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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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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5년 |
국적 | 미국 |
요약 달콤하고 검은 설탕물에 불과한 코카콜라를 전 세계인이 즐기는 음료로 만든 로버트 우드러프. 인류는 코카콜라와 함께 미국식 민주주의, 미국식 문화 그리고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달착지근한 몽상의 노예가 되었다.
영화 〈부시맨(The Gods Must Be Crazy)〉(1980)에서 주인공 카이(니카우)는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살고 있는 부시맨 부족[산(San)족]이다. 비행기 조종사가 코카콜라를 시원하게 마신 뒤 밖으로 병을 던져버리지 않았다면 일생 동안 현대 문명과 접촉할 일도 없었을 카이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 병을 줍고는 신들이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부족은 이 신기한 물건이 반죽 밀대부터 악기에 이르는 다양한 쓰임새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여럿인 데 반해 병은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평화롭던 공동체에 분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콜라 병 하나 때문에 시작된 말다툼은 결국 주먹다짐으로 이어진다. 깜짝 놀란 장로들은 회의를 열어 신들이 콜라 병을 보내준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수 같으니 처음 발견한 카이에게 지구 끝까지 가서 버리고 오라고 명령한다.
영화는 문명사회를 처음으로 접하는 카이가 경험하는 다양한 사건과 충돌을 한 편의 코미디로 보여준다. 비록 광고 마케팅 기법인 PPL(Product Placement)이지만 코카콜라가 현대 물질문명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영화에서 쓸모 있는 것으로 묘사된 것은 내용물이 아니라 빈 병이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코카콜라의 비밀
코카콜라는 2011년에도 718억 달러로 브랜드 가치 1위를 차지했는데, 지난 10년 동안 『비즈니스위크(BusinessWeek)』(현재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선정하는 브랜드 가치 순위에서 정상의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오늘날 기업이 생산하는 상품의 브랜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기업의 자산 가치로 자리매김했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브랜드가 상품을 넘어 도시와 국가에까지도 중요한 경쟁력과 가치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기업들이 뒤늦게 브랜드의 가치를 깨닫고 이미지 개선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면 코카콜라는 이미 120년 전부터 자사 브랜드가 대중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1990년대부터 기업들은 치열한 품질 경쟁을 벌였고, 그 결과 생산하는 제품의 기능과 품질이 균일해지면서 기술혁신을 통한 품질 우위만으로는 소비자의 선택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사 제품이 경쟁사 제품보다 대중에 친숙하고 우호적인 이미지로 다가가야만 했다. 다시 말해 모든 상품이 다홍치마일 때 이왕이면 친숙하고 유명한 브랜드, 럭셔리한 고급 브랜드라고 널리 알려지고 인식되는 제품을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기업은 물론 국가까지 나서서 브랜드 전략을 수립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카콜라가 이처럼 일찍 브랜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것은 역으로 코카콜라엔 애초부터 내세울 만한 기술이나 품질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코카콜라로서는 당연히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겠지만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단어가 무엇일까. 'OK'다.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일까. '코카콜라'다. 코카콜라가 진출한 나라는 200여 개국으로, 냉전 이후 지금까지 국제연합(UN)에 가입한 192개 회원국보다 많다. 이처럼 코카콜라는 세계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브랜드지만 또 너무나 많은 비밀과 의혹에 휩싸여 있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이야기해보면, 코카콜라에는 코카인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한 번 맛을 보면 끊을 수 없다거나 코카콜라는 '머천다이즈(Merchandise) 7X'라 불리는 일곱 가지 비밀 재료가 그것들만의 배합법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7X의 비밀에 대해서는 미국 식품의약국(FDA)도 예외를 인정할 만큼 중요한 비법이라서 코카콜라의 회장과 부회장만 알고 있으며, 이들은 코카콜라의 제조법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절대로 같은 비행기에 타지 않는다거나 코카콜라의 맛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으며, 코카콜라의 맛을 변화시키려 한 시도는 코카콜라를 사랑하는 미국 시민들은 물론 전 세계 팬들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다는 등의 일화가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의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인간이 달에 가고 생명체 구성의 신비까지 게놈 연구로 밝혀지는 마당에 코카콜라가 숨기는 재료 배합의 비밀쯤은 웬만한 대학 실험실에서도 밝혀낼 수 있고 실제로 꽤 여러 차례 밝혀지기도 했다. 사실 코카콜라의 비밀은 유명한 식당의 숨겨진 비법이 알고 보니 '아지노모도(일본이 개발한 화학조미료의 대명사)'였더라는 이야기처럼 싱거운 것이지만,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코카콜라를 지탱해준 신화이기도 하다. 코카콜라의 비밀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밀임에도 여전히 유지되는 까닭은 코카콜라가 그 비밀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코카콜라에 비밀이 필요한 까닭
코카콜라는 1886년 5월,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약국과 실험실을 운영하던 존 S. 펨버튼(John Styth Pemberton)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졌다. 당시엔 페루의 코카 잎, 서아프리카의 콜라 열매, 설탕, 카페인, 레몬즙, 바닐라 추출물, 캐러멜, 오렌지, 육두구, 계피, 고수, 레몬 오일 같은 여러 성분을 이리저리 배합해 치료제를 겸한 탄산수를 판매하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사실 말이 좋아 치료제지 이 무렵 미국은 도시의 경계를 조금만 벗어나도 야생의 미개척지가 펼쳐지던 시절인 만큼 실제로는 민간요법 수준에 불과했다.
고대인은 자연 상태에서 탄산을 함유하는 광천수에 신비한 치료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산소를 처음 발견한 영국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가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천연 탄산수를 대신해 인공적으로 탄산수(소다수)를 만드는 비법을 발명한 1767년 이래 탄산수는 미국인이 즐기는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펨버튼은 여러 가지 약재와 향료에 약간의 알코올을 섞은 탄산수를 만들어 특히 두통에 약효가 있다고 해서 '브레인 토닉(Brain Tonic)'이란 이름으로 판매했는데, 이때까지 코카콜라 제조의 비밀 같은 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사용한 약재 가운데 한 가지는 분명히 코카인이었는데, 이때까지 코카인은 모르핀보다 중독성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전혀 비밀이 아니었다. 심지어 아직 젊은 의사에 불과하던 프로이트는 코카인을 기적의 신경성 질환 치료제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절친한 친구에게 코카인을 정기적으로 처방해 중독자로 만들었고, 사랑하는 약혼녀 마르타의 건강과 발그레한 뺨을 위해 보내주기까지 했다. 하긴 헤로인도 처음에는 비습관성 기침약으로 판매됐으며 모르핀 중독 치료제로 인기를 끌었다. 미국의 세인트제임스선교회는 모르핀 중독자를 대상으로 무료로 헤로인 샘플을 공급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어쩌면 그런 시대였기에 오늘날 청소년 비만과 각종 성인병의 원인으로 지탄받는 코카콜라가 치료제로 취급될 수 있었을 것이다.
코카콜라가 등장하고 몇 해 뒤인 1894년 노스캐롤라이나 주 뉴번에서 약사로 일하던 케일럽 브래덤(Caleb Bradham)은 소화불량에 특효가 있다는 음료를 팔기 시작했다. 소화효소의 일종인 펩신(pepsin)이 들어 있던 그 음료는 훗날 '펩시콜라'가 되었다. 미국의 양대 콜라 제조업체가 100년 넘게 치르게 될 마케팅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당시엔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무렵 미국에는 이미 수백 가지 콜라 브랜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콜라 제조는 그리 대단한 비밀이 아니었다. 향료와 약재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탄산수를 제조할 설비만 있다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치료제를 사칭한 탄산음료를 제조해서 팔 수 있었다. 코카콜라가 위대한 점은 약효가 탁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토록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생존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브랜드와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코카콜라는 120년 전부터 브랜드에 투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엔조이! 제품을 판매하지 않는 코카콜라
코카콜라 브랜드를 널리 알리기 위해 펨버튼은 광고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런 말까지 할 정도였다.
"만약 나에게 2만 5,000달러가 있다면 2만 4,000달러는 광고하는 데 쓰고 나머지 1,000달러로 코카콜라를 만들겠다. 내 말대로만 하면 우리 모두 부자가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한 주변 사람 몇몇을 끌어들여 펨버튼케미컬컴퍼니를 만들었고, 이 회사는 당연히 막대한 비용을 광고에 지출했다. 우리 위 세대는 광고(CF)를 일컬어 약 선전이라 불렀는데, 초기 국내 광고 시장을 주도한 제품들이 바로 의약품이었기 때문이다. 의약품과 콜라는 둘 다 제조 단가에 비해 판매가가 무척 높고 광고비용을 감당할 만큼의 높은 마진율을 누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마시는 콜라 한 캔을 뽑기 위해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그 돈은 어떻게 배분될까? 그 돈의 95퍼센트는 광고와 포장비, 회사 이익금이며 재료비가 아니다. 그래서 코카콜라컴퍼니의 임원들은 물론 광고대행사 직원들도 곧잘 이런 말을 한다.
"우리들은 몽상을 판매한다. 사람들은 제품이 아니라 이미지를 마신다."
코카콜라는 미국의 일반적인 기업보다 많은 법정 소송과 공방 끝에 세워진 회사이기도 하다. 펨버튼이 세상을 뜨고 몇 년이 흐른 1891년, 코카콜라 브랜드는 우여곡절 끝에 다른 동업자들과 친분도 없던 아사 캔들러(Asa Candler)에게 단돈 2,300달러에 넘어갔다. 이에 반발한 동업자들도 펨버튼식 콜라를 제조했다. 동업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코카콜라라는 브랜드명을 짓고 지금까지 변치 않는 스펜서체 로고를 확립시킨 프랭크 M. 로빈슨(Frank Mason Robinson)은 캔들러의 편에 섰다. 두 사람은 다른 이들과 치열한 소송을 벌인 끝에 승리했고, 이때부터 코카콜라에는 제조법의 비밀이란 신화가 만들어진다.
캔들러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코카콜라 브랜드 이미지의 기초를 처음으로 닦은 사람이다. 코카콜라를 인수한 뒤 콜라의 무료 시음권을 나눠주는 새로운 마케팅 방법을 동원하는 등 코카콜라의 발전을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가 회사를 인수할 무렵에 콜라는 더는 치료제가 아니라 알코올이 함유되지 않은 소프트드링크에 불과했고, 코카인은 매우 위험한 마약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캔들러는 이때부터 코카콜라에 마약 성분을 없앤 코카 잎을 사용했다. 아직까지 콜라는 병에 담겨 팔리는 음료가 아니라 약국형 잡화점인 드럭스토어(drug store)에서 고객이 요구하면 즉석에서 제조해 잔에 담아 파는 음료였다. 콜라 원액은 여러 가지 재료를 섞은 상태에서 적당한 양의 물에 320배의 설탕을 녹여 걸쭉한 시럽으로 제공되었는데, 특유의 톡 쏘는 탄산 맛이 없다면 콜라는 검고 달콤한 설탕물에 불과했다.
1894년 벤저민 토머스(Benjamin Thomas)와 조지프 화이트헤드(Joseph Whitehead)는 캔들러를 찾아가 자신들에게 코카콜라를 병에 담아 파는 보틀러(bottler) 사업의 계약특허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보틀러는 코카콜라를 포함해 코카콜라가 생산하는 여러 제품을 유통, 생산,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회사를 일컫는 말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코카콜라 브랜드를 더 널리 알리고 더 많은 사람이 코카콜라를 맛보도록 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캔들러가 이들의 열정에 감복한 덕분인지 아니면 보틀링 사업이 얼마 안 가서 망할 거라고 생각한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결국 콜라 원액 1갤런(약 3.785리터)당 1달러에 불과한 금액으로 원액을 제공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문제는 계약의 만료 시한을 정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캔들러는 보틀링으로 팔리는 콜라 제품이 그리 많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드럭스토어에서 팔리는 콜라보다 병 콜라의 매출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뒤늦게 계약을 변경하려 했지만 누구에게나 잘 팔리는 코카콜라를 1갤런당 1달러에 무기한으로 공급받아 자기 지역에서 독점하는 권한을 가진 보틀러들이 계약 내용을 변경할 까닭이 없었다. 이 계약은 지금까지 '캔들러의 실수'라 불리며 코카콜라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한 이후에도 큰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지만, 거꾸로 보틀러 시스템은 코카콜라를 남부 지역을 넘어 미국 어디에서나 널리 알려진 브랜드로 만들었다.
캔들러는 코카콜라 역사에 남을 또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코카콜라가 유사 제품들과 확연히 구분되기 위해서 "어두운 곳에서도 사람들이 코카콜라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는 병이 필요하다" 생각해 디자인 공모전을 연 것이다. 1915년에 열린 디자인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코카콜라 '컨투어 병(Contour Bottle)'은 20세기 가장 뛰어난 디자인으로 평가되는데 이 병의 디자인적 가치만 4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디자이너들은 코카콜라의 원료가 되는 콜라 열매를 본뜨기 위해 백과사전을 뒤졌지만 실물 사진을 구할 수 없자 콜라 열매와 흡사한 코코아 열매를 본떠 디자인했다고 하는데, 당시 유행한 밑이 좁은 주름치마를 닮아서 '허블스커트 병'이라고도 불렸다. 이 병의 특색 있는 디자인으로 시대를 초월해 다른 브랜드와 차별화하는 데 성공한 코카콜라는 상품 포장으론 최초로 1915년 미국 특허청에 등록한 제품이 되었다. 통일된 브랜드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이어 나가기 위해 코카콜라가 얼마나 세심한 곳까지 신경 쓰는지 알기 위해선 멀리 갈 것도 없이 동네 구멍가게에서 코카콜라 캔만 살펴봐도 된다. 코카콜라 클래식의 모든 캔 제품에는 코카콜라 병 모양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각주1)
문제아 로버트 우드러프의 등장
1916년 애틀랜타 시장이 된 캔들러는 경영에서 손을 떼고, 1919년엔 어니스트 우드러프(Ernest Woodruff)에게 2,500만 달러를 받고 회사를 팔았다. 어니스트는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장남 로버트 우드러프는 훗날 가장 오래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코카콜라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어렸을 때 로버트는 모든 면에서 부모의 기대와 정반대로 행동하는 소년이었다. 청교도적인 엄격한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을 극복해야 한다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학업에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어서 고등학교를 낙제했는데, 부친은 그를 남자답게 기른다며 근방에 있던 조지아군사학교에 진학시켰다. 1908년 군사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과거 코카콜라 사장이던 캔들러 가문과 깊은 인연이 있는 조지아 주 에모리 대학에 진학했지만 거기서도 적응하지 못했다. 이듬해 대학 총장은 부친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아드님에게 이번 학기에 다시 학교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을 듯하군요. …… 아드님은 이곳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자주 결석을 해서 모범적인 학생이 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불과 19세의 나이에 대학을 중퇴한 자식에게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던 부친은 그가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었다. 육체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로버트는 현실에서 더 많은 것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특출한 재능을 발견했다.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중 화이트자동차의 남동부 지역 영업사원이 되어 탁월한 실적을 올렸고, 곧 회사의 영업 매니저가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군복무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군수사령부에 근무하는 동안 그는 화이트자동차의 트럭이 군납 제품이 될 수 있도록 애썼는데, 이때의 경험은 훗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 전쟁이 끝나고 회사로 돌아온 그의 연봉은 이미 7만 5,000달러에 달했고 더 나은 조건으로 그를 채용하겠다는 다른 회사와 협상까지 하게 되었다.
이 무렵 코카콜라는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설탕의 국제가격이 폭등해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보틀러들은 전쟁이 끝나면 다시 1달러로 가격을 하락시키기로 약속한 뒤에야 비로소 콜라 원액 1갤런당 1달러 75센트의 인상을 허용할 만큼 캔들러와 맺은 계약을 고수하려 들었다.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던 부친은 아들이 코카콜라 경영에 참가해 가업을 이어가길 바랐다. 코카콜라의 고향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로버트는 코카콜라가 어떤 제품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 일을 잘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동안 자신이 판매해온 것은 그게 무엇이든 사람들에게 효용을 지닌 물건이었지만, 그저 단순한 설탕물에 불과한 코카콜라는 실제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33세가 된 1923년 그는 고심 끝에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실제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설에는 그가 사장에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동안 코카콜라컴퍼니에서 일한 영업 담당자들을 일시에 해고해버린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만 하루가 지나자 영업 직원들을 모두 재고용했다. 하루 동안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로버트는 그 일로 단 하루 만에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의 모든 조직을 장악할 수 있었다. 사실 유무를 떠나 이 일화는 로버트 우드러프의 과감하며 다소 괴팍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인재를 선발할 때 자신의 마음에만 든다면 학력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중에는 로버트에게 세금을 독촉하러 왔다가 채용된 세무서 직원, 그를 괴롭힌 경쟁사 직원, 멀리 쿠바에서 망명한 젊은 청년 로베르토 고이주에타(Roberto Goizueta)도 있었다. 고이주에타는 로버트의 뒤를 이어 코카콜라컴퍼니의 CEO가 되었다.
애국심과 기업 이익 사이에서
코카콜라는 미국에서 여전히 잘 팔렸지만 매출 증가세가 점차 둔화되어갔고, 캔들러의 실수 때문에 미국 내 보틀링 사업은 회사의 실질적인 이득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코카콜라 본사와 미국 내 보틀러들 사이에 몇 차례 법정 공방까지 있었지만 계약 내용을 크게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때마침 펩시콜라가 빠른 속도로 시장점유율을 높이며 코카콜라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로버트 우드러프는 코카콜라의 세계화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스포츠 마케팅이었다. 코카콜라는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올림픽과 1930년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부터 후원을 시작해 지금까지 거의 매번 올림픽과 월드컵의 공식 후원사가 되었다. 그 덕분에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을 심각하게 앓던 독일에 코카콜라의 해외지사를 설립할 수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코카콜라의 해외매출 1위는 독일이었다. 로버트 우드러프는 독일의 정치계 인사에까지 줄을 대고 있었는데, 물론 그들이 나치당원이라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화이트자동차와 군수사령부에서 일하면서 고위층과의 인맥을 만드는 것이 기업 경영에 얼마나 큰 이득이 되는지 잘 알게 된 우드러프는 자신의 유명한 별장으로 유력 정치인을 비롯한 고위 인사를 초대해 그들과 함께 사냥과 파티를 즐기며 돈독한 인연을 맺었고, 이들을 코카콜라의 고문이나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공식적으로 후원했다. 코카콜라는 주로 남부에 지지 기반을 둔 민주당의 대선 후보들을 전통적으로 지원해왔지만 공화당 후보였던 전쟁 영웅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장군은 개인적으로 코카콜라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공화당 후보라는 사실과 관계없이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백악관의 공식 콜라는 당연히 코카콜라였다.
코카콜라의 지원을 받았던 민주당의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로버트 우드러프에게 영국 대사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다. 케네디와 대결한 닉슨(Richard Nixon)은 우드러프의 별장에서 그의 눈 밖에 나는 짓을 몇 차례나 했기 때문에 결국 코카콜라의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그 대신 펩시콜라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백악관의 공식 콜라는 펩시로 바뀌었다. 흐루쇼프(흐루시초프, Nikita Khrushchyov)와 만난 닉슨이 펩시의 모스크바 진출을 지원해서 펩시는 경쟁 업체 코카콜라를 누르고 소련에 먼저 진출할 수 있었다. 조지아 주 출신의 지미 카터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코카콜라는 자사의 홍보전문가와 전세기를 내주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카터 재임 중 백악관은 코카콜라가 장악했다. 카터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된 레이건은 다시 펩시콜라로 바꿨고,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에 펩시콜라는 드디어 군납 음료가 될 수 있었다. 그 전까지 군에 납품되는 콜라는 오로지 코카콜라뿐이었다.
마이클 베이가 감독한 영화 〈진주만(Pearl Harbor)〉(2001)에서도 코카콜라는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한다.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혼란에 빠진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헌혈할 피를 담기 위해 급하게 조달한 것이 바로 코카콜라 병이었다. 코카콜라 병이 등장한 까닭은 물론 PPL 때문이었겠지만 콜라 병에 수혈할 피를 담았던 것은 실화였다. 로버트 우드러프와 코카콜라컴퍼니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 전쟁은 모든 기업에 중요한 기회이자 위기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로버트는 군수사령부에서 근무한 경험을 통해 조만간 미국도 참전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설탕을 비롯한 여러 물자가 전쟁 물자로 사용되기 위해 배급제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로버트는 진주만 기습이 일어나기 전부터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코카콜라는 주요 임원 가운데 몇 사람을 전시 경제 관리를 맡은 정부 위원회인 산업위원회에 들여보냈다. 또 로비 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에드 포리오(Ed Forio)를 설탕 배급제를 관장하는 전시생산위원회(War Production Board)에 진출시켰다. 로버트는 참전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 코카콜라가 얼마나 소중한 음료인지 광고하기 시작했고, 병사들이 자주 모이거나 들락거리는 장소라면 어디에서나 코카콜라를 맛볼 수 있도록 했다.
코카콜라로 군대의 사기를 드높이려면, 우선 군인들에게 코크를 마시는 습관을 들여야 했다. 이를 위해 코카콜라는 1930년대 공장에서 썼던 방법을 사용하여, 군대 내에 자동판매기를 설치하고 '갈증해소 휴식시간'이 건강에 얼마나 좋은지를 홍보했다. 군 병원, 적십자 센터, 국가보안군 병영, 재향 군인회, 군인들이 오가는 역, 점점 늘어나는 군 기지에서 코카콜라는 술의 대용품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로써 코카콜라는 설탕 배급제에 상관하지 않고 원액을 마음껏 생산해 훈련장이나 기지를 비롯해 군인들의 생활 장소에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군대는 코카콜라의 새로운 시장인 셈이었다.
전쟁 기간에 1,600만 명의 미국인이 군복을 입었고 전쟁 말기에도 1,100만 명이나 되는 젊은이가 군대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비해 네 배나 많은 수치였는데, 미국인 11명 가운데 평균 1명꼴로 군복을 입은 셈이었다. 전쟁이 벌어지자 로버트는 자발적으로 코카콜라 공장 창고에 비축해둔 2만 3,000포대의 설탕을 군에 팔았다. 그리고 모든 언론을 불러놓고 코카콜라가 얼마나 애국적인 기업인지 선언했다.
"우리는 제복을 입은 모든 사람들이 그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 회사의 비용이 얼마가 들든지 간에 코카콜라 한 병을 5센트에 살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미군 PX와 코카콜로니제이션
로버트 우드러프는 실제로 전쟁 내내 이 약속을 지켰다. 병사들에게 코카콜라를 공급하기 위해 이동 제조 설비를 만들었고, 공장마다 군대에서 월급을 받는 군무원 자격의 직원 두 명이 기술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장교 대접을 받으며 시간당 1,370병의 콜라를 생산했다. 기지에 주둔하는 동안 PX에서 콜라를 구입한 병사들은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찾아온 잠깐의 휴식 시간에 코카콜라를 마시며 고향을 떠올렸고, 점령지 주민들에게 초콜릿, 추잉 껌과 함께 우정을 표현하는 물건으로 가장 미국적인 선물인 코카콜라를 선사했다. 아이슬란드, 북아프리카, 영국, 프랑스, 남태평양, 일본 등 세계 곳곳에 74개의 코카콜라 이동 제조 공장이 세워졌고, 전쟁이 끝나자 이 공장들은 모두 코카콜라의 해외 공장이 되었다.
다만, 미군 병사들이 몰랐던 사실 한 가지는 자신들이 코카콜라를 마시며 고향을 생각하는 동안 전선 너머 독일의 코카콜라 해외지사에서 독일 병사들을 위해 환타를 생산했다는 것이다. 로버트 우드러프는 전쟁이 일어나면 독일의 코카콜라 지사에 콜라 원액을 공급하지 못하게 될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 기간에 독일에서 코카콜라의 지위를 잃을 것을 염려해 본사에서 기술자들을 파견해 콜라를 대체할 만한 음료를 개발할 수 있게 지원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 환타다. 이 음료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꾸준히 생산되었고, 독일은 물론 독일이 점령한 유럽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군과 함께 코카콜라가 왔었던 것처럼 독일군과 함께 환타가 왔었다는 사실을 적당히 잊을 무렵, 환타는 코카콜라컴퍼니의 정식 음료 브랜드가 되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기독교가 세계 종교가 되는 과정에서 열두 제자보다 더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사도 바오로였다. 그가 이처럼 놀라운 역할을 한 데에는 물론 영적인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지만 그 역할이 가능하도록 만든 현실적인 힘은 그가 지닌 로마시민권에서 나왔다. 로마 치하의 평화, 즉 팍스 로마나는 로마 군대의 창칼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그들이 정복한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 건설된 대형 공중목욕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늘날 팍스 아메리카나의 근원은 미국이 냉전 이후에도 전 세계에 걸쳐 꾸준히 확장하는 미군 기지와 PX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에 올랐고, 미군이 지나간 곳 어디에서나 아메리칸드림이 싹텄다. 풍요가 넘치는 미국식 사회 모델은 세계를 강타했고 유럽에서도 문화적 자긍심이 드높은 프랑스조차 이런 현상을 문화적 충격이란 의미에서 '미국 쇼크각주2) '라 불렀다.
실제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작가 황석영이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 『무기의 그늘』에서 그는 미군 PX를 "큰 함석 창고 안에 벌어진 디즈니랜드", "CBV 폭탄 한 개로 길이 1마일, 너비 4분의 1마일에 걸쳐서 100만 개 이상의 쇠 파편을 뿌릴 수 있고, 300에이커를 단 4분 동안에 동물과 식물이 살지 못할 고엽(枯葉) 지대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진 나라의 국민들이 사용하는 일상용품을 파는 곳", "아메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위대한 나라입니다, 라는 표어가 적힌 방패를 들고 로마식 단검을 들고서, 성조기의 옷을 입고 낯선 고장마다 나타나는 엉클 샘의 지붕 밑 방", "원주민을 우스꽝스러운 어릿광대로 바꾸고 환장하게 만들고 취하게 하며 모조리 내놓게 하고, 갈보와 목사와 무기밀매업자가 사이좋게 드나들던 기병대 요새의 잡화점"이라 말한다.
바나나와 한 줌의 쌀만 있으면 오손도손 살아가는 아시아의 더러운 슬로프 헤드들에게 문명을 가르친다. 우윳빛 비누로 세수하는 법과,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코카콜라의 맛이며, 향수와 무지개 색 과자와 드로프스와 레이스 달린 잠옷과 고급 시계와 보석반지를 포탄으로 곤죽이 되어버린 바라크 위에 쏟아낸다. 아시아인의 냄새나는 식탁 위에 치즈가 올라가고 소녀들의 가랑이 속에서 빠져나간 콘돔이 아이들의 여린 손가락 위에서 춤춘다. 한 번이라도 그 맛과 냄새와 감촉에 도취된 자는 결코 죽어서라도 잊을 수가 없다. 상품은 곧바로 생산자의 충복을 재생산해낸다. 아메리카의 재화에 손댄 자는 유 에스 밀리터리의 낙인을 뇌리에 찍는다. 캔디와 초콜리트를 주워 먹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라나는 아이들은 저들의 온정과 낙천주의를 신뢰한다. 시장의 왕성한 구매력과 흥청거리는 도시 경기와 골목에서의 열광과 도취는 전쟁의 열도에 비례한다. PX는 나무로 만든 말(馬)이다. 또한 아메리카의 가장 강력한 신형 무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5년 뒤 한국전쟁이 벌어지기 한 달쯤 전인 1950년 5월 15일자 『타임』 표지는 목마른 지구가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게 한쪽 팔로 지구를 부축하는 코카콜라의 원형 마크가 장식했다. 표지 제목은 '세계와 친구'였고, '미국식 생활 방식을 즐겨라'라는 카피가 실려 있었다. 코카콜라가 더 이상 단순한 음료수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며 지구는 코카콜라의 거대한 시장이고 코카콜라는 그 시장의 주인이란 의미였다. 미국식 민주주의와 미국식 시장경제, 미국식 생활 방식과 문화예술이 세계로 퍼져나갔고, 코카콜라는 미국식 삶을 상징하는 가장 극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코카콜라에 의한 세계화 혹은 코카콜라로 상징되는 미국식 생활 방식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의 식민지화란 의미에서 '코카콜로니제이션(Cocacolonization)'이라 부른다.
코카콜라를 향한 수많은 도전
마케팅 분야에서 뉴 코크(New Coke)의 실패는 유명한 이야깃거리다. 펩시콜라가 '펩시 챌린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눈을 가린 채 맛 좋은 콜라를 선택하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자 고이주에타가 회장으로 있던 코카콜라는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위기타개책으로 회심의 역작 뉴 코크를 1985년에 출시했지만 최악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게 마케팅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편이다. 최악의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뉴 코크의 출시는 단지 펩시의 추적이 두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미국 시장에서 펩시의 가파른 추적에 코카콜라 측이 당황은 했겠지만 전 세계 매출 규모를 보면 펩시는 도저히 코카콜라를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코카콜라의 우위는 그만큼 절대적이었으며,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코카콜라는 예전에도 향료 배합을 바꾼 적이 있지만 구태여 코카콜라란 브랜드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고이주에타 회장과 로버트 우드러프가 전통적인 향료 제조법의 코카콜라를 생산 중단시키고 뉴 코크를 출시하겠다는 다소 무리한 결정을 내린 까닭은 다른 데 있었다고 추측하는데, 미국 내 보틀러들과의 계약을 원천무효로 만들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구태여 코카콜라의 생산을 중단시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뉴 코크 출시 이후,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리지널 코카콜라의 생산 중단 이후 78일 동안 40만 통이 넘는 전화와 항의 편지에 시달리던 코카콜라는 결국 오리지널 코카콜라를 코카콜라 클래식이란 이름으로 재생산하기로 결정한다. 코카콜라는 다시 한 번 승리했다.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코카콜라의 아성에 도전한 콜라가 펩시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전 세계 민족주의자들은 물론 진보적인 정치 지향을 가진 이들도 코카콜로니제이션에 저항하는 표시로 세계 전역에서 배달 차량을 공격하고 코카콜라를 길거리에 내던졌다. 한국에서 벌어진 가장 극적인 도전은 1978년부터 코카콜라의 한국 보틀링 업체 가운데 하나였던 범양식품이 독립해 '콜라독립 8.15'란 브랜드의 콜라를 생산한 것이다. 한국의 코카콜라 보틀링 업체에는 범양식품 외에 두산음료, 우성식품, 호남식품 등이 있었는데, IMF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직전이던 1996년 코카콜라는 이들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하고 이들 회사를 인수해 한국코카콜라보틀링을 세웠다.
캔들러의 계약은 미국 국내만의 경우였고, 로버트 우드러프는 해외지사와 계약할 때 반드시 계약기간을 명시하도록 했다. 범양식품은 코카콜라의 인수 제안을 거절하고 독자적으로 815콜라를 생산했다. 때마침 외환위기가 터지자 애국주의 열풍이 불면서 815콜라는 1999년 한때 시장점유율이 14퍼센트대까지 상승했다. 그러나 애국심에 바탕을 둔 콜라독립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고, 일찌감치 세계화에 나선 다국적 기업을 상대로 지역의 작은 기업이 선전하는 것도 오래갈 수 없었다. 2003년 815콜라는 마침내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코카콜라의 가장 무서운 도전자이자 적은 사실 코카콜라 자신이다. 사람들은 이제 코카콜라의 제조 비법보다 코카콜라가 인체에 미치는 나쁜 영향, 특히 청소년에 끼치는 해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기업으로서의 코카콜라가 2004년부터 펩시콜라에 뒤지게 된 까닭도 탄산음료만 고집하는 등 사업 다각화 측면에서 펩시에 뒤처진 결과였다. 펩시콜라는 일찍부터 웰빙 열풍을 감지하고 비(非)탄산 음료 시장에 주목해 새로운 상품을 개발했다. 또 코카콜라의 가장 강력한 적은 뜻밖의 장소에서 출현하기도 했다. 바로 월마트가 PL 상품으로 출시한 '샘스콜라'였다. 샘스콜라는 코카 대 펩시의 백년전쟁을 비웃기라도 하듯 매출을 점차 늘려가는 중이다. 한국에서 월마트를 밀어낸 이마트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코카콜라와 경쟁해서 만만치 않은 매출 실적을 올리고 있다. 그 결과 코카콜라가 한국의 보틀링 업체들을 인수해 세운 한국코카콜라보틀링 역시 2007년 LG생활건강에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산타클로스의 탄생과 키즈 마케팅
마케팅 전문가들은 로버트 우드러프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내린 결정을 기업 경영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하지만 그보다 앞선 제1차 세계대전 때 이미 똑같은 경우가 있었다. 담배 또는 궐련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국가에 의해 무상으로 지급되는 품목이었다. 당시 미국의 퍼싱(John J. Pershing) 장군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필수 품목으로 총알만큼 많은 담배를 요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담배를 전시 필수 작물로 지정해 국가 차원에서 흡연을 지원했다. 전쟁에서 담배는 수많은 청년을 상습 흡연자로 만들어 평균 수명을 7년이나 단축시켰고, 코카콜라는 병사들의 몸에 성인병을 안겨주었다. 하기야 전쟁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사들에게 흡연과 탄산음료가 건강에 해롭다고 말해주기는 어려웠으리라.
담배와 탄산음료의 또 다른 공통점은 청소년들이 새로운 소비자이며 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는 것이다. 로버트 우드러프는 광고 담당자들에게 코카콜라가 뭔가 긍정적인 에너지를 제공하며 코카콜라를 통해 이상적인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라고 다그쳤다. 코카콜라는 단순한 탄산음료가 아니라 꿈과 환상의 아이디어를 파는 드림 웨어(dream ware)여야 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가장 미국적이며 세계적인 이미지인 산타클로스였다. 1931년 코카콜라가 붉은색 복장을 한 뚱뚱한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전까지 산타클로스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의 상징 인물이 아니었다. 산타클로스의 기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3세기경 소아시아에서 출생한 니콜라스 성인(St. Nicholas)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현재의 터키 지역에서 주교로 활동한 그는 특히 어린이들을 사랑해 어린이들 모르게 선물을 주었다고 하는데,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이를 기리기 위해 성 니콜라스의 축일인 12월 5일에 즈음해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풍습이 있었다.
상업용 일러스트 전문 화가였던 해든 선드블롬(Haddon Sundblom)이 코카콜라를 위한 산타클로스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아 탄생시킨 것이 오늘날 성탄절의 대명사가 된 산타클로스였다. 코카콜라에 의해 재탄생한 산타클로스는 코카콜라 레드(Coca-Cola Red) 빛깔인 붉은색 외투에 흰색 털을 단 옷을 입었고, 종교적인 인상 대신 풍성한 흰 수염에 얼굴 가득 홍조를 띤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탈바꿈되었다. 선드블롬이 탄생시킨 산타는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준 뒤 휴식을 위해 코카콜라를 마셨고, 착한 어린이들은 산타가 선물을 넣어주는 양말 속에 감사한 마음으로 코카콜라를 담아두었다. 전통적으로 탄산음료의 비수기인 겨울철 매출 증진을 위해 구상된 코카콜라의 판촉 전략은 전 세계의 성탄절 문화와 풍경을 변화시켰다. 어린이들은 이따금씩 뚱뚱한 산타가 어떻게 굴뚝을 타고 내려와 자신들에게 선물을 줄 수 있는지 궁금하게 여긴다. 뚱뚱한 산타가 굴뚝을 통과하는 비법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가 왜 그렇게 뚱뚱해졌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코카콜라를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어느 때보다 높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식생활 역시 풍족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청소년들은 심각한 영양불균형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그 주범으로 지목되는 것이 이른바 '쓰레기 음식(junk food)'이라는 패스트푸드와 탄산음료다. 특히 콜라는 단맛을 강화하기 위해 인산염과 구연산류를 많이 포함하는데, 이것은 체내의 칼슘을 배출시키는 역할을 한다. 탄산음료로 인해 골다공증, 충치, 신장결석, 당뇨, 성조숙증 등이 유발되며 과도한 당분 섭취로 인한 비만은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미국인 건강의 파수꾼 역할을 하는 미국공익과학센터(CSPI)는 청량음료를 액체 사탕(liquid candy)이라고 호칭한다. 그들의 묘사에 의하면, 액체 사탕은 자체로도 나쁘지만 우유와 같은 영양 음료의 음용 기회를 박탈하는 점이 더 문제다. 이 단체는 그동안 청량음료의 포장 용량이 계속 커져왔던 사실을 심각하게 지적한다. 그들은 청량음료가 미국 사회에 비만을 불러온 주범이며, 골다공증·충치·심장병·신장결석·알레르기·각종 정신질환의 원흉이라고 주장한다. 또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연구의 권위자인 벤 페인골드(Ben Feingold) 박사는 저서에서 청량음료 생산량 증가와 청소년 비행 증가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그래프로 예시함으로써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미국 청소년은 다른 선진국 청소년에 비해 어렸을 때부터 좀 더 쉽게 탄산음료를 접한다. 탄산음료 등 패스트푸드를 제한하는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미국에서는 코카콜라나 펩시 같은 대형 음료수 회사들이 교내 자판기 마케팅을 통해 청소년을 적극적인 공략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학교에서 자사 상품을 홍보할 수 있는 독점권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데, 미 의회 회계감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음료수 독점권 계약이 모든 교내 마케팅 가운데 가장 많은 이윤을 올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들이 마시는 음료수의 양에 비례해 학교가 수수료를 받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학교가 자동판매기를 이용해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조건이 계약서에 아예 노골적으로 명시되기도 한다. 학생들이 1년 동안 마셔야 하는 음료수의 양을 계약서에 처음부터 밝혀놓는 것이다. 콜로라도스프링스의 한 학교 교장은 몇 년 전 학생들이 콜라를 충분히 마시지 않는다는 내용의 메모를 썼다가 이 메모가 외부로 유출되는 바람에 악명을 얻었다. 당시 이 지역의 학교들이 5,000달러에서 2만 5,000달러의 수수료를 거둬들이려면, 학생들이 매년 음료수 7만 상자를 소비해야 했다.
더한 경우도 있었다. 코카콜라의 본고장이랄 수 있는 조지아 주 에반스의 그린브리어(Greenbriar) 고등학교는 코카콜라의 날을 정해 이날 전교생이 코카콜라에서 나눠준 티셔츠를 입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마이크 캐머런(Mike Cameron)이라는 열아홉 살의 졸업반 학생은 펩시 로고가 있는 티셔츠를 입고 학교에 나타났다가 즉각 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한국에서도 발생했다. 2005년 고려대에서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했다가 학생들의 반발로 작지 않은 소동을 치렀다. 이때의 시위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은 일곱 명의 고려대 학생이 교수를 억류했다는 명분으로 출교 처분을 당했다. 출교는 퇴학과 달리 입학기록 자체를 말소하기 때문에 학생으로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처분이다.
1985년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 로버트 우드러프는 1909년에 자신을 내쫓은 에모리 대학에 모두 2억 달러를 기부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고등교육기관에 기부된 최고액이었다. 어쩌면 자신을 내쫓은 대학에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복수였을지 모른다. 과거의 학생에게 엄청난 기부를 받은 이 대학은 1983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지만, 로버트 우드러프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었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의 이름을 붙인 도서관이 있을 뿐이다.
그의 사후 코카콜라는 결국 펩시에 따라잡혔고, 새로운 유통 브랜드의 값싼 콜라는 음료 시장의 맹주를 넘보고 있다. 코카콜라는 기업 내 인종차별 문제로 소송을 당했으며 그가 생전에 공을 들인 남미 지역의 코카콜라는 노조 지도자들을 암살하는 방식으로 노조를 탄압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는 중이다. 코카콜라는 영원히 브랜드 가치 1위 기업으로 남을 수 있을까? 아니, 코카콜라로 대표되는 미국식 일상, 미국식 소비자본주의는 지속될 수 있을까?
내 혈관 속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입니다. - 로버트 우드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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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마이크 해스킨스, 『마약: 사용설명서 4』, 뿌리와이파리, 2005,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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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워드 민즈, 『머니&파워: 지난 천년을 지배한 비즈니스의 역사』, 경영정신, 2002, 224~225쪽
- ・ 윌리엄 레이몽, 『코카콜라 게이트』, 랜덤하우스, 2007, 226쪽
- ・ 황석영, 『무기의 그늘』, 형성사, 1989, 63~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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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수,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 국일미디어, 2005, 112쪽
- ・ 수전 린, 『TV, 광고, 아이들』, 들녘, 2006, 142쪽
- ・ 나오미 클라인, 『NO LOGO』, 중앙M&B, 2002,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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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로버트 우드러프 –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전성원,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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