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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로마사
로마 공화정의 몰락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로마의 위기는 토지가 부자들에 집중되는 것에 있다."고 보고 민중을 위한 농지법을 제안했다. 원로원은 이에 반발하여 티베리우스를 암살하지만 10년 후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으로 당선되자 형의 정책을 이어받아 평민과 기사층의 지지를 이끌어낸 농사법을 시행하였다. 이어서 가이우스는 이탈리아 동맹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제안을 했지만, 이를 반대한 원로원은 가이우스 일파를 학살했다. 이에 동맹시는 반로마 전쟁을 일으켰고, 그 결과 이탈리아 자유인 모두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이후 집정관 출신인 마리우스와 술라가 번갈아가며 독재 정치를 시행했고, 정무관과 호민관이 권한을 상실함으로써 로마의 공화정은 군주정으로 변해갔다. 이후의 실력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외관상으로는 공화정을 유지했으나, 그 본질은 군주정의 성격을 띠었다.
술라 이후의 혼란한 로마를 바로 세운 폼페이우스는 황제의 선구자로서 일부 도시에선 신으로 추앙되었다. 기원전 60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의 내란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패퇴시킴으로써 새롭게 실권을 장악했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된 후 사치를 제한하고 평민을 위한 많은 업적을 실현했으나 군주 정치를 우려한 원로원 계층에게 살해당했다.
그라쿠스 형제(Gracchi)는 개혁을 통해 몰락한 소토지 소유자 계급을 되살리고자 했다.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는 기원전 133년에 농지법을 제안하였고,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는 10년 후에 그것을 적용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두 형제 모두 원로원 계층 귀족들과의 대립끝에 형은 살해되고, 동생은 자살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이후 로마 공화정은 약 1세기 동안(기원전 133~121년) 야심만만한 장군들의 먹이감이 되었다.
상관들에게 헌신하는 진정한 직업군인을 도입한 평민출신의 마리우스, 그 뒤를 이어 사실상의 군주정치를 확립시켰지만 독재정치를 시행한지 3년 만에 은퇴한 술라, 술라의 업적들을 무너뜨리고 제1차 삼두정치를 구축하여 공동으로 독재 정치를 시행한 카이사르, 크랏수스(Crassus), 폼페이우스 등이 차례로 로마를 지배했다. 이후 삼두정치에서 카이사르가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이 되었고, 수개월 동안 군주의 권력을 장악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기원전 44년에 발생한 그의 암살사건은 로마의 정세를 다시금 내란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내란과 악티움 해전의 과정에서 안토니우스(Antonius)와 클레오파트라(Cleopatra)가 자살하고,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새로운 승리자로서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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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고대 지중해 세계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냈다. 신화가 아닌 역사에 중심을 두고, 고대 지중해 세계의 역사를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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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로마 공화정의 몰락 – 이야기 그리스로마사, 신선희 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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