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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2 수나라 시대
동도의 건설과 운하의 개설
문제의 뒤를 이어 수나라 2대 황제가 된 양광이 바로 중국 역사상 악명을 떨친 폭군 수의 양제(569~618)이다. 그는 확실히 이중 인격자이며, 연기의 명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요령과 명연기를 연출하였다.
그의 어머니 독고 황후가 죽었을 때 그는 이미 황태자로 세워져 있었으나 기절할 정도로 슬픔에 잠겨 통곡하는 연기를 펼쳤다. 그러나 자기 방에 들어가서는 평소처럼 음식과 담소를 즐겼다. 그렇다면 양제가 아버지를 죽인 날 밤 선화 부인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내고 그 여인을 범했다는 정사의 기록은 신빙성 있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형을 대신하여 황태자로 세워진 것은 여성 관계에 악평이 없고 생활이 온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여성 관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행동은 언제 그랬던가 싶을 정도로 달라졌고 그의 생활도 과감하리 만큼 사치와 호사에 흘렀다.
원래는 호화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는데 째째하게 검소하고 절약하는 연기를 연출하였다가 제위에 오르자 본래의 자기로 돌아간 것 뿐이었는 데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이고 이상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양제는 즉위하던 해인 대업 원년(605) 장안에서 낙양(동도)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하였다.
동도 건설이라는 대규모 사업이 당시의 유명한 기술자 우문개(宇文愷)의 지휘 아래 시작되었다. 그해 3월에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1월에 완성되었는데 그 사이 매월 약 200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
공사에 동원된 농민들은 고향을 멀리 떠나 낙수의 양안(兩岸)에서 동도의 건설을 위해 피와 땀을 흘려야 했다.
대규모적이고 웅대한 궁전을 짓기 위하여 멀리 장강 이남의 좋은 목재를 벌채하여 이를 운반해왔다. 한 개의 목재를 운반하는 데 2천 명의 인부가 필요하였다 하니 난공사 중의 난공사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낙양성의 웅대하고 화려한 궁전을 더욱 화사하게 꾸미기 위하여 조경 공사가 벌어졌다. 장강에서 오령(五嶺)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산재해 있는 진기한 나무와 돌, 기화요초, 진조기수(珍鳥奇獸) 등이 모두 수집되어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이 궁전의 유적은 현재 하남성 낙양시 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고고학자의 실지 조사에 의해 외성(外城)의 둘레가 20여 킬로미터에 이른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지금까지도 성문과 상수도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고 한다.
궁전의 건축 공사와 운하의 굴착 사업은 같이 시작되었다. 운하의 굴착이라 하지만 전혀 새로운 수로(水路)를 굴착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있었던 자연 하천을 연결하는 공사였다.
북쪽의 북경, 천진에서 남쪽 항주(杭州)에 이르는 중국 동부 지역에는 해하(海河)·황하·회하·장강·전당강의 5대 강이 흐르고 있으며 각 강의 지류는 그다지 멀지 않는 작은 물줄기들로 이루어져 이들 작은 물줄기를 연결시키고 강 밑을 파내면 운하가 되는 것이었다. 통제거(通濟渠)의 예를 들면 낙양 서원(西苑)에서 곡수와 낙수를 끌어들여 황하에 흐르게 하고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변수에 흐르게 하고 변수를 끌어들여 쇄수(洒水)에 흐르게 하여 회수에 연결시키는 공사였다. 이 공사를 위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징발되어 간구(刊溝)를 깊게 파 운하를 만들고 이 간구를 장강에 연결하였다. 그리고 이 운하 곁에는 길을 만들어 버드나무로 가로수를 심고 낙양에서 강도에 이르는 사이 사이에 40여 개의 이궁(離宮)을 만들었다.
운하의 굴착은 물론 수왕조의 지배를 강화하고 황제의 향락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남북간 경제 교류 문제라는 관점에서는 역사적 과업이라 할 수 있다.
진한(秦漢) 시대에는 전국 경제의 중심지가 중원 지방이었으나 후한 이래 남북이 분열되면서 중원에 거주하던 사람의 남방 이주가 시작되어 장강 이남의 지역에서도 점차 개발이 촉진되었다. 수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경제의 중심이 남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 때에는 ‘조세 수입의 9할을 강남이 차지했다.’고 할 정도로 강남 지방이 경제적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따라서 수나라가 중국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남북 간의 경제 교류는 이미 대세가 지향하는 필연적 사실로 대두되었고 지금까지 해오던 수레나 마소를 이용한 물자 교류 방법으로는 수요 공급을 원활하게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수나라로선 남북을 연결하는 수로가 절대 필요하였으며 결국 운하의 공사는 이 같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현실화된 것이라 하겠다.
양제는 또 기술자와 인부를 강남에 파견하여 황제가 탈 용선(龍船)과 유람선 등 수만 척의 배를 만들게 하였다. 낙양 서원은 그 둘레가 200리나 되는 넓이였는데 한가운데 큰 호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호수 가운데에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라는 산을 만들었는데, 모두 신선이 산다는 산의 이름이다.
이들 산의 높이는 각각 100여 자이고 망루(望樓)와 궁전이 산 위에 들어서 장관을 이루었다. 또 호수 북쪽에는 도랑을 파 구불구불 돌아서 호수에 흘러들어가도록 하고 그 도랑을 따라 16개의 어전(御殿)을 만들어 각 어전마다 4품 부인을 두어 주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을 모두 도랑쪽으로 세워 수면에 그림자가 드리우게 하였다. 한마디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겨울이 되어 궁전의 나무에 잎이 떨어지면 여러 가지 색비단으로 꽃과 잎새를 만들어 나뭇가지에 매달고 연못에도 색비단으로 만든 연잎과 연꽃을 띄웠다. 양제가 남여를 타고 거동할 때는 얼음을 깨고 꽃을 띄우니 각 어전을 주관하는 4품 부인들은 임금의 은총을 구하기 위하여 임금이 좋아하는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임금을 맞이했다.
양제는 달밤에 자주 궁녀 수천 명을 말에 태우고 서원에서 〈청야유(淸夜遊)〉라는 가곡을 연주시키며 놀았다.
서원의 공사가 완성된 것이 5월의 일이고 8월에는 양제가 강도(江都, 양주)를 순행하였다. 낙양의 현인궁을 떠나 낙구(洛口)에서 용선을 타고 운하를 따라 내려갔다. 배를 젓는 사람이 8만여 명이고 배의 수미(首尾)가 맞닿아 이어진 행열이 200리에 뻗쳐 강과 육지가 오색찬란한 장막을 이루었다. 말탄 기병이 양쪽 언덕을 호위해 행진하였다. 호위하는 병사들의 황금 갑주는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고 줄이은 깃발은 하늘을 가리웠다. 지나는 주현 500리 내에 영을 내려 음식을 헌상하도록 하였다. 많은 곳은 한 주(州)에 100수레나 되었는데 모두가 산해진미요, 진수성찬이었다. 후궁들이 실컷 먹고도 산더미처럼 남아 떠날 때는 모두 땅에 묻고 갔다.
운하의 공사는 4기로 나누어 실시되었는데 대업 원년(605)에서 대업 6년(611)까지의 공사 기간에는 낙양을 중심으로 북쪽은 탁군(涿郡), 남쪽은 여항(余杭)에 이르는 장장 2천 킬로미터의 남북을 연결하는 운하가 완성되었다.
동도의 건축과 운하의 굴착, 인공 호수와 인공 산(山)의 조영, 몇만 척에 이르는 용선과 유람선의 건조, 만리장성의 축조 공사 등으로 수십만, 수백만에 달하는 인부가 동원되어 노역은 일종의 재난처럼 여겨졌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낙양 동쪽과 북쪽 수백 킬로미터의 도로변에서는 매월 인부들의 교대가 이루어졌는데 축성 공사에서 희생된 시체가 도로 여기저기에 널려 있고, 운하의 양 언덕에도 도처에 시체가 뒹굴었다고 한다.
만리장성 공사 현장에서는 10일 사이에 100만 명의 인부 가운데 반 이상이 사망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당시 많은 농가의 전답은 황폐화된 채 그대로 방치되었고 도처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들의 가련한 모습과 고아들의 처참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마디로 백성들은 생사의 갈림길을 방황하고 있었다. 이렇듯 무서운 노역을 피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의로 자신의 팔다리를 잘랐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신체 장애자는 노역이 면제되어 만리타향에서 임자 없는 시체로 뒹구는 비운을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당시 이것을 ‘복수복족(福手福足)’이라 일컬었다 하니 노역으로 인한 희생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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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동도의 건설과 운하의 개설 – 이야기 중국사2,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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