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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2 중국 삼국시대
삼국의 정립
촉한·위·오 3국 중 어느 나라를 정통(正統)으로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는 학자로는 《삼국지(三國志)》의 저자 진(晋)의 진수(陳壽), 《십팔사략(十八史略)》의 저자 원(元)의 증선지(曾先之), 《자치통감》의 저자 송(宋)의 사마광(司馬光) 등이고, 촉한을 정통으로 보는 학자로는 《통감강목(通鑑綱目)》의 저자 송(宋)의 주희(朱熹), 《십팔사략》의 편저자 명대(明代)의 유염(劉剡) 등이다.
정통이란 후한의 뒤를 이을 바른 계통이 어느 나라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주희의 《통감강목》의 취지에 따라 촉한의 유비를 정통으로 보아 서술했음을 밝혀둔다.
위나라 조비가 제위에 오른 이듬해 ‘위의 조비가 헌제를 시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한중왕 유비는 천자의 죽음을 온 나라 안에 발표하고 유비 자신도 상복을 입고 헌제에게 효민 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그해(221) 여름 사월에 유비는 성도에서 황제의 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촉한(蜀漢), 연호를 장무(章武)로 정하고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헌제는 조비에게 제위를 물려준 후 산양공(山陽公)에 봉해져 조비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는 설도 있다.
제갈공명을 승상, 허정(許靖)을 사도(교육 담당)에 임명하고, 부인 오씨(吳氏, 손권의 누이)를 황후로, 아들 유선(劉禪)을 황태자로 세웠다.
유비는 관우의 전사를 치욕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일대 복수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제갈공명은 오나라와 화친을 맺고 북쪽 위나라와 싸워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해야 할 때라고 누차 설득하였다. 그렇게 제갈공명의 말이라면 잘 듣던 유비였건만 이 일만은 제갈공명의 설득력도 효력이 없었다.
국가를 경영하는 제왕에게는 사정이 용납될 수 없다. 그럼에도 유비는 관우와의 정의를 내세워 동원령을 내렸다. 제갈공명도 그 이상 만류할 수가 없었다. 만약 조조였다면 확실히 개인 간의 사정을 버렸을 것이며 그 사정을 멋진 시로 토로하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점이 유비의 결점이었지만 일면에서 보면 유비의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비에게 이러한 인정미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인재들이 그의 밑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유비는 일찍이 형제의 의를 맺은 장비에게도 동원령을 내렸다. 장비는 이를 갈며 복수전 준비를 서둘렀으나 출병에 앞서 불행히도 그의 부하에게 살해당하였다. 유비는 이 비보를 듣고 크게 비통해했다.
“장비가 무례하고 부하를 사랑할 줄 몰라 내 항상 경계하였거늘, 내 말을 듣지 않더니 기어코 슬픈 일을 당하였구나!”
7월에 유비는 직접 장수가 되어 오나라 공격에 나섰다. 그는 무협(巫峽)에서 이릉(夷陵)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의 진영을 세워 오나라 군사와 대치하였다. 6개월간의 대전 끝에 오나라의 총사령관 육손은 40여 개의 유비 진영을 격파하며 큰 타격을 주었다. 유비는 대패하여 밤에 백제성(白帝城)으로 후퇴하였다.
위주(魏主)각주1) 조비는 오나라의 손권이 항복하여 봉작을 받고 인질을 보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분개하여 오나라를 쳤다. 그러나 이미 유비를 격퇴시킨 오나라로선 위나라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었다. 오나라 손권도 왕이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오나라라 정했다. 그는 장강의 요새를 이용하여 위나라의 공격을 막아 지켰다. 앞서 손권은 유비가 관우의 설욕전을 위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자 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위주 조비에게 항복하고 인질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였다.
유비가 오나라 육손에게 대패하여 백제성으로 도망친 것은 장무 2년(222) 6월의 일이고 이듬해 4월 63세로 일생을 마쳤다. 육손에게 패한 후 실의에 빠진 나머지 병이 들어 재위한 지 불과 3년에 영면하였다. 촉한에서는 유비에게 소열제(昭烈帝)의 시호를 올리고 태자 유선이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유선의 자는 공사(公嗣)이고 이름은 선이다. 소열제의 아들로 그의 나이 17세였다.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치고 승상 제갈공명이 소열제의 유조를 받들어 정사를 보좌하게 되었다.
소열제는 죽음을 앞두고 제갈공명에게 다음과 같은 간곡한 유언을 남겼다.
“공의 재주는 위나라 조비보다 10배나 뛰어나니 반드시 국가를 편안히 하고 천하통일의 대사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자식 선은 노둔한 아이입니다. 만약 보좌할만 하거든 보좌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게 하고, 그렇지 않거든 공이 스스로 차지하도록 하시오.”
제갈공명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신은 있는 힘을 다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폐하에게 죽기로써 맹세하겠습니다.”
신명을 바쳐 유선을 보좌하겠다는 결의였다. 관우도 죽고 장비도 이미 죽은 촉한의 운명은 이제 모두 제갈공명의 두 어깨에 매달리게 되었다.
관우와 장비의 죽음에 대하여는 위에서 언급했거니와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관우는 강직한 성격과 강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관우는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손권이 자신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결혼시키자고 제의했을 때 관우는 크게 노하여 손권의 사자를 꾸짖고 창피를 주어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강직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을 무시하는 단점이 있다. 강릉에 있던 촉한의 태수 미방(靡芳)이나 부사인(傅士仁) 등은 관우로부터 무시를 당해 항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 때문에 관우가 북벌을 위해 군수물자를 조달할 때 미방·부사인 등은 비협조적이었다. ‘평소 자신들을 무시했으니 적극적으로 협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관우는 “개선해 돌아와서 마땅히 치죄하겠노라.”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북벌에 임했다는 것이다.
미방과 부사인의 입장에서는 관우의 개선이 달갑지 않았다. 그들은 오나라가 강릉을 공략하자 곧바로 촉한을 배반하였다. 강릉에는 북벌군의 처자들이 있었으니 강릉의 함락이 관우의 군사에게 어떠한 충격을 주었을 것인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자신의 아들과 혼인하자는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손권을 격노케 한 것은 외교의 실패이고, 자기 편의 간부에게 불만이나 공포심을 가지게 한 것은 내정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관우는 스스로 죽음을 부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갈공명이 관우를 형주에 남겨 놓고 성도로 돌아올 때 관우에게 앞으로 취할 기본 전략을 지시하였다.
‘동쪽으로 손권과 화친하고, 북쪽으로 조조를 막아야 한다.’
관우가 만약 제갈공명의 지시를 지켰던들 그런 억울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장비의 죽음은 부하에 의한 암살이었다. 장비는 부하를 다루는 방법이 지나치게 혹독하여 무슨 과오가 있으면 즉결 처분하고 매일같이 군사들에게 매질을 하였다. 유비가 이것을 보고 여러 차례 타일렀으나 장비는 고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는 부하로부터 크게 원망을 사 자고 있는 사이에 목이 잘렸다. 장비의 목을 자른 부하는 그 수급을 가지고 손권에게 달려갔다.
유비 진영의 두 호걸 관우와 장비는 최후까지 유비의 추종자로 머물렀을 뿐이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관우·장비 두 사람은 각각 그들의 단점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논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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