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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2 중국 삼국시대
적벽대전
赤壁大戰관도의 대전에서 원소를 물리친 후 8년째 되는 건안 13년(208)에 조조는 중국 북부를 완전히 통일하고 공격 목표를 남쪽으로 돌려 형주와 강동을 집어삼킨 다음 전국 통일의 대업을 성취시키려 하였다.
때마침 형주의 유표가 죽고 그의 막내아들 유종(劉琮)이 유표의 뒤를 이은 때였다. 유종은 조조의 백만대군이 형주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겁에 질려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했다.
유비가 있는 신야 일대는 조조군과 유종의 군사에게 완전히 협공당한 형세가 되었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조조군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유비는 급히 강릉(江陵)을 향해 퇴각하였다. 강릉은 군사상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병력과 물자의 중요한 보급 기지였다.
유비가 강릉을 향해 퇴각한다는 사실을 들은 조조는 5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유비의 뒤를 추격하였다. 조조는 주야를 쉬지 않고 300리 길을 하루에 달려 곧바로 장판파(長坂坡, 지금의 호북성 당양현 동북)에 이르러 유비를 공격하였다. 유비는 대패하여 지름길을 따라 하구(夏口, 지금의 호북성 한구)로 도망쳤다. 하구에는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가 주둔하고 있었다. 유기의 병력과 유비의 군사를 합치니 약 2만이 되었다. 유비는 장판파 싸움에서 처자를 버리고 도망치는 곤욕을 치렀다.
조조의 백만 대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강동의 손권은 군사를 시상(柴桑, 강서성 구강시의 서남쪽)에 주둔시킨 채 정세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였다. 조조군의 남하에 크게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확실한 대책이 없어 우선 노숙을 파견하여 상태를 탐지하도록 하였다.
노숙은 북으로 올라가고 유비는 남으로 내려오면서 두 사람은 당양에서 만났다. 노숙은 유비에게 손권과 연합할 것을 제의하였다.
“장강(양자강) 남안의 번구(樊口, 호북성 악성현)까지 일단 후퇴하여 그곳에서 손권의 군사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유비는 제갈공명을 시상에 있는 손권에게 파견하여 대책을 세우도록 하였다.
제갈공명은 손권이 아직 대책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조조는 형주를 집어삼키고 사해에 그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지금 조조는 장강을 따라 내려와 강동에 다다랐습니다. 손 장군께서는 어찌 하실 작정이십니까? 강동의 힘을 기울여 중원의 조조와 대항할 자신이 있으면 즉시 조조와의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만약 그만한 용기가 없으시다면 어찌 지체 없이 전 병력을 철수시키고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으십니까?”
손권은 즉시 반문하였다.
“유예주(劉豫州)각주1) 는 어찌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습니까?”
“유예주께서는 한왕실의 후손으로서 그 덕은 세상에 비할만한 사람이 없고 또 인재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이까짓 곤란한 일로 어찌 사람에게 굴복할 수 있겠습니까?”
손권은 얼굴 빛이 변하여 불끈 일어나면서 결단을 내렸다.
“오나라 땅에는 10만의 정예군이 있소이다. 어찌 조조 따위에게 항복할 수 있겠소. 길은 오직 하나뿐이오.”
공명은 적과 이 편의 정세를 상세히 분석하여 손권에게 설명하고 조조군의 치명적인 약점, 그리고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지적, 설파함으로써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한다는 손권의 결의를 확고부동하게 만들었다.
이때 조조도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조서를 받들어 반역의 무리들을 치기 위해 대군을 남하시키자 유종은 즉시 항복하였소. 이제 나는 수군 80만 명을 거느리고 손 장군과 함께 강동에서 멋진 사냥을 펼칠 작정이오.”
반은 협박이요, 반은 조롱하는 투였다.
손권이 조조의 편지를 문무백관에게 보이자 일동은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다. 장사 장소(張昭)를 위시하여 그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조조군의 형세가 너무 강대하여 당할 수가 없으니 항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항복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었다. 손권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자리를 뜨자 노숙이 뒤따라 나섰다. 손권은 노숙의 손을 잡으면서 말하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장소 등 문무백관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항복한다 해도 우리들과 같은 사람은 별 탈이 없이 한 자리 차지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장군의 경우는 이와는 다릅니다. 그 결과는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항복을 주장하는 저들의 머리에는 자기 자신이나 가족들의 생각뿐입니다.”
손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숙이 말하였다.
“주유를 불러 그의 의견을 들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때 주유는 파양호(鄱陽湖)에서 수병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손권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주유는 주전론(主戰論)을 펼쳤다.
“조조의 군사가 비록 80만 명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30만 명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다 7, 8만 명은 이제 겨우 형주에서 항복한 군사로서 그들은 겉으로만 조조를 따랐을 뿐 마음속으로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또 조조군은 육전에는 강하지만 수전에는 익숙치 못해 우리 군사보다 열세에 있습니다. 조조군은 말에서 내려 배를 탔을 뿐이니 그들의 단점과 우리의 장점이 싸우는 것입니다. 조조군이 패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나에게 정병 수만을 주시면 하구(夏口)로 나가 맹세코 조조군을 격파하겠습니다.”
손권은 주유의 말을 듣자 분연히 일어나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책상을 힘껏 내리치면서 명령을 내렸다.
“차후로 만약 조조에게 항복하자고 권하는 자가 있으면 이 책상과 같이 될 것이다!”
조조와 결전을 벌이기로 방침이 결정되자 손권은 주유를 대도독, 정보(程普)를 부도독, 노숙을 찬군 교위로 임명하고, 3만의 군사를 주어 유비의 수상 부대와 공동작전으로 조조군과 대전하도록 하였다.
이때 적벽(赤壁, 호북성 가어현 양자강 연안)의 강 언덕에 포진하고 있던 조조군의 병사는 모두 북방 출신으로서 남방의 풍토에 맞지 않아 병으로 신음하고 배멀미로 고통을 받는 등 사기가 떨어져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조군은 전선을 모두 쇠고리로 연결하여 한덩이로 만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연환선(連環船)각주2) 을 만들어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하였다. 주유의 부장 황개(黃蓋)가 주유에게 계책을 올렸다.
“조조군은 전선을 연결하여 배의 머리와 꼬리가 맞닿아 그 진퇴가 자유롭지 못하니 화공(火攻)으로써 일거에 격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유는 황개의 계책을 받아들여 우선 몽충(蒙衝)각주3) , 투함(鬪艦)각주4) 10척에 마른 섶과 갈대를 가득 싣고 기름을 부은 다음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포장으로 덮고 그 위에 기를 꽂았다. 그리고 그 후미에는 쾌속선이 따르게 하였다.
준비가 완료되자 황개는 우선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겠다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항복하러 가겠다는 날짜와 시간에 황개는 맨 앞에서 전선들을 이끌었다. 강 중간 지점에 이르자 일제히 돛을 달고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조조의 군사들은 황개가 거느린 전선을 바라보면서 저마다 소리를 질렀다.
“저기를 봐라, 황개가 항복하러 온다.”
조조의 수군 진영까지의 거리가 약 1킬로미터 지점까지 접근했을 무렵 황개는 재빨리 신호를 올려 각 배에 가득 실은 섶과 갈대에 일제히 불을 질렀다. 때마침 세찬 동남풍이 불어대자 황개의 선단은 맹렬한 불꽃을 튀기면서 쏜살같이 조조의 함대로 돌진하였다. 쇠고리에 꼼짝 못하게 연결해 놓은 조조의 함대는 도망치려 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삽시간에 불길에 싸여 강 언덕의 석벽까지도 온통 붉게 물들이며 천지가 불바다로 변했다. 조조군은 물에 빠져 죽는 자, 불에 타죽는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적벽 일대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이틈을 타 주유의 부장들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마구 무찔러대니 진군의 북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고 조조군의 목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조조도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허창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적벽 대전’이며, 삼국이 정립(鼎立)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적벽의 대전에서 조조가 승리하고 손권·유비가 패배했더라면 중국은 이 시점에서 통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굽은 길을 더듬어 가는 모양이다. 적벽 대전을 계기로 유비는 제갈공명의 계책에 따라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여 그의 발판을 굳히고, 손권은 강동을 굳게 지켜 동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제갈공명이 제시한 천하 삼분의 계책은 사실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그 상대의 적은 조조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 힘에 너무 차이가 나기에 부득이 손권과 연합하여 조조를 무찔러야 한다는 것이 그의 계책이었다.
그렇지만 유비와 손권과의 관계는 그렇게 원활하지 못하였다. 조조 쪽에서도 손권과 연합하여 유비를 협공할 작전을 구상하였고 유비와 손권 사이에는 형주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다투는 일이 많았다. 원래 형주의 주인은 유표였는데 그의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했고 조조는 적벽 대전에서 패주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형주를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고, 손권은 적벽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주유가 거느리는 수군의 공이므로 승전의 성과는 당연히 자기가 차지해야 한다고 맞섰던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형주를 차지한 후 다시 강남의 여러 군을 공략하여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주유는 손권에게 글을 올렸다.
“유비는 영웅의 자질이 있고 관우·장비 등 범 같은 장수를 거느리고 있으니 지금 세 사람을 모두 강동의 접경 지방에 놓아두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하루 속히 유비를 오나라 땅으로 옮겨 관우·장비와 떨어지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손권은 이를 거절하였다.
유비는 방통(龐統)각주5) 의 계책에 따라 형주는 제갈공명과 관우에게 지키게 하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파군(巴郡)으로부터 촉군(蜀郡)에 들어가 유장(劉璋)을 공격하고 성도(成都)에 입성하여 마침내 익주를 점령하였다. 형주에 있던 제갈공명은 이때 성도로 돌아왔다. 손권은 유비가 형주와 익주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데 대하여 크게 불안을 느꼈다. 그는 사자를 보내 형주를 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순순히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손권·유비 사이에 형주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 후 유비는 손권과 상수(湘水)를 경계로 형주를 나누어 갖는 조건으로 화해하고, 촉으로부터 한중(漢中)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을 차지한 후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 되었다.
적벽 대전에서 수군의 도독으로 손권과 유비의 수군을 총지휘했던 주유는 적벽 대전이 끝난 이듬해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노숙이 손권을 보좌하게 되었다. 제갈공명이 촉의 성도에 돌아온 것이 건안 19년(214)이고, 그보다 2년 전에 손권은 건업(建業, 현재의 남경)을 근거지로 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촉한·위·오의 삼국 정립이 이루어졌다.
건안 22년(217) 노숙이 죽고 오나라 손권과 위나라 조조가 화친을 맺었다. 그해에 삼국의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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