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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2 중국 삼국시대
군웅의 출현
중평 6년(189) 4월 영제가 향년 34세로 죽었다. 영제는 여러 명의 황자를 낳았으나 웬일인지 모두 요절하였다. 그래서 도축업자의 딸 하씨(何氏)가 황자 변(辯)을 낳자 사자묘(史子眇)라는 도인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였다. 그 후 황자를 낳은 하씨는 황후가 되고 그의 오빠 하진(何進)은 대장군이 되었다.
변이 태어난 5년 후 후궁 왕씨(王氏)가 황자를 낳았으나 질투가 많은 하황후에 의해 왕씨는 살해되고 황자는 동태후(董太后)에 맡겨져 무사하였다. 동태후는 영제의 생모인데 아들이 황제로 옹립되었기 때문에 황후의 경력 없이 황태후가 되었다. 이 동태후도 권세욕이 매우 강한 여성이었다. 왕씨 소생의 황자의 이름은 협(協)이었는데 사람들은 이 협을 동후(董侯)라고 불렀다.
영제가 죽었을 때 변은 14세, 협은 9세였다. 두 사람을 비교할 때 변보다 협이 똑똑하였다. 영제가 살아 있을 때 하황후는 변을 황태자로 세우도록 권하였으나 영제는 죽을 때까지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았다. 이것은 협을 의중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제가 병석에 눕게 되자 그는 건석(蹇碩)에게 황자 협의 장래 문제를 부탁하였다.
건석은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의 총수로서 당시 최대의 실력자였다. 황자 협을 황제에 올리기 위해서는 황자 변의 후견인인 하태후의 오빠 하진을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음모를 꾸민 건석은 하진에게 사람을 보내 유인한 다음 살해할 계획이었다.
“국사에 대하여 상의할 일이 있으니 좀 참석해주십시오.”
그러나 건석의 부하에 하진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있어 눈짓으로 위급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하진은 눈치를 채고 도망쳐 돌아감으로써 건석의 하진 제거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영제가 죽은 다음날 황자 변이 즉위하고 대장군 하진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건석이 자신을 제거하려고 획책한 데 대하여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원소(袁紹)가 환관을 모두 주살해야 한다고 하진에게 권하였다.
원소는 하북 출신 호족으로 그는 4세 5공(四世五公)을 지낸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선비들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다고 자부한 그로서는 여러 대에 걸쳐 선비들의 세력을 누르고 있는 환관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이 당연하였다.
황자 변이 즉위한 지 13일째 되는 날 하진은 건석을 체포·주살하였다. 그 사이에 궁중에서는 격렬한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태후는 자신이 기른 황자 협을 제위에 올려 놓으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건석이 하진에게 주살되자 위기감을 느낀 환관들이 동태후의 오빠 거기장군 동중에게 의지하게 되니 동태후와 하태후가 권력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동태후와 하태후의 싸움은 고부간의 싸움이면서 섭정의 싸움이기도 하였다.
동태후는 며느리인 하태후에게 말하였다.
“내 거기장군(동중)에게 명령을 내려 하진의 목을 베게 하겠소. 그 일은 손바닥 뒤짚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오.”
하태후는 이 같은 사실을 그의 오빠 하진에게 알리자 하진은 즉시 거기장군 동중을 포위하여 자결하도록 하고 동태후마저 추방하였다. 동태후는 슬픈 나날을 보내다가 갑자기 죽었다. 《삼국지연의》에는 하진이 독살한 것으로 되어 있고 《구주춘추(九州春秋)》에는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일로 인하여 하씨에 대한 조야의 평판은 점점 나빠졌다.
환관들과 대립하고 있던 하진이 하태후에게 진언하였다.
“환관들을 모두 제거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하태후는 하진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그녀가 반대한 이유는 여자의 몸으로 섭정을 하자면 싫든 좋든 선비 출신의 남자들과 상대해야 하므로 환관이 없으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하태후의 어머니 무양군(舞陽君)과 하진의 동생 하묘(何苗) 등도 환관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환관 제거를 획책하는 하진을 은근히 견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하진은 환관의 제거를 지연시켰다.
환관의 주살을 하진에게 권고했던 원소는 계속해서 사방의 맹장과 호걸을 불러모았다. 조조는 이 소문을 듣고 비웃었다.
“환관은 옛날부터 있었던 제도이다. 그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환관들의 원흉을 주살하는 일은 일개 옥리로서도 충분한 일이거늘 무엇 때문에 여기저기서 군사들을 모은단 말인가?”
환관들을 모조리 주살하려면 그 비밀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할 것이 틀림없다는 뜻이다. 사후에 만들어 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조조는 그 실패를 예언했다고 한다.
선비들 가운데서도 명문 출신인 원소와 환관의 양자의 아들인 조조와는 환관에 대한 사고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던 모양이었다.
흉포하기로 이름 높은 동탁(董卓)은 이 무렵 하동(河東)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대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때 하진으로부터 낙양에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진은 이와 같이 환관을 주살하기 위하여 사방으로부터 병력을 낙양에 집결시켰다.
이렇게 일을 떠벌리기만 하고 그 결행을 지연시키니 그의 계획은 급기야 누설되고 말았다. 궁지에 밀린 환관들도 필사적으로 하진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그들은 하태후의 명령이라 속이고 하진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마음 놓고 들어오는 하진을 가덕전(嘉德殿) 앞에서 목베어 죽였다.
환관들은 하진이 죽자 궁궐문을 굳게 닫아 걸고 다음 대책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하진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궁궐 밖에 전해졌다. 원소의 사촌동생 원술(袁術)과 하진의 부장 오광(吳匡)은 궁궐문을 때려부수고 난입하여 남궁 청쇄문에 불을 질렀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기 때문이었다.
원소는 주작문에 진영을 설치하고 십상시(十常侍) 조충(趙忠) 등을 붙잡아 죽이고 북문을 잠근 다음 궁전 안을 샅샅이 수색하여 환관이란 환관은 모두 죽여버렸다. 거세된 남자들은 수염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수염이 없는 자는 무조건 환관으로 오인되어 환관 아닌 사람도 수없이 죽었다. 이때 죽임을 당한 환관의 수가 2천여 명이었다 하니 환관들의 일대 수난이었다.
십상시의 장양과 단규(段珪)는 황제와 황제의 동생 협을 모시고 궁전을 탈출하였으나 소평진(小平津)에서 상서 노식과 민공(閔貢)의 추격을 받았다. 이젠 끝장이라고 체념한 장양과 단규는 강에 투신자살하였다. 투신하기에 앞서 그들은 한마디를 남겼다.
“신들은 이제 죽사오나 폐하께서는 옥체를 보존하셔야 하옵니다.”
황제 형제는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 궁전으로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낙양으로 급히 달려오는 동탁과 마주쳤다. 이때 황제 변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며 동탁이 묻는 말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으나 동생 협은 똑똑히 대답하였다. 확실히 동생 협이 현명했던 모양이다. 이로써 동탁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낙양에 도착하자 동탁은 14세의 어린 황제를 폐하고 9세의 진류왕(陳留王) 협을 황제로 세우니 이 이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이다. 동탁은 하태후가 시어머니인 동태후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영안(永安)으로 옮겨 살게 하고, 얼마 후 독살하였고 하태후의 어머니 무양군도 죽임을 당하였다. 도축장 주인의 딸로 있을 때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파란 많은 일생을 하태후는 겪은 셈이었다.
동탁은 황제 형제를 궁전으로 모시고 돌아온 후 연호를 소영, 영한으로 고쳤다가 다시 중평으로 고쳤다. 이렇게 연호가 자주 바뀌게 된 것은 그만큼 정치적 사정이 불안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동탁은 또 진번·두무 등 당고의 화를 입고 희생된 당인들의 명예와 작위를 회복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등 자신의 정권이 후한 초기 호족 정권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려 하였다.
동탁은 스스로 승상이 되어 제멋대로 정권을 휘둘렀다. 얼마 후 동탁은 상국(相國)이 되었다. 전한 건국의 원훈 소하가 상국이 된 이래 전한·후한을 통틀어 상국의 지위에 오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한 금기(禁忌)를 동탁은 스스로 깨버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천자 앞에서도 추창각주1) 하지 않아도 되며 칼을 차고 전상에 올라와도 된다는 특전을 부여받았다. 이것은 동탁이 황제의 자리에 일보 접근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환관들을 모두 주살한 후 동탁이 낙양에 들어와 제멋대로 황제를 갈아치우자 원소는 이에 반대하여 낙양을 떠났다. 원술도 남양으로 갔으며 조조도 진류 땅으로 가 가산을 털어 5천 명의 군사를 모집하였다.
동탁의 잔학상과 독재에 온 백성들은 치를 떨었으며 지배 계급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병력을 집결하고 각지에 할거했던 군벌들은 명망이 높은 원소를 맹주로 하여 동탁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이들 연합군은 함곡관 동쪽에서 모았기 때문에 관동군(關東軍)이라고 불렀다.
동탁은 농서(隴西)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세력 기반은 농서쪽에 있었다. 낙양에 있다간 관동군의 위협을 받을 뿐 아니라 고립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동탁은 헌제를 모시고 낙양을 떠나 장안으로 돌아갔다.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연합군이 결성된 것은 초평 원년(190) 정월의 일이고 장안으로의 강제 이동은 2월의 일이었다. 동탁은 낙양을 떠날 때 수백 만의 백성들을 강제로 끌고 갔으며 낙양에 있는 궁전, 민가들을 모두 불살라 버려 200리 안팎은 개와 닭조차 살아 남을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었다. 황제의 능조차도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파헤쳐 낙양은 완전 파괴되었다.
동탁 토벌 연합군의 맹주격인 원소는 스스로 거기장군이라 일컬었다. 이때에는 관직도 제멋대로 칭했으니 사실상 후한 왕조의 권위는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맨 먼저 낙양에 들어온 것은 손견(孫堅)이었다. 그러나 이미 낙양은 초토화된 후였으므로 연합군은 자연 해산하고 그 후부터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초평 3년(192) 조조는 제북(濟北)에서 황건적의 잔당 30만 명의 항복을 받아들여 이들 가운데 정예병을 선발하여 강대한 청주군(靑州軍)을 조직하였다.
조조는 원래 패국 초현(沛國譙縣)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조숭은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였다는 설과 하후씨(夏侯氏)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조조는 어렸을 때부터 민첩하여 임기응변에 능하고, 임협방탕(任俠放蕩)각주2) 하여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다.
여남(汝南)사람 허소(許劭)는 그의 사촌형 허정(許靖)과 더불어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여남 일대의 인물에 대하여 논평을 하였다. 매월 초하루에 일정한 법칙에 따라 새로운 인물평을 하였다. 예를 들면 전 달에 좋지 않은 논평을 가했던 사람도 그 후 인격의 수양이 현저히 진보되었으면 그 달에는 좋은 평가를 내리고 반대로 전 달에 좋은 평을 가했던 사람도 퇴보했으면 나쁜 평을 가했다.
그래서 여남 사람들은 이를 월단평(月旦評)이라고 불러 그들이 가하는 평을 즐겨 들었다.
조조는 여남에 달려가 허소에게 물었다.
“나는 어떠한 인물입니까?”
허소는 처음에는 조조를 업신여기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조는 칼날을 들이대며 위협하였다. 허소는 한참 동안 조조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대답하였다.
“당신은 치세(治世)의 능신(能臣)이며, 난세(亂世)의 간웅(姦雄)이오”각주3)
이 말을 들은 조조는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조조가 청주군을 토대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무렵 동탁은 장안에서 강탈과 착취를 일삼아 재물을 긁어모으고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를 위해 그는 25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장안으로부터 130킬로미터 떨어진 미성(郿城)에 미오(郿塢)를 구축하고 여기에 30년 분의 식량, 황금 213만 근, 백은(白銀) 8, 9만 근, 그 밖의 보물을 산더미처럼 저장해 놓았다. 그리고 나서 동탁은 호언장담하였다.
“이 정도의 재물만 있으면 잘하면 천하의 패자가 될 것이고, 만일 실패하더라도 고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탁은 이같이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장안에 있는 동상, 궁중의 동종(銅鍾)·종가(鍾架) 등을 모두 때려부수었다. 전한 무제 이래 발행해오던 오수전(五銖錢)을 회수하여 작은 동전으로 만들어 유통시켰다. 이 때문에 화폐 가치가 떨어져 물가가 폭등하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동탁은 장안과 거의 같은 크기의 미오를 구축해 놓았으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심이라 생각하고 포학만을 일삼았다. 인심은 즉 천심이고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란 진리를 동탁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동탁은 인심을 잃은 뒤에 그의 진영에도 내분이 일어났다.
초평 3년(192) 4월 동탁은 사도 왕윤(王允)과 그의 부장 여포(呂布)의 계략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동탁의 시체가 효수되자 이를 감시하는 군사가 동탁의 시체가 너무 살지고 기름져서 그 배꼽에 커다란 심지를 꽂고 불을 당겼다. 그러자 기름이 지글지글 끓으며 불이 붙어 빛을 내며 며칠 동안 계속 타올랐다.
동탁은 제거되었지만 그의 잔당들은 아직도 세력을 누리고 있었다. 동탁의 부장 이각(李傕)·곽사(郭汜)가 장안을 공격하여 왕윤 등 1만여 명을 죽이고, 서로 권력을 다투는 바람에 장안은 다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 사람의 그림자조차 끊겼다. 적미군의 난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겨우 옛 면모를 되찾은 장안은 다시 황폐화되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이각·곽사 사이를 인질처럼 끌려다니던 헌제는 건안 원년(196) 다시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궁전은 모두 불타 폐허가 되고 잡초만 무성했다. 헌제는 환관이 살던 초라한 집에 잠시 몸을 의탁하였으며 수행한 대신들은 먹을 것이 없어 초근 목피로 생명을 유지해야 했다. 그중에는 굶어죽는 자까지 속출하였다. 이때 각지의 호걸과 군벌들은 자신의 기반을 구축하고 실력을 쌓아 전쟁할 준비에 혈안이 되어 몰락해가는 황제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렇게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가 어쩔 수도 없는 형편에 처해 있을 때 지금의 하남(河南) 중부 일대에서 천하의 대세를 관망하고 있던 조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 헌제를 모시고 허창(許昌)으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조조는 강력한 청주군을 바탕으로 서주(徐州)의 도겸(陶謙), 회남(准南)의 원술(袁術), 완성(宛城)의 장수(張繡), 동탁을 살해한 여포 등 대소 군벌들을 차례차례 물리치고 황하 중류와 하류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을 확보하였다. 헌제를 맞아들인 조조는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영을 내려 정치적·군사적으로 우세하고 군웅 가운데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한편 관동군의 맹주로 추대됐던 원소는 동탁이 서쪽 장안으로 도망간 후 황하의 중류·하류 이북 지방에서 대소 군벌과 호족들을 복종시켜 당시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는 최대의 군벌로 군림하였다. 그는 조조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건안 4년(196) 유주(幽州, 현재의 북경 일대)에 할거하여 원소를 위협하던 공손찬(公孫瓚)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즉시 10만 명의 정예군을 남하시켜 조조와 자웅을 겨루려 하였다.
조조와 원소는 각기 명문 출신으로 청년 시대에 이미 낙양에서 사귄 일이 있었다. 두 사람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결혼식장에서 갓 결혼한 신부를 훔치기로 한 일이 있었다. 조조와 원소가 갑자기 소리쳤다.
“도적이야, 도적이야!”
신부를 보호하고 있던 사람들이 뿔뿔히 흩어져 달아났다. 이 틈을 타 이들은 신부를 훔쳐가지고 달아나다가 원소가 갑자기 가시덤불 속으로 빠져 꼼짝 못하게 되었다. 이때 조조가 또 큰소리로 외쳤다.
“도적이다, 도적!”
그러자 원소가 당황하여 가시덤불 속으로부터 뛰쳐나와 두 사람이 함께 도망쳤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조조의 간교함과 당시 귀족들이 얼마나 무례하였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의 대결은 공손찬이 멸망한 이듬해인 건안 5년(200), 황하 근처 관도(官渡, 하남성 중모현)에서 펼쳐졌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관도의 대전’이다.
원소의 군사력은 겉으로 보기에는 강대한 것 같았으나 총수인 원소가 교만할 뿐 아니라 군 내부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원소군은 초전에 대장 안량(顔良)을 잃고 2차 전투에서도 명장 문추(文醜)를 잃었다. 두 번의 전투에서 안량과 문추를 벤 조조군의 장수는 다름아닌 관운장이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관운장이 관도 대전을 끝내고 유비(劉備)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 위해 오관(五關)을 지키는 장수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삼국지연의》에 소개되어 유명하다.
안량과 문추를 잃은 원소군의 사기는 갑자기 떨어졌다. 그러나 원소는 병력과 군량의 우세한 것만을 믿고 여전히 조조의 주력 부대와 결전을 벌이려 하였다.
원소군의 감군(監軍) 저수(沮受)는 원소에게 다음과 같은 계책을 진언하였다.
“병력과 군량이 열세에 있는 조조는 속전속결을 바라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지구전으로 맞서 조조가 피폐하기를 기다려 진격한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그러나 원소는 말을 듣지 않고 서둘러 조조군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자 군사(軍師)인 허유(許攸)가 또 계책을 올렸다.
“조조는 그의 전병력을 동원하여 관도에 포진하고 있으므로 그의 후방은 텅빈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 병력을 나누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 200리 밖에 있는 허창을 습격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원소는 이 계책도 물리쳤다.
원소군과 조조군은 대치한 지 반 년이 지났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조조는 군량이 부족하여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군사를 철수시킬 계획을 세웠다. 최종적으로 군사인 순욱(荀彧)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물었다.
“양군이 대치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먼저 군사를 철수시키는 쪽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좀 더 굳게 지키고 있으면 원소군 내부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 승기를 잡을 기회가 올 것입니다.”
순욱이 서면으로 알려왔다.
이때 마침 원소의 군사 허유가 원소로부터 추방되어 조조 진영에 몸을 의탁해왔다. 조조는 허유가 왔다는 말을 듣고 신도 신지 않은 버선발로 맞이했다.
허유가 조조에게 물었다.
“지금 원소군은 막강합니다. 조공(曹公)께서는 어떠한 계책으로 대처하시겠습니까? 그보다 먼저 군량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습니까?”
“앞으로 1년 정도는 끄덕 없습니다.”
조조는 자신있게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반 년 정도는 견딜 수 있소이다.”
“원소군을 물리치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어째서 솔직히 털어놓지 않습니까?”
조조는 마지못해 대답하였다.
“사실은 한 달 정도의 군량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계책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에 허유는 원소의 군량과 물자가 쌓여 있는 오소(烏巢, 하남성 연진현)를 기습할 것을 조조에게 권하면서 단언하였다.
“만약 기습에 성공한다면 사흘을 못 가서 원소는 패배할 것입니다.”
조조가 오소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원소는 크게 놀랐다. 그러나 오소를 구원할 병력은 극소수만 보내고 전군의 주력 부대에게는 조조의 관도 진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조급한 결정을 내린 데 대하여 원소군의 장군들은 크게 불만을 표시하였다. 원소는 대세의 의견을 수렴하여 최선책을 강구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였다.
원소군은 조조의 진지를 공격하였으나 조조군은 처음부터 방비만 굳게 할 뿐 나와 싸우지 않으니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 사이에 조조군은 오소를 습격하여 원소의 군량과 물자를 모두 불태웠다. 오소가 불탔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군은 크게 동요하여 제1선의 주장 장합(張郃) 등은 조조군에 항복하였다. 이에 조조군은 승기를 잡아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원소군은 크게 궤멸되어 10만의 군사 가운데 7만 이상이 전사하고 원소 자신은 800명의 기병에게 호위되어 겨우 목숨을 보전하였다.
원소는 이로부터 2년 후에 죽고 그의 아들들이 잠시 동안 조조에게 저항을 계속했으나 형제간의 불화로 얼마 후 조조에게 완전 멸망되고 말았다.
이로써 조조는 당시 중국의 13주(州) 가운데 연주·기주·청주·유주·병주의 다섯 주를 차지하여 중국의 거의 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조조가 차지한 주는 인구가 가장 많은 중원 지역이었기 때문에 천하의 반을 완전히 장악한 셈이었다.
삼국지의 주역은 조조·유비·손권의 세 사람이다. 이 세 사람 가운데 조조는 그의 재력과 지략을 바탕으로 황하 북쪽의 최대 라이벌인 원소를 관도의 대전에서 물리치고 13주 가운데 다섯 주를 장악하는 최강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를테면 삼국지의 무대에서 완전히 기선을 제압한 셈이다.
이에 비해 유비(劉備)는 황건적의 난 때 관우(關羽)·장비(張飛) 등과 함께 교위 추정(鄒靖)의 황건적 토벌군에 분연히 종군하여 그 전공으로 안희현(安喜縣)의 현위가 되었다. 당시 현에는 현령 밑에 현승과 현위를 두었는데 현승은 문서 행정, 현위는 군사 담당으로 봉록은 400석에서 200석 정도였다. 나중에 유비의 라이벌로 천하를 다투게 된 조조·손견·원소 등은 이때 이미 2천 석의 봉록을 받는 지위에 있었으니 유비는 출발이 너무 늦은 셈이었다. 출발이 늦을 뿐 아니라 그는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지 못해 이리저리 유랑하는 세월을 근 20년 동안이나 보내야 했다.
유비(161~223)의 자는 현덕(玄德)으로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이었다. 유달리 팔이 길고 귀가 컸으며,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있었다. 말수가 적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잘 나타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황족의 후예였지만 유비의 대에 이르러서는 가산이 몰락하여 짚신이나 자리를 짜서 생계를 유지했다. 동탁의 토벌 때는 공손찬에 가담한 적도 있었으며 그 후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에게 의탁하고 있다가 도겸이 죽자 서주를 차지하였다. 그때 조조는 원술을 토벌하기 위해 유비와 연합하였으나 유비는 도리어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기고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이때 이름뿐인 황제 헌제는 외척 동승(董承)과 상의하여 “조조를 쳐 없애라.”는 밀조(密詔)를 유비에게 건넸다. 그러나 밀조 사건은 사전에 누설되어 조조는 유비를 공격하였다. 유비는 패하여 원소한테 도망가 그곳에 의탁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관도의 대전’이 있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이 공격에서 관우는 조조의 포로가 되고 장비는 산중으로 들어가 3인의 의형제는 뿔뿔히 흩어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관도의 대전에서 원소가 대패하고, 원소의 명장 안량과 문추를 쓰러뜨린 장수가 관우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유비는 원소 곁을 떠나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관우도 안량 문추를 목베인 공으로 조조와의 약속을 청산하고 유비를 찾아 가던 중 중간에서 장비를 만나 마침내 세 사람은 오랜만에 재회를 맛보았다.
삼국지의 또 한 사람의 주역인 손권(孫權)은 황건적 토벌에 공이 많은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이었다. 손견이 황조(黃祖)와의 싸움에서 화살에 맞아 죽자 그의 첫째 아들 손책(孫策)이 17세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손책은 남양(南陽)에 있는 원술을 찾아가 아버지 손견이 거느리던 군사 5천 명을 얻었다. 또 손책과 동갑인 서주 사람 주유(周瑜)도 재략이 뛰어나 일찍부터 이름을 떨치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손책을 따라 군사를 일으켰다. 손책은 동쪽으로 양자강 일대를 공략하자 감히 그의 예봉을 당할 자가 없었다. 백성들은 손책이 나이가 어리고 용감하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을 졸이며 떨었으나 막상 와서 보니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손해를 끼치지 않고 백성들을 위무하니 모두들 크게 기뻐하였다.
손책은 강동(江東) 지방을 평정하고 조조의 거점인 허창을 공격할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아직 실력이 미치지 못하여 망설이고 있을 때 앞서 손책이 격파한 예군(절강) 태수 허공(許貢)의 부하가 손책을 저격하여 손책은 중상을 입었다. 워낙 중상이어서 회복의 가능성이 없자 손책은 동생 손권을 불러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강동의 대군을 거느리고 계책을 짜내어 일거에 적을 분쇄하고 천하의 영웅과 자웅을 겨루는 일은 네가 나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어진 자를 등용하여 쓰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려 강동을 보존하는 일은 내가 너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
후사를 손권에게 맡기고 죽으니 그때 손책의 나이 겨우 26세였고 손권은 19세였다.
손권은 나이가 어렸지만 장소(張昭)·주유·노숙(魯肅) 등 구신들이 잘 보좌하고, 또 자신이 여몽(呂蒙) 등 재능 있는 인물을 등용하여 더욱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회계(會稽)·오(吳)·단양(丹陽)·예장(豫章)·여강(廬江) 등의 제군을 장악하고 양자강 중류에서 절강까지 세력을 뻗쳐 강동 지방에서 요지부동의 대업을 이루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던 중평 원년(184)을 기준으로 삼국지 주역들의 연령을 살펴보면 조조 30세, 유비 24세, 손견 29세, 손권 3세, 제갈공명 4세였다. 유비와 제갈공명이 만나게 된 것은 유비의 나이 47세, 제갈공명의 나이 27세 때였다. 이들의 만남은 천하를 삼분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유비가 관도의 대전이 있은 후 원소의 곁을 떠나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했다는 이야기는 위에서 언급하였다. 유비가 형주로 오자 유표는 소수의 병력을 유비에게 주어 신야(新野, 하남성 서남쪽)를 지키게 하였다. 유비가 큰 뜻을 품고 일어난 후 신야에 오기까지는 이미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비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긴 하였으나 안정된 기반을 갖지 못하였다. 신야에 정착한 유비는 인재를 구하고 어진 사람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 날 유비는 양양 땅 사마휘(司馬徽)를 만나 물었다.
“당대의 명사는 누구입니까?”
그러자 사마휘가 답하였다.
“유생과 속사들이야 어찌 당금의 시무(時務)를 알겠습니까. 오직 준걸지사라야만 방금의 난세를 해결할 대책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근처에 이른바 복룡(伏龍)각주4) 과 봉추(鳳雛)각주5) 라 불리는 두 영걸이 있습니다.”
“복룡은 누구이며, 봉추는 누구입니까?”
유비가 다시 물었다.
“복룡은 제갈공명이고, 봉추는 방사원입니다.”
유비는 두 사람을 만나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때 영천 사람 서서(徐庶)가 유비를 찾아왔다. 유비가 서서를 예우하자 서서가 말하였다.
“제갈공명은 확실히 와룡(臥龍, 복룡과 같은 뜻)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만나보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가서 제갈공명을 데리고 오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을 만나시려면 예를 갖추어 친히 찾아가셔야 할 것입니다.”
이에 유비는 서둘러 제갈공명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제갈양(諸葛亮, 181~234)의 자는 공명(孔明)으로 양(亮)이라는 이름보다 공명이라는 자로 더 알려져 있었다. 낭야군 양도(陽都, 산동성 기수현)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를 따라 형주로 이주하였다. 17세 때 숙부와 사별한 후 융중(隆中, 호북성 양번 서쪽)에 초가를 짓고 밭을 갈면서 경전과 사서(史書)를 공부하고 벗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자신을 춘추·전국 시대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과 연나라의 명장 악의에게 비유하였다.
그 지방의 지식인들은 모두 제갈공명을 당대의 영걸로 보고 때가 오면 언제든지 하늘로 오를 것이라 생각하여 와룡 선생(臥龍先生)이라 불렀다.
47세가 되도록 안정된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유비는 그의 동생 관우·장비를 대동하고 융중으로 달려가 자신보다 20세 연하인 제갈공명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처음 두 번은 만나지 못하고 세 번째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정중히 인사를 마친 후 유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 한 왕조는 쇠퇴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천하를 안정시킬 생각으로 분연히 일어났으나 재주가 없어 반생이 넘도록 아무런 성과도 없습니다. 선생님의 현명하신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제갈공명은 유비의 성실함과 겸허함에 마음이 끌려 당시의 정치 정세를 상세히 분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동탁이 낙양에 들어와 정치를 어지럽힌 이후 군웅들이 천하에 할거하여 그 세력이 강대한 자도 적지 않습니다. 조조는 1백 만의 대군을 거느린 위에 천자를 끼고 제후에 군림하고 있으니 지금 당장 조조와는 싸울 수 없습니다. 강동의 손권은 장강의 이점과 천험의 요새를 거점으로 하고 있고 백성들이 잘 따르며 재능 있는 자들이 손권을 위해 열심히 일하니 그와는 차라리 연합할지언정 싸울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됩니다.
형주각주6) 는 지세가 험하고 익주(益州)각주7) 는 사방이 천험의 요새로 둘러싸여 그 안은 기름진 평야로 물자가 풍부합니다. 그러나 두 주의 주인은 어리석고 겁이 많으니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장군께 내린 땅이며 가히 군사를 움직일 만한 곳입니다.
장군께서는 동쪽 오나라의 손권과 연합하고, 서쪽으로 형주와 익주를 차지한 다음 남쪽으로 이·월(夷越)과 화친을 맺고 힘을 길러야 합니다. 천하의 대세를 관망하고 있다가 일단 천하의 형세가 바뀌게 되면 상장군을 형주로부터 북상시켜 완성과 낙양을 탈취하고, 장군께서는 친히 익주로부터 출병하여 곧바로 진천(秦川)각주8) 을 향해 공격해 들어갑니다. 이렇게 하면 천하통일의 대업은 장군의 손으로 성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융중대책(隆中對策)’이다.
공명은 융중대책에서 유비의 금후의 정책과 군사 활동의 기본 전략을 털어놓았다.
유비는 공명의 정확한 정세 판단과 논리정연한 말에 크게 감복하여 세상에 나아가 도와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때부터 제갈공명은 유비를 보좌하게 되었으며 훌륭한 정치가·군략가로서 그 이름을 후세에 길이 남기게 되었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삼고지례(三顧之禮)’라는 고사성어는 유비가 세 번에 걸쳐 예를 갖추어 제갈공명을 방문했다는 이 고사에서 유래한다.
유비는 제갈공명을 맞이한 이후 그를 스승의 예로 대접하여 그 대우함이 너무 지나치자 이를 본 관우와 장비가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러자 유비가 타일렀다.
“나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은 것이다(물이 없으면 고기가 살 수 없다). 그러니 두 동생들은 양해해 주기 바란다.”
지금도 제갈공명이 살았던 융중에는 많은 고적이 보존되어 있다. 고융중방(古隆中坊), 삼고당(三顧堂), 초려정(草廬亭), 궁경전(躬耕田) 등은 지금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고(懷古)의 정을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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