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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2 당의 건국과 흥망
안사의 난
安史之亂천보 14년(755) 안록산(安祿山)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일찍이 안록산은 천보 원년(742) 새로 설치된 평로 절도사(平盧節度使)가 되고 같은 3년에 범양(范陽) 절도사를 겸하였다.
안록산은 체중이 230근각주1) 이나 되는 보기 드문 뚱뚱보로 그의 뚱뚱한 배는 무릎을 덮을 정도였다. 현종은 어느 날 안록산의 배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 뱃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기에 그렇게도 뚱뚱한가?”
그러자 녹산이 대답하였다
“예, 오직 폐하에 대한 일편단심이 들어 있을 뿐입니다.”
양귀비는 이 같은 안록산이 마음에 들었다. 익살스럽고 털털하며 모나지 않고 수수한 그의 성격을 바탕으로 안록산은 손쉽게 현종과 양귀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안록산은 양귀비의 수양아들이 되고 싶다고 자청하여, 입궐하면 먼저 양귀비에게 인사를 올리고 다음에 현종을 배알하였다. 현종이 그 연유를 물었다.
“오랑캐(안록산은 오랑캐 출신이었음)의 풍습에서는 어머니를 첫째로 하고 아버지를 다음으로 하는 것이옵니다.”
안록산의 대답에 사람들이 웃었다. 현종도 양귀비도 안록산의 이 같은 연극이 가면일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안록산의 생일에는 현종으로부터 하사되는 선물이 무진장하였다. 그로부터 3일째 되는 날 안록산이 궁중에 초대되어 입궐했을 때 양귀비는 화려한 비단으로 큰 포대기를 만들어 안록산을 둘둘싸서 화사한 색깔로 칠한 수레에 태우고 궁녀들로 하여금 그 수레를 끌게 하였다. 이것은 전에 안록산이 양귀비의 수양아들이 되겠다고 자청한 것을 허락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장난삼아 자신의 영아로 취급한 것이다.
현종은 궁녀들이 웃으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좌우의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지금 막 양귀비가 녹아(祿兒)각주2) 에게 포대기를 내려주고 계십니다.”
그러자 현종은 양귀비에게 출산 축하금을 내려 한바탕 즐거워하였다.
그 후 안록산은 수시로 궁중에 출입하였으며 때로는 한 밤을 궁중에서 지새워 물러가지 않은 일이 있어 양귀비와의 추문이 널리 세상에 퍼졌다. 그러나 현종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다시 안록산에게 하동(河東) 절도사를 겸하게 하였다.
당시의 재상 이림보는 안록산보다는 한 수 높은 인물이었다. 안록산과 무슨 일을 의논할 때면 심중을 꿰뚫어 보듯 안록산이 말하고자 하는 일을 앞질러 말하니 배짱 좋은 안록산도 이림보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천보 11년 12월 재상 이림보가 죽고 양국충이 재상이 되었다. 안록산은 이림보의 권모술수가 두려워 이림보가 죽기 전에는 감히 모반을 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림보가 죽고 그해에 양국충이 재상이 되자 양국충은 현종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안록산은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인물입니다. 시험삼아 도성으로 오라는 명령을 내려 보십시오. 그러면 안록산은 반드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도성으로 오지 않는 것은 그에게 반란의 뜻이 있다는 증거 이옵니다.”
현종은 양국충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시험삼아 안록산을 소환하였다. 그러자 안록산은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입궐하였다. 이때부터 현종은 양국충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으며 안록산에게 좌복야의 벼슬을 더하여 임지인 범양으로 돌려보냈다.
천보 14년(755) 안록산은 “밀조를 받들어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범양·평로·하동의 휘하 병력과 해(奚)와 거란(契丹)의 군사를 합하여 총병력 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범양을 출발하여 보무도 당당히 하남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보병과 기병이 모두 정예하여 그들이 달리며 일으키는 자욱한 먼지는 100리까지 뻗혔다.
현종은 장안에 호화 주택을 지어 안록산에게 주는 등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록산이 모반을 일으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현종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고도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잇따라 들어오는 안록산의 반란 보고를 들은 현종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황한 현종이 수도 장안을 수비할 병력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으나 전투할 만한 군사는 전무한 상태였다.
할 수 없이 현종은 병의 치료를 위하여 장안에 와 있던 하서·농우(감숙·청해 일대)의 절도사 가서한(哥舒翰)에게 급히 긁어모은 잡병 8만 명을 거느려 동관각주3) 을 수비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세상은 수십 년 동안 태평 세월을 누려왔기 때문에 아무 방비가 없어 안록산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계속하여 낙양을 함락하였다.
낙양을 함락하였다고는 하나 안록산의 반란군은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각 지방이 아무 방비가 없었기 때문에 안록산의 반란군이 마음대로 진격할 수 있었으나 얼마 후에는 이곳저곳에서 백성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반란군의 진격을 저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처음 현종은 하북 일대가 아무 저항없이 안록산에게 항복하자 이렇게 탄식하였다.
“하북 24군 가운데 한 사람의 의사도 없단 말인가!”
얼마 후 평원 태수 안진경(顔眞卿)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현종은 그만 감격하였다.
“짐은 안진경이 어떤 인물인지 조금도 아는 바가 없지만 어쨌든 이런 충의지사가 있다니!”
평원 태수 안진경은 남하하려는 안록산의 반란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안록산군이 곡창 지대인 강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시켰다. 또 삭방(朔方, 영하) 절도사 곽자의(郭子儀)와 그의 부장 이광필(李光弼) 등도 하북에 출병하여 낙양·범양 간의 안록산군의 교통로를 차단하였다.
이렇게 해서 안록산의 반란군은 동관을 공격할 수도 없고, 또한 강남으로 진격할 수도 없는 상태에 빠져 몇몇 군에 갇힌 채 각 전선 간의 연락이 두절되어 버렸다. 궁지에 몰린 안록산은 반란을 책략했던 자에게 호통을 쳐댔다.
“네놈은 ‘반란을 일으킬 시기가 무르익었습니다. 만사가 형통입니다.’ 하더니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뭣이 만사형통이란 말이냐?”
같은 해 양국충은 운남의 남조(南詔)를 토벌하기 위하여 8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원정에 나섰다. 물론 양국충은 이 원정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남조의 수장 각라봉(閣羅鳳)은 양국충의 원정 소식을 듣고 사죄하였으나 양국충은 이를 허락지 않고 전쟁을 벌이다가 전사자 6만 명을 내는 대참패를 맛보았다. 실은 무공이 없는 양국충이 무공의 관록을 세워보겠다는 야심에서 계획된 원정이었다. 그는 장안의 조정에는 패전 상황을 숨기고 터무니없는 전공만을 나열하여 보고하였다.
그 후 양국충은 장안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불안하였다. 만약 당나라 군사가 계속 승리를 거두어 동관을 수비하고 있는 가서한이 군사를 돌려 자신을 토벌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서 양국충은 흑심을 품게 되었다.
양국충은 가서한군의 힘을 약화시켜야겠다고 생각하여 가서한에게 낙양 탈환 명령을 내리도록 현종에게 상주하였다. 현종은 적군과 아군의 힘의 관계도 고려치 않고 무조건 가서한에게 낙양 탈환 명령을 내렸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가서한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장안에 와 있던 장군이었고 그 밑에는 훈련도 받지 않은 오합지졸이 있을 뿐이어서 동관을 지키기에도 역부족인 형편이었다. 그런데다 낙양을 공격하라니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가서한군은 낙양을 공격하자마자 전멸 상태에 빠지고 가서한 또한 모반을 일으킨 부하로부터 협박을 받아 반란군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장안을 지키는 동쪽의 요충지 동관은 모두 안록산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가서한이 동관을 지키고 있을 때 매일 밤 봉화를 올려 동관의 무사함을 주위에 알렸으나 어느 날 밤 갑자기 봉화가 오르지 않았다. 바로 이 날이 동관이 안록산의 수중에 들어간 날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봉화가 오르지 않자 장안의 거리는 불안에 떨어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사태를 전후하여 72세의 현종은 오랫동안 들르지 않았던 근정전에 모습을 나타내어 수도 장안에 잔류할 관리를 임명하고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짐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진하겠노라.”
그러나 이 같은 황제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연 그날 밤 현종은 친위군에게 출진 준비를 명하긴 하였으나 안록산의 반란군과 싸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날이 새자 현종은 연추문을 열어젖히고 양귀비와 그의 자매, 황족, 측근, 대신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무장한 1천 명의 친위군이 이들을 호위하여 서남쪽 촉 땅으로 향했다.
다음날 장안과의 거리가 100여 리 되는 마외역(馬嵬驛)에 도착하였다. 수행하던 장병들은 굶주리고 피로에 지쳐 지금까지 꾹 참아오던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재상 양국충의 잘못 때문이다.’라고 분개하여 양국충의 목을 베고 이어 현종의 거처를 포위하였다. 그리고 소리높여 “양귀비를 주벌(誅伐)하라.”고 외쳐댔다. 이들 병사들의 분노에 찬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키자 현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현종은 눈물을 삼키며 양귀비에게 스스로 목매어 죽을 것을 명하였다. 양귀비가 죽자 장병들은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길을 재촉하였다.
양귀비의 말로는 당연히 받아야 할 징벌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백성들에게 재앙을 가져다 준 장본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현종이었다.
양귀비가 죽은 후 10여 일 후에 장안도 함락되었다. 현종은 오로지 촉 땅으로 피난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연도의 백성들은 현종의 피난 행차를 가로막으며 가는 것을 중지하라고 요청하였다. 현종은 태자에게 백성들을 위로하라 이르고 자신은 계속 길을 재촉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태자의 말을 둘러싸고 간청하였다.
“황제 폐하께서 구태여 피난을 가신다면 저희들 백성들은 황태자를 모시고라도 반란군을 무찌르고 수도 장안을 탈환할까 합니다. 만약 폐하와 태자가 촉 땅으로 피난하신다면 중원 천지는 모두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질 것입니다. 헤아려 주시옵소서.”
태자는 황손 숙(淑)을 현종에게 보내 백성들의 뜻을 현종에게 아뢰도록 하였다.
“모든 것이 천명이다. 태자는 백성들의 뜻에 따라 분발하라. 서북의 여러 호족(胡族)들은 짐이 오랫동안 아꼈던 터라 분명 태자의 힘이 되어 줄 것이다.”
현종은 그의 뜻을 멀리 선포하고 양위할 뜻을 비쳤다. 그러나 태자는 이를 사양하였다.
태자가 평량(平凉)에 나아가자 삭방 유후(留後, 관직명) 두홍점(杜鴻漸)이 태자를 나와 맞아 영무(지금의 영하로 영무현 서남쪽)로 받들어 모시고 앞서 있는 현종의 칙명에 따라 즉위할 것을 간청하였다. 태자는 쉽게 승인하지 않았으나 다섯 차례에 걸쳐 간청하자 마침내 허락하였다. 현종 황제에게 상황 천제라는 존호를 받들어 올리고 태자 이형(李亨)이 즉위하니 이 이가 당의 숙종(肅宗)이다. 이때가 천보 15년(756)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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