 반환받은 기쁨으로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해상의 맹약은 지키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연경을 송나라에 반환한 금의 태조는 연경에서 철병한 직후에 죽었다. 그의 동생 오걸매(吳乞買)가 그 뒤를 이으니 이 사람이 금의 태종이다.
금의 태조가 맹약에 충실했던 데 비하여 송나라는 도의가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휘종과 같은 정치에 무관심한 예술가 황제 밑에 채경·동관 등 신념 없는 인물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금나라와 약속한 세공과 특별세의 제공도 원활하지 못하였다. 송나라 입장에서 본다면 연경은 돌려받았지만 서경의 대동부는 아직도 반환되지 않고 있었다. 숙원인 연운 16주를 차지하자면 그 태반을 점령하고 있는 금나라를 쓰러뜨려야 한다. 이것이 송나라가 직면한 과제였다.
이런 정세하에서 요나라 천조제는 음산에 숨어 서하와 연합할 것을 기도하고 있었다. 송나라에서는 극비리에 천조제와 연락하여 요나라와 동맹을 맺어 금나라로부터 서경을 탈환하고자 획책하였다. 그러나 송의 선화 7년(1125) 천조제가 금나라 군사에게 체포되고 그때 송나라에서 극비로 보낸 밀서가 발견됨으로써 송나라의 배신 행위에 대한 금나라의 노여움은 마침내 송나라를 유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송의 선화 7년(1125) 11월 금나라는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송나라 수도 개봉을 향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금나라 군사의 선봉 부대가 개봉에서 10일 거리의 지점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들은 휘종 황제는 대신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금나라가 설마 우리 도성을 공략해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휘종은 그 순간 기절하여 쓰러졌다. 이윽고 눈을 뜬 휘종은 지필묵을 가져오도록 명하여 그의 독특한 필체로 다음과 같이 써내려 갔다.
“황태자에게 제위를 선양하고 나는 용덕궁으로 물러난다.”
휘종이 퇴위한 경위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설도 있다. 휘종은 금나라가 개봉을 공략해오자 ‘자신을 책하는 조서’를 내려 자기비판을 하고 퇴위하였다는 것이다.
휘종 황제는 붓을 놓자 곧바로 조정의 대권을 쥐고 흔들던 채경·동관 등 추종자들을 데리고 수도를 떠나 박주(안휘성 박현)로 갔다가 다시 건강으로 탈출하였다.
이렇게 해서 황태자 조항(趙恒)이 흠종(欽宗)으로서 즉위하고 연호를 정강(靖康)으로 고쳤다.
수도 개봉에서는 휘종의 총신 채경·동관 등이 탈출했다는 소문을 듣자 백성들은 일제히 쌓이고 쌓인 울분을 터뜨려 폭정을 규탄하였다. 최고 학부인 태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대표 진동(陳東, 1086~1127) 등도 온갖 학정을 다한 채경·동관 등 6명에 대한 처형을 요구하는 상주문을 발표함으로써 수도 개봉은 분노의 함성으로 메아리쳤다.
이러한 함성에 눌린 흠종은 조서를 내려 채경 등의 처벌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여기에 힘을 얻어 모두 궐기하여 멸망 일보 직전의 송왕조를 구출할 결의를 다졌으나 겁이 많은 흠종은 백성들의 선두에 서서 금나라와 싸우려고는 하지 않고, 아버지 휘종과 마찬가지로 수도에서 도망칠 생각만 하였다.
흠종이 수레를 타고 도망치려 하는 순간 대신 이강(李綱, 1083~1140)이 달려왔다. 이강은 수레를 호위하는 친위군 장병들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도성을 지키는 것이 옳은가, 그렇지 않으면 황제와 함께 수도를 버리는 것이 옳은가?”
친위군의 장병들은 소리를 합하여 대답하였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도성을 사수합시다.”
흠종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당황하였다. 그러자 이강이 흠종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
“금나라 군사는 이미 도성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약 수레를 타신다 해도 적병에게 쫓기어 잡힐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해서 흠종은 마지 못해 도성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때 금나라 군사는 이미 성 둘레에 파놓은 해자를 건너오기 시작하였으나 성 둘레에는 이강이 미리 배치한 결사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결사대는 해자를 건너려는 금나라 군사의 배를 쇠갈고리가 달린 긴 장대로 걸어 공격하였다. 송군 결사대의 이 같은 저항에 많은 병사를 잃은 금나라 군사는 일단 후퇴하였다.
이강은 금군의 재공격에 대비하여 성의 수비를 더욱 튼튼히 하였다. 장병들은 채경 등이 강남 지방에서 약탈하여 정원을 장식한 기석들을 운반하여 성문을 막는 등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장병들이 이렇게 항쟁을 계속하는 동안 흠종을 비롯한 강화파들은 금나라 진지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하였다. 금나라가 제시한 터무니없는 강화 조건을 모두 수락하기로 하였다. 금나라가 제시한 조건은 황금 500만 냥, 백은 5천만 냥, 비단 100만 필, 우마 1만 마리, 그리고 태원·중산·하간의 3진(鎭)을 금나라에 바칠 것과 송나라 황제는 금나라 황제를 백부로 받든다는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강화가 진행되는 동안 송나라의 노장 종사도(種師道)가 하북·하동의 원군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원군은 자칭 1백만이라 했으나 실제는 20여만 명이었다. 그래도 6만 명의 금나라 군사와 비교하면 훨씬 많은 병력이었다.
금나라 진영에서는 이강과 종사도의 존재를 두려워하여 위축 되었으나 송의 흠종은 금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이강을 해직시켰다.
강화파의 이 같은 행동은 조야의 거센 반발을 몰고 왔다. 태학의 학생 1천여 명은 진동을 선두로 궁성문 앞에 이르러 강화파의 간신 이방언(李邦彦)·장방창(張邦昌)을 추방하고 이강·종사도를 중용하여 성안의 수비는 이강에게, 성 밖의 수비는 종사도에게 위임하라고 흠종에게 강요하였다. 백성들도 진동 등과 동조하여 1시간도 못 되어 수만의 군중이 궁궐을 에워싸게 되었다. 일종의 시위였다.
백성들의 분노가 이렇게 불타고 있을 때 이를 눈치 채지 못한 강화파의 간신 이방언이 태연스럽게 궁궐 쪽으로 다가왔다. 백성들은 궁궐 앞에서 이방언을 에워싸고 그의 죄상을 규탄하며 돌팔매질을 퍼부었다. 이방언은 가까스로 도망쳤으나 시위 군중들은 만족할 만한 회답이 있기 전에는 해산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버티면서 ‘등문고(登聞鼓)각주1) ’가 찢어지도록 두들겨댔다. 군중들은 또 시위 현장에 있는 환관 수십 명을 죽이고 계속해서 흠종에게 그들의 요구 사항에 대한 회답을 강요하였다. 백성들의 함성이 수도 개봉의 하늘에 메아리쳤다.
흠종은 사태의 확대를 두려워하여 이강을 다시 기용한다고 발표하였다. 군중들은 환성을 지르며 흠종의 결정을 환영하였으나 다시 종사도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흠종은 이 요구도 받아들여 수레를 보내 종사도를 맞아오도록 하였다. 군중들은 종사도의 건재한 모습을 본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해산하였다.
이 같은 송나라 조야의 분노와 거센 저항 앞에 그렇게 의기 충천했던 금나라도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강화 조건에서 요구한 금과 은이 전량 수집되지 않았는데도 슬슬 꽁무니를 빼고 철병하였다.
금나라 군사가 철수하고 각지에서 달려 왔던 원군도 각각 그들의 지방으로 돌아가 평온을 되찾게 되자 이강 등 주전파의 대신과 장군들은 쫓겨났다. 대신 강화파들이 득세하여 천하태평으로 날뛰었다. 그리고 흠종은 강남으로 탈출해 있던 휘종을 도성으로 모셔왔다. 휘종이 강남에서 왕조를 세우고 복위한다는 소문이 퍼진 터라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흠종을 비롯한 강화파들의 태평세월도 잠시였을 뿐, 금나라 태종은 중원 정복의 야망을 결코 버린 것이 아니었다. 수개월 후 진용을 정비한 금나라는 다시 송나라 수도 개봉을 향해 진격해왔다. 전혀 대비책이 없었을 뿐 아니라 저항할 의사마저 없었던 흠종은 ‘신병(神兵)각주2) ’에게 맡기어 금나라를 물리치겠다는 곽경(郭京)의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그대로 믿고, 성을 지키고 있던 장병들을 모두 철수시킨 후 성문을 활짝 열어놓도록 명령하였다.
이렇게 해서 금나라 군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개봉에 입성하였다. 금나라 군사를 쫓아 버리겠다고 호언한 곽경은 벌써 자취를 감추어 찾을 길이 없었다. 마침내 흠종은 항복하고 개봉은 금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었다.
흠종과 태상황 휘종은 친히 금나라 진영에 나아가 포로가 되었으며, 송나라가 160년에 걸쳐 모은 금은보화, 옥새, 도서, 진귀품, 의장 등을 비롯하여 황족, 고급 관료, 그들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기술자, 예술가 등 수천 명이 포로가 되어 금나라에 연행되었다.
연행된 휘종과 흠종은 금의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태종은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 흠종에게 중혼후(重昏侯)의 칭호를 내렸다. 그 칭호에서 말하듯 이들 두 황제가 얼마나 혼미한 황제였던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어쨌든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송왕조의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같은 사태의 진상이 국민에게 그대로 알려질 것을 두려워한 조정의 관리들은 황제가 북쪽으로 사냥을 나간 것이라고 백성들을 현혹시키는가 하면, 사실은 송나라가 금나라에 의해 멸망되었으면서도 이를 ‘정강의 난’이라는 허황된 말로 얼버무리려 하였다.
이렇게 해서 요나라와 송나라는 잇따라 멸망하고 흠종의 동생 강왕(康王) 조구(趙構)가 강남의 임안(항주)을 수도로 정하고 송나라를 이으니 역사상 이를 남송(南宋)이라 한다. 남송이 세워지기 이전의 송나라를 북송(北宋)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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