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이야기 중국
사2
동진 ∙ 오호십육국 시대

전진과 동진의 대전

전진(351~394)은 저족(氐族)의 부씨(符氏)가 세운 정권으로 ‘부진(符秦)’이라고도 부른다.

저족은 일찍이 현재의 사천·성서·감숙성 일대에 살고 있던 민족으로 진나라 시대에 이르러 오호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다.

전진왕 부견(符堅)은 저족 출신이었으나 석호나 염민이 취했던 이민족 말살 정책은 취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고 여러 민족을 단결시켜 천하가 마치 한 집안처럼 생활하는 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부견은 선비·강·갈·흉노 등 여러 민족의 지도자를 중용하는 한편 한족 출신의 정치가나 장군까지도 요직에 기용하였다. 특히 한족 출신의 정치가 왕맹(王猛)을 중용하여 그를 우대하였다.

“나에게 왕맹이 있는 것은 마치 유비 곁에 제갈공명이 있는 것과 같다.”

왕맹의 자는 경략(景略)으로 북해(北海, 산동성 창락현) 출신이었다. 그는 고금의 학문에 통달하고 특히 병서를 애독하여 정치가와 군사가로서의 재능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동진의 장군 환온(桓溫)이 북벌군을 이끌고 관중까지 진격해왔을 때 그는 남루한 옷차림으로 총사령관 환온을 방문하고 아무 부끄럼 없이 이를 잡으면서 천하의 대사를 놓고 당당히 의견을 교환하였다.

왕맹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환온은 왕맹의 학문과 지략이 뛰어남을 알고 ‘천하에 왕맹 같은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다.’라고 마음속으로 감탄하여 동진에 와서 벼슬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왕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마 후 왕맹은 부견의 고문으로서 그 지략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왕맹이 부견의 정치 고문으로 맨 먼저 한 일은 부정 부패와 싸우는 일이었다. 왕맹은 저족 호족들의 횡포에 제동을 걸어 민족 간의 대립을 완화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다.

지금까지 저족 호족들의 횡포와 부정에 대하여 공격의 화살을 겨눈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왕맹은 정치를 담당한 지 수십 일도 못 되어 20여 명의 횡포 호족을 처형하고 그 시체를 저잣거리에 효수하는 과감한 정책을 취하였다. 횡포 호족들은 이 같은 왕맹의 과감한 조치에 벌벌 떨게 되자 전진왕 부견은 왕맹이 취한 조치를 높이 평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국가에 법질서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천자의 존엄성이 유지됨을 알았다.”

그 후 왕맹은 정치 공정, 군대 개혁, 교육 진흥, 수리시설 개발, 농업·양잠 등의 진흥에 전력을 투입하였고 전진은 바야흐로 풍요와 안정을 갖춘 부국 강병국이 되었다.

당시(257~370) 장안에서 각 주로 통하는 도로 양쪽에 버드나무와 느티나무 가로수를 심고 20리 마다 정자, 40리 마다 촌락을 형성하여 여행자와 상품을 운반하는 수레들이 안전하게 왕래하도록 하였다.

살육과 살상으로 얼룩진 십육국 시대의 난세에 이렇듯 평화롭고 한가한 풍경이 나타났다는 것은 값진 일이라고 생각된다.

전진왕 부견의 ‘천하는 한 집안과 같다.’는 정치 사상이 왕맹의 뛰어난 재능과 각고의 노력으로 열매를 맺어 전진은 강대국이 되고 중국 북부의 대부분을 통일할 수 있었다.

전진의 판도는 동으로는 창해(滄海), 서로는 구자, 남으로는 양양, 북으로는 대막(大漠)에 이르렀다. 당시 동북의 숙신(肅愼), 서부의 우전, 대완, 강거, 천축(天竺) 등 무려 62개국이 전진에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치고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해서 전진과 대치한 나라는 오직 동진밖에 없는 형세가 되었다.

375년 승상 왕맹이 죽었다. 전진왕 부견은 소리내어 통곡하였다.

“하늘은 내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기를 원치 않는 모양이다. 어째서 이다지도 빨리 내가 의지하고 있던 왕맹을 빼앗아간단 말인가!”

왕맹은 임종에 앞서 전진왕 부견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진(동진)나라가 비록 중원에서 떨어져 장강 남쪽에 있으나 촉한 이래 정통의 제위(帝位)를 승계하고 있으며 군신 상하가 질서를 존중하고 화목합니다. 신이 죽은 후 폐하께서는 진(晋)을 토벌할 생각은 하지 마옵소서. 그보다는 선비족과 강족이야말로 우리 전진의 숙적입니다. 얼마 후 우리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오니 차차 이들을 제거하여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지나 전진왕 부견은 동진을 토벌할 욕심이 생겼다. 당시 전진의 전력은 동진보다 훨씬 우세하였다. 382년 10월 부견은 중신 회의를 열어 의견을 물었다.

“지금 사방은 이미 다 평정되었으나 오직 동남쪽에 있는 동진만이 남아 있다. 우리 전진에는 97만 명의 병력이 있다. 짐이 친히 이 군대를 거느리고 출진했으면 하는데 그대들의 의견은 어떠하오.”

줄지어 늘어선 중신 가운데는 부견의 의견에 찬동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강한 우리 나라가 약한 동진을 토벌하는 것이오니 대왕의 군대는 백전백승,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동진의 군대가 숫자적으로는 적지만 군신이 화목하고 내외가 합심하여 백성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토벌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황태자 부굉(符宏) 등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동진은 천운(天運)을 타고 났을 뿐 아니라 또한 지리적으로 유리하여 우리 군사가 장강(양자강)의 험난한 길을 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화가 오른 부견은 호언하였다.

“하늘이 내려준 좋은 기회라고 하는 이른바 천도(天道)라는 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괘념할 일이 아니며, 장강의 험난함을 내세우지만 오나라도 역시 멸망하지 않았던가. 우리 군사가 향하는 곳에 적군이란 있을 수 없고, 우리의 말채찍을 장강에 던지면 장강의 거센 물결도 멈출 것이다. 우리 군사 앞에서는 동진이 믿고 있는 천험의 요새 따위가 있을 수 없다.”

회의를 마친 후 부견은 그의 동생 부융(符融)을 조용히 불러 의논하였다. 부융은 뛰어난 전술가이며 문무를 갖춘 수재로서 왕맹과 함께 부견의 한팔이라고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부융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수천 리 떨어져 있는 동진이 공격해오지 않는데 우리들이 먼저 출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가까이 있는 강족·갈족·선비족에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 군대가 강남에 원정하고 있는 사이에 수도에서 무슨 이변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부융은 다음 말을 이었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재상 왕맹의 유언을 잊지 마시기를 폐하께 간곡히 진언하는 바입니다.”

부융은 왕맹의 유언을 상기시켜 부견을 설득하려 하였던 것이다. 부견은 부융의 말을 듣자 얼굴 빛이 변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리에게는 1백만 명의 병력과 자금, 무기 등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우리들은 세찬 가을 바람이 낙엽을 떨어뜨리듯 단숨에 동진을 멸망시킬 수 있다. 그런데도 조정 내외가 모두 나의 동진 토벌을 반대하고 있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너까지도 반대하다니….”

전진왕 부견이 이렇듯 반대 의견에 부딪혀 초조해하고 있을 때 경조윤(수도의 장관) 모용수(慕容垂)가 입조하였다.

모용수는 선비족이 세운 전연 왕실의 일족이었다. 그는 재능과 지략이 뛰어난 자로서 일찍이 전연이 동진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했을 때 군사를 지휘하여 패색이 짙은 전국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에 알맞은 대우를 하지 않고 그를 박대했을 뿐 아니라 그를 제거할 음모마저 꾸미고 있었다. 이에 분격한 모용수는 전연을 떠나 부견에게로 와서 신임을 받고 경조윤의 자리에 오른 자였다. 왕맹이 살아 있을 때 부견에게 진언했다.

“전진의 앞날을 위하여 모용수를 제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부견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모용수를 보호하였다.

“나는 바야흐로 사방의 영웅들을 포섭하여 천하를 평정하려 하오. 그런데 어찌 그를 죽이겠소. 또 그가 처음 왔을 때 나는 이미 그를 믿고 받아들이기로 하였소. 필부들도 일구이언을 꺼리는 법이거늘 하물며 만승(萬乘, 천자)인 내가 그러겠소.”

이 날 모용수는 부견에게 이렇게 진언하였다.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옵니다.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앞에 두고 동진을 토벌하지 않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동진 토벌의 막중대사를 자손들에게 물려주려 하시옵니까?”

이 말을 듣고 부견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모용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큰일을 성공시키려면 대왕께서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조정 중신들의 의견을 듣다간 아무 일도 못할 것입니다.”

부견은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였다.

“나와 함께 천하를 평정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소.”

부견은 모용수에게 큰 상을 내렸다.

부견이 동진 토벌의 결의를 굳혔다는 소문은 전진의 조야를 불안 속으로 휘몰아 넣었다.

부견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 장부인은 만류하였다.

“폐하께서 동진 토벌의 명령을 내리시는 것은 천도와 민심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부견은 듣지 않았다.

“전쟁하는 일에 여자가 무슨 참견이오.”

이번에는 가장 사랑받고 있는 아들 중산공 선(中山公 詵)이 중신들의 의견을 듣도록 간하였다.

“조정 중신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느냐 안 기울이느냐 하는 것은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 중대한 일이옵니다.”

그럼에도 부견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무엇을 안다고.”

부견은 열렬한 불교 신자였으나 당대의 명승 도안(道安)의 토벌 중지 권유에도 그저 웃어넘길 뿐 그의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각주1)

중장기병

오호십육국 시대 이후 출현한 중장기병의 모습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383년 8월 8일 전진왕 부견은 마침내 동진 토벌의 명령을 내렸다. 부견은 마치 천하를 통일하고 동진의 황제를 자신의 무릎 앞에 꿇린 양 기고 만장하여 다음과 같이 호언장담하였다.

“동진왕 사마 창명(司馬昌明)을 장안에 데려와 짐의 상서좌복야각주2) 로 삼겠다. 동진의 재상 사안(謝安)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임명하고, 장군 환충(桓沖)을 시중(侍中)에 임명하여 짐의 시종 장관(侍從長官)으로 삼겠노라. 우리 군사는 곧 출전한다. 그 날이 오는 것은 멀지 않을 것이다. 수도에 동진왕 사마 창명의 저택을 마련하도록 하라.”

부견의 이 같은 호언은 승리감에 도취된 당시의 자만과 오만을 그대로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부견은 전진의 주력 부대인 보병 60만 명, 기병 27만 명을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하였고, 부융에게 선발대 30만 명을 배속시켜 영구(潁口, 안휘성 영산현)까지 진출하였다.

부융 장군의 집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진군의 좌익은 팽성(강소성 서주시)에 입성하고 우익은 장강을 따라 진격하였다. 후위군(後衛軍)은 이때 함양까지 진출해 있었다.

전진군의 보병 60만 명, 기병 27만 명이 수로와 육로로 동서 만리에 뻗혀 진군하는 모습은 마치 천지를 뒤흔드는 듯 장관을 이루었다.

100만 명의 전진군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에 접한 동진의 조야는 불안에 휩싸여 벌벌 떨었다.

당시 동진의 재상 사안은 심사숙고 끝에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동생 사석(謝石)을 토벌 대장군, 조카 사현(謝玄)을 선봉장에 임명하는 한편 아들 보국 장군 사담(謝琰)까지도 종군시켜 도합 8만 명이 일치 단결하여 전진군을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원래 동진군은 북방에서 이주해온 병사들로 이루어진 정예 부대인 북부군(北府軍)과 장군 환충(桓沖)이 거느리는 서부군(西府軍)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번의 전투에서 북부군은 유뢰지(劉牢之)의 지휘 아래 선봉을 담당하였다.

동진군의 사기는 왕성하였으나 숫자적으로 볼 때 전진군의 1/10분에 불과하여 동진의 장군들은 내심 불안에 떨고 있었다.

사현이 사안에게 전략을 묻자 사안이 대답하였다.

“문제 없다. 작전은 내 가슴속에 있다.”

동진의 서부군(西府軍) 사령관 환충이 그의 정예병 3천 명을 수도의 방위에 충당하려 하자 사안이 말했다.

“수도를 방위할 병력은 충분하니 염려할 것 없소.”

그리고는 서쪽 양양 방면의 방비를 튼튼히 하라고 명하였다. 북부군의 선봉장 사현과 서부군의 총수 환충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환충은 탄식하며 말하였다.

“사안은 정치적으로는 훌륭한 재상이지만, 뛰어난 군략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작전이라면 우리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동진은 병력면에서는 열세에 있었으나 백만 대군이 공격해오는 민족 존망의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계급 간의 대립을 떠나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죽음으로써 민족의 생존을 위해 싸운다는 의기가 충천해 있었다.

전진군과 동진군은 비수(淝水, 안휘성 북쪽, 회하 지류)를 사이에 두고 포진하여, 적벽의 대전에서 조조와 유비·손권이 삼국 정립의 대세를 가르듯 전진과 동진의 역사의 흐름을 결정짓는 일대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10월에 전진군의 선봉 부대는 수양(壽陽, 안휘성 수현 서남쪽)을 공략하여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동진군의 일부는 협석(수현 서쪽)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고문을 본대에 보냈다.

‘적군의 사기 매우 왕성함. 아군 군량이 떨어져 본대와의 합류가 위태로움.’

그러나 보고문은 중간에 전진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전진군의 선봉장 부융은 즉시 이 보고문의 내용을 부견에게 알렸다. 부견은 즉시 8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항성에서 수양으로 달려와 부융과 극비 회담을 가진 후 주서(朱序)를 동진군의 진영에 파견하여 항복을 권하도록 하였다.

주서는 원래 동진의 장군으로 양양의 수비를 맡았을 때 전진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어 그 후 부견 밑에서 관리로 일해오던 사람이었다. 비록 몸은 부견 밑에 있었으나 마음은 언제나 고국 동진에 있었다. 사자가 되어 동진군의 진지에 이른 주서는 사석 등에게 비밀 계책을 말하였다.

“전진의 군사 1백만 명은 아직 집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만약 이 1백만 대군이 완전 집결한다면 이를 격파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전진의 선봉 부대를 두들겨 부수어 그 사기를 꺾는다면 가히 전진의 군사는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전진군 내부에서 동진군에 호응해 싸우겠다고 약속하였다.

동진의 사안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1월 동진군의 유뢰지가 거느리는 북부군이 낙간(洛澗)각주3) 에 주둔하고 있는 전진군에 맹공격을 가하자 전진군 5만 명이 크게 패하여 앞을 다투어 강을 건너다가 1만 5천 명을 넘는 군사가 물에 빠져 죽었다. 동진군의 승리였다.

동진군은 계속해서 수양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비수의 동쪽 언덕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이 보고를 받은 전진왕 부견은 그의 동생 부융과 함께 수양성에 올라 동진의 진지를 바라보았다. 동진군의 군사 배치와 진지 구축은 실로 엄정하여 한 치의 틈도 없었고 군기 또한 엄숙하고 투지 왕성하였다. 부견은 한편으로 감탄하고 한편으로 놀랐다. 눈을 돌려 팔공산(회남시 서쪽)을 바라보니 바람에 흔들리는 초목이 모두 동진의 군사로 보이는 듯하였다.

“군사도 많고 정예하다. 강적이다, 강적!”

부견은 두려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전진군은 비수의 서안에 포진하여 동진군과 대치하고 동진군의 도하(渡河)를 저지하였다. 전진군은 후속 부대가 오기를 기다렸고, 동진군은 전진의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적군을 공략하여 타격을 주자는 작전을 세웠다.

며칠이 지난 후 전진군의 선봉 부대에 동진군의 선봉 부대로부터 도전장이 날아들었다. 그 도전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양군이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간 싸움이 길어지게 마련이오. 만약 전진이 속전 속결을 원한다면 조금 후퇴하여 동진군이 강을 건넌 후 싸움을 벌여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 어떻겠소?”

전진의 장군들은 후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부견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였다.

“조금 후퇴하여 동진군이 반쯤 건넜을 때 기병으로 돌진하여 동진군을 포위해 반격한다면 승리는 우리들의 것이다.”

부융도 부견의 의견에 찬동하였다. 전진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고향을 멀리 떠나 전쟁에 끌려온 전진의 병사들은 개죽음이 두려워 보를 튼 물줄기처럼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동진군은 이틈을 노려 노도처럼 전진군을 추격하였다. 전진왕 부견의 작전은 동진군이 비수를 반쯤 건너기를 기다려 방향을 바꾸어 역포위 작전으로 동진군을 섬멸할 계획이었으나 동진군이 계속 추격해오기 때문에 방향을 돌릴 겨를도 없이 그대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것도 당황하여 허둥거리며 단숨에 도망쳐버린 것이다.

부견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사태에 눈을 의심하였다. 역전공격은 군의 기밀이었기 때문에 일반 병사들은 알 까닭이 없었다. 후퇴 명령에 따라 그저 후퇴했을 뿐이었다. 동진군이 강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뒤로 돌아 돌격”이라는 명령이 내려졌어야 할 터인데 그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 “우리는 졌다, 도망쳐라!”라는 고함 소리가 전진의 진영을 뒤흔들었다.

주서가 동진군에 내응하겠다는 비밀 약속을 했다는 말은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주서가 그의 심복들과 짜고 후퇴하는 군중에 섞여 고함을 질러댔던 것이다.

‘한 마리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뭇 개들이 덩달아 짖는다.’는 말이 있다. 이번 주서의 계책은 바로 헛고함을 질러 전진의 군사를 혼란에 빠뜨리자는 것이었다.

패주하는 전진군에는 후속 부대들이 비수를 향해 진군해오고 있었다. 이들 부대들은 패주하는 전진군과 만나 “패전이다, 패전!”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덩달아 그대로 도망쳤다. 마치 골패짝 쓰러지듯 전진의 군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패주하여 전진의 군사 7, 8할이 굶주림과 추위에 희생되었다. 부융은 싸움 도중에 죽고 부견도 유시(流矢)에 맞아 부상을 입어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장안으로 돌아왔다. 3개월 전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기고만장하여 출진했던 부견이 장안에 돌아올 때는 겨우 10만 명의 군사가 따를 뿐이었다.

한편 동진의 재상 사안은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다가 승전보를 들었다. 사안은 별로 기뻐하는 듯한 기색도 보이지 않은 채 그대로 바둑을 계속하였다. 손님이 물었다.

“승리의 소식을 전해들은 감상이 어떻습니까?”

사안은 그제야 대답했다.

“응, 자식놈들이 전진의 군사를 깨뜨렸다는구먼.”

그러나 사실 사안은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손님을 전송하고 방으로 돌아오다가 신발굽이 문지방에 걸려 꺾인 것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비수에서의 승전이 너무 멋진 것이었기 때문에 마치 기적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북상한 동진군의 전력도 막강하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견과 부융이 수양성에서 동진군의 진용을 바라보고 그 정연함에 두려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설사 전진군이 애당초 부견의 작전대로 뒤로 돌아 공격을 감행했다손 치더라도 반드시 승리했으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중국 남조 송나라의 유의경이 편집한 후한 말부터 동진까지의 명사들의 일화집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도도히 흐르는 비수, 지금까지는 전진과 동진의 국경선을 정하는 경계선이었으나 비수의 대전이 끝난 후 이 국경선은 중국 역사상 이 시대를 구분하는 하나의 경계선으로써 영원히 기록되게 되었다.

비수에서 패주한 부견은 모용수의 힘을 빌어 10여만 명의 패잔병을 모아 일단 낙양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장안으로 갔다. 부견의 국세가 날로 쇠퇴해지자 지금까지 부견의 발 밑에 꿇어앉아 있던 소수 민족의 우두머리들은 모두 앞을 다투어 부견의 곁을 떠났다. 모용수는 부견을 따라 장안으로 가던 중 함곡관을 바로 앞둔 민지에 이르렀을 때 부견에게 진언하였다.

“북방 여러 민족이 이번 패전을 계기로 동요하고 있으니 삼가 조서를 받들어 그곳 북방 민족을 선무할까 합니다.”

부견의 측근들은 반대하였다.

“모용수를 보내는 것은 마치 우리 안에 가둔 매를 놓아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부견은 이렇게 말하며 그를 보내고 말았다.

“이미 약속한 일이니 할 수 없다.”

그러자 상서좌복야로 있는 권익(權翼)이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조그마한 신의를 중히 여기시고 사직은 가벼이 여기십니다. 그는 돌아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관동의 난은 그로부터 시작될 것이 불을 보는 듯하옵니다.”

권익은 부견의 남정을 강력히 반대한 대신 중의 한 사람이었다. 과연 권익의 예상대로 모용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일찍이 전연의 장수였던 모용수는 이 기회를 타 군사를 모아 다시 연(燕)나라를 일으키고 수도를 중산(中山, 하북성 정현)에 두었다. 역사상 이 나라를 후연(後燕)이라 부른다. 비수의 대전이 끝난 지 2년(385) 후의 일이었다.

부견의 실패 원인을 역사가들은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여러 민족의 융합을 원했던 그는 저족을 동쪽으로 이주시키고 동쪽에 있던 선비족을 서쪽으로 이주시켰다. 그 때문에 수도 장안 주변에는 저족보다는 선비족의 수가 훨씬 많았다. 저족의 나라인 전진에 있어 이러한 정책은 대담하다기보다는 무리한 조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상주의자였던 부견은 덕으로써 다스린다는 자신에 넘쳐 상식의 한계를 무시했다.

패전 후 장안에 돌아온 부견을 기다린 것은 관중에 이주시켰던 선비족 모용씨들의 배반이었다. 마침내 부견은 모반의 중심 세력으로 보이는 전연의 폐제 모용위(慕容暐)를 죽였으나 그의 동생 모용충(慕容沖)이 선비족을 규합하여 장안을 빼앗고, 연나라를 세워 황제라 칭하였다. 그러나 그의 곁에 모인 선비족은 동쪽에서 강제적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모용충은 결국 이들의 의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애써 빼앗은 장안을 떠나 동쪽으로 돌아갔다. 이 정권을 후세의 사가들은 서연(西燕)이라 부르지만 단명하였기 때문에 십육국에 넣지 않고 있다. 그립던 동쪽의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 앞에는 이미 모용수가 세운 후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모용충의 ‘서연’은 모용수의 ‘후연’에 소멸되고 말았다.

모용충으로부터 장안에서 쫓겨난 부견은 오장산(五將山)에서 일시 난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강족의 요장(姚萇)이 그의 부장 오충(吳忠)을 파견하여 오장산을 포위하고 부견을 생포하였다.

요장은 부견에게 협박하였다.

“전국 옥새를 내놓으시오.”

부견은 노기 띤 얼굴로 요장을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작은 오랑캐놈아, 감히 천자를 협박하다니. 오호의 반열에 강족의 이름은 없다. 옥새는 이미 동진에 보냈으니 너에게 줄 수 없다.”

요장은 다시 윤위(尹緯)를 보내 제위를 선양하도록 설득하게 하였다. 그러자 부견은 이렇게 일축했다.

“선양이란 성군과 성군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이거늘 요장 같은 일개 반적의 무리가 그 따위 말을 지껄이다니 가소롭다!”

그러나 설득의 임무를 부여받은 윤위는 논리정연한 말로 부견을 설득하니 마침내 부견도 감동하였다.

“경은 짐의 조정에서 무슨 벼슬을 하였소?”

“상서영사(尙書令史)로 있었습니다.”

윤위의 대답을 들은 부견은 탄식하였다.

“경은 진실로 왕맹과 견줄 만한 인물이며 재상의 재목이오. 그런데도 짐은 경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내가 망하는 것이 마땅하오.”

그 후 요장은 부견이 유폐되어 있는 신평현 어느 절에 사람을 보내 부견을 죽이고 말았다. 한때는 부견을 천자로 섬겼던 그가 그 주인을 살해한 것이다. 부견은 그가 죽기 전에 지극히 사랑했던 두 딸 보(寶)와 금(錦)을 죽였고 또 가장 사랑하던 여인 장부인과 태자 선은 자살하도록 하였다.

부견이 죽을 때 그의 나이 48세였다. 부견의 죽음을 들은 요장의 장병들은 모두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

요장은 인망 높은 부견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형식을 갖추기 위하여 부견에게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자신의 나라 이름도 진(秦)이라고 칭하였다. 역사에서는 부견의 전진과 구별하여 요장이 창시한 왕조를 후진(後秦)이라 부른다.

모용수의 후연과 요장의 후진은 동서로 대치하면서 열국 가운데 두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이 밖에 서진(西秦), 후량(後凉), 남량(南凉), 서량(西凉), 하(夏) 등의 여러 나라가 할거하였으며 후연은 나중에 남연(南燕)과 북연(北燕)으로 분열하였다. 이렇게 하여 비수의 대전이 있기 전 통일되었던 전진의 판도는 대전 후 10개국으로 분열하였다.

이 10개국에 비수의 대전이 있기 전 내란으로 인하여 세워졌다가 멸망한 성(成), 한(전조를 포함), 전량(前凉), 후조(後趙), 전연(前燕), 전진(前秦)을 합하면 모두 16개국이 되어 이를 오호십육국이라 부른다. 십육국은 주요 국가만을 말하는 것이고 이들 16개국 외에 몇개의 작은 나라, 즉 염위(冉魏), 대(代), 서연(西燕), 구지(仇池) 등을 합하면 모두 20개국이 넘는다.

비수의 대전 후 10개국이 할거하여 서로 다투던 중국 북부는 마침내 선비족의 탁발씨(拓跋氏)가 세운 북위(北魏)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 북위가 중국 역사상 북조(北朝)의 막을 열게 됨으로써 130여 년간 이어오던 오호십육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2
이야기 중국사2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이 오늘날의 문화를 형성하기까지 겪었던 수많은 민족의 명멸을 살펴보며,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사기, 자치통감, 십팔사략 등 동양의 고전..펼쳐보기

전체목차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Daum백과] 전진과 동진의 대전이야기 중국사2, 김희영,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