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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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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7년 |
국적 | 미국 |
요약 대중적인 자동차를 만들고자 했던 헨리 포드의 소박한 꿈은 포드주의라는 생산 시스템의 혁신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공장제 노동에 종속된 인간과 시간이라는 새로운 일상의 풍경을 창조했다.
만년의 헨리 포드와 한 소년 사이에 학교교육에 대한 작은 설전이 벌어졌다. 존 다링거라는 이름의 소년은 이 노인이 학교교육에 대해 상당히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이젠 세상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현대'란 말이에요."
아이의 말을 포드가 잡아챘다.
"얘야, 그 '현대'를 발명한 게 나란다."
누구나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는 책이 '고전(古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의 〈모던타임스(Modern Times)〉(1936)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modern)란 시간 개념이 탄생함으로써 변화된 일상생활의 양식, 이를 통해 일어났던 사회와 인간 정신의 변화를 냉철한 풍자와 따스한 유머로 그려낸 영화의 고전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시계를 화면 가득 비추면서 시작된다. 시침과 분침이 가리키는 시간은 대략 오전 5시 57분으로, 보통 샐러리맨의 출근 시간이다. 6시 정각, 마치 자명종이 울린 것처럼 화면 가득 빼곡하게 늘어선 양떼가 걸어오는 모습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그 순간 스크린 맞은편에 있는 객석은 곧 양떼가 들어설 거대한 우리가 된다. 곧바로 전환된 화면엔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보인다. 채플린은 〈모던타임스〉를 통해 영화 문법 속에서 미장센(mise en scène)이 지닌 의미와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특히 영화 곳곳에서 출퇴근자동기록기와 컨베이어 벨트 그리고 시계 톱니바퀴가 연상될 만큼 정교하게 묘사되는 기계장치의 동작을 보노라면 촘촘하게 배열되고 구분되는 '현대'라는 시간의 정교한 통제 장치와 물질문명의 일상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산업혁명 이전에도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다. 다만 당시에는 자신의 집에서나 집 가까이에 있는 농토 혹은 작업장에서 일했고, 노동시간은 자연의 주기에 맞춰 유동적으로 변화되었다. 자연적인 시간에 최초로 통제와 규율을 선사한 것은 교회였다. 교회는 삼종(三鐘) 기도를 통해 아침과 점심, 저녁을 알렸다. 사람들은 세 번의 종소리에 따라 농토로 나가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노동자는 자신의 신체 상황이나 조건, 당일의 업무량에 따라 스스로 노동 강도를 조절함으로써 노동하는 삶을 통제할 수 있었다. 산업화 시대 이전의 노동자는 대개 자신이 태어난 지리적 공간을 평생 떠나지 못했지만 최소한 스스로의 노동과 시간으로부터 소외되진 않았다. 그러나 산업혁명은 인간과 시간 그리고 공간 사이에 맺는 관계를 변화시켰고 결국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괴물처럼 연기를 내뿜는 쇳덩이를 보고 도망치는 사람들 모습이 어지러운 속도로 달리는 차창을 통해 눈앞에 펼쳐지고 있소. 나를 실은 기차는 소리유를 향하고 있소. 그곳에서 부치게 될 이 편지는 닷새 후면 당신에게 도착할 거요. 우리가 알게 된 건 고작 4년밖에 되지 않소. 하지만 지난 3월 당신의 손에 입을 맞출 수 있게 된 이래, 내 가슴은 성급함으로 요동치고 있다오. 언젠가 우리의 약혼을 기념하게 될 날을 기대해도 좋다고 대답해주오(내가 일주일 내에 도착하게 될─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마드리드에서 그 대답을 해주시오). 지금이 7월이오. 그러니 깊이 생각해보시오. 그리고 내년 초까지 대답해주시오. 기한이 촉박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그리고 엘리자베스, 당신을 몰아붙이고 싶지 않소. 하지만 이제 우린 속도의 시대로 들어섰고 나 역시 이 시대 사람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오.
장 자크 상뻬의 그림책 『거창한 꿈』은 18세기 산업혁명이 가져온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근대 이전의 시간대로 살아가던 사람들 앞에 등장한 증기기관의 속도는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시간의 변화를 초래했다. 수천 년간 아시아를 지배한 중화체제의 근간이 책력(冊曆)에 있고 서구 기독교의 지배가 그레고리우스력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어느 시대든 권력은 시간을 장악함으로써 그 막강한 힘을 확인하고 강화해왔다. 그러나 역사상 시간에 대한 가장 극적인 변화는 자동차, 특히 헨리 포드가 '대중적인 자동차'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채택한 생산 양식, 즉 포드주의(Fordism) 체제와 함께 왔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간, 현대를 발명한 사람이 바로 헨리 포드다.각주1)
새로운 생산 시스템을 예고한 만남
헨리는 1863년 7월 30일,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근방의 작은 마을 디어본에서 윌리엄 포드(William Ford)와 메리 포드(Mary Litgot Ford) 부부의 육 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미국 역사상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1월 1일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은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했다. 이 전쟁의 표면적 원인은 잘 알려진 대로 남부 인구의 5퍼센트에 불과한 백인 농장주들이 400만이 넘는 흑인들을 노예로 소유한 비인간적인 상황이지만, 그 내막은 남과 북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차이 때문이다.
윌리엄은 아일랜드 출신 이주민으로,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 약속의 땅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왔다. 1846년부터 10년간 180만 명에 이르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고국을 떠나 신대륙 이민을 감행했다.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는 가난한 농업 국가로, 대규모로 농사짓는 감자가 주된 수입원이자 곡물 자원이었다. 그런데 1845년 갑자기 들이닥친 감자마름병으로 흉작이 몇 년 동안 계속되면서 엄청난 기근 사태가 벌어졌다. 영국 정부가 기근 구제에 소홀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기아에 시달렸고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건너갔다. 신대륙이 이민자들 누구에게나 성공을 가져다주진 않았지만 윌리엄은 갖은 고생 끝에 농장주의 꿈을 이루었다. 훗날 헨리가 자동차 산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자 세간에서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다고 평가했지만 실제로 헨리의 아버지 윌리엄은 헨리가 태어날 무렵에 이미 디어본 일대에서 알아주는 자산가로 수백 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열두 살 되던 해에 헨리 포드는 평생을 두고 영향받게 될 사건 두 가지를 거의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다름 아닌 '시계' 그리고 '자동차'와의 만남이었다. 첫 번째 만남은 아버지가 그에게 조그만 회중시계를 선물하면서 이루어졌고, 두 번째 만남은 디어본에서 1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읍내에 나갔다가 이루어진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바로 어제 본 것처럼 그 자동차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말이 끌지 않는 차를 생전 처음 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차는 주로 탈곡기와 제재용 톱을 운반하는 용도로 쓰였다. 자동차라고 해봐야 바퀴 위에 간단한 엔진과 보일러를 얹고 뒤에 물탱크와 석탄 수레를 매단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나는 말이 기계 여러 대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본 적은 있어도 이런 자동차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차같이 생긴 차체 위에 보일러를 얹고 뒷바퀴와 엔진 사이를 사슬로 연결해놓은 색다른 모습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다 난생 처음 증기자동차를 본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마차에서 뛰어내려 자동차로 달려갔다. 운전사는 자동차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얼굴로 자동차의 이모저모를 설명해주었고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이 경험 덕분에 헨리는 평생을 두고 '말 없는 마차'를 만드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호기심이 왕성한 그는 증기의 힘을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서 주전자를 밀봉해 난로에 올려보는 등 각종 실험에 몰두했는데, 무엇보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아버지가 선물한 시계였다.
산업혁명 초창기만 하더라도 시계는 아무나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시계를 소유한다는 것은 자신이 시간을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특히 공장제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작업장에 시계를 함부로 반입할 수도 없었다. 자연적인 시간의 순환에 의존해 노동하던 농부들은 산업혁명으로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의 프롤레타리아 노동자가 되었다. 공장제 노동은 예측 가능하고 표준적인 작업 일정에 따라 새롭게 조절되어야 했으므로 노동자들은 주어진 시간대로 노동할 뿐 시간에 대해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작업장 한가운데에는 관리자만 조작할 수 있는 커다란 벽시계가 걸려 있었는데, 노동자 대부분은 시계를 볼 줄 몰랐고 설령 볼 줄 안다고 할지라도 시간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오늘날 시계 차기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이 타의에 예속되지 않으며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무의식적 상징이 되었지만, 당시엔 시계를 소유하는 것이 오히려 고용주에게 시간을 지배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소유할 수 있으며 최소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임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헨리는 아버지의 시계부터 시작해 디어본 마을의 온갖 시계를 가져다 분해하고 조립하는 데 빠져들었다. 그는 회중시계 안을 가득 채운 작은 톱니바퀴와 태엽장치가 조금의 틈도 없이 효율적으로 배치된 공간에서 규칙적으로 작동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의 나이 열두 살 때 일어난 시계와 자동차와의 만남은 시간과 공간의 효율적인 결합체인 포드주의 생산 시스템을 탄생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기계 견습공이 되기 위해 가출하다
농장 일이나 학교 공부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데다가 온갖 잡동사니를 늘어놓고 멀쩡한 시계를 분해하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 아버지 윌리엄과 달리 어머니 메리는 점점 외골수로 빠져드는 아들을 감싸고 격려해주었다. 사실 포드 부부는 1861년 첫아이를 낳았지만 이듬해 사망했기 때문에 이들이 장남 헨리 포드에게 쏟는 애정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특히 메리가 끼친 영향은 지대했는데, 그녀는 기계에 대한 재능이 있는 아들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쳤고 아들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었다. 헨리 역시 그런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1876년 3월, 어머니가 37세의 나이로 여덟 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나자 엄청난 슬픔에 빠졌다. 어머니의 죽음을 아버지의 책임이라 생각했던 헨리는 평생 아버지에게 애증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을 품었다. 훗날 그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집안 분위기가 마치 태엽 풀린 시계처럼 변해버렸다고 회고했다.각주2) 그는 결국 열다섯 살 때 고향을 떠나 디트로이트로 가출해버린다.
학교를 중퇴한 헨리는 디트로이트에서 3년간 견습 기계공으로 일했다. 일당 1달러 10센트를 받기로 하고 처음 취직한 곳에서 그는 불과 엿새 만에 해고되었는데, 이것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여러 차례의 해고 가운데 첫 번째였다. 작업조장에게 공장의 업무 과정을 단순하게 고치는 것만으로도 작업 효율이 증대되고 필요 인력을 감축할 수 있다는 기획안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업무 과정을 효율적으로 개선하면 공장이 더 많은 돈을 벌고 결국 노동자들도 더 많은 임금을 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노동자들은 신출내기 견습공 주제에 노동 수요를 줄이는 구조조정을 제안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괘씸죄에 걸려 해고당한 경험으로 인해 그는 개인의 창의력을 가로막는 모든 집단, 특히 노동자 집단인 노동조합에 대해 불신하게 되었다.
헨리는 일주일에 2달러 50센트를 받는 조건으로 제임스플라워사의 견습공이 되었는데, 회사가 지불하는 보수로는 주당 3달러 50센트인 하숙비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퇴근 후에 시계수리공으로 일하며 부족한 생활비를 벌었다. 다른 사람의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언제나 부업을 한 헨리는 정작 최고경영자가 되자 노동자들의 부업을 엄격히 금지했다.
제임스플라워에서 아홉 달 동안 일한 헨리 포드는 증기기관에 대해 배우고 싶어서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큰 드라이독기계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드라이독은 선박용 증기기관을 제작해 배에 장착해주는 회사였기 때문에 그가 원한 대로 배울 것이 아주 많았다. 그에게 직장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지식을 가르쳐주는 좋은 학교였다. 3년간 디트로이트에서 일하면서 기술자로 제법 명성을 얻었지만, 1882년 아버지의 병환 소식을 듣고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간다. 윌리엄은 40에이커의 삼림을 주며 아들이 고향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헨리 역시 농촌 지역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변 농가들을 순회하며 농부들의 고장 난 기계를 수리하는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자동차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해서 틈틈이 디트로이트로 나가 최신 기술을 소개하는 잡지를 구입해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독일의 니콜라우스 오토(Nikolaus Otto)와 고틀리에프 다임러(Gottlieb Daimler)가 개발한 가솔린엔진에 대한 기사를 읽고는 자신도 이처럼 가볍고 조그만 엔진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헨리는 디어본 근처의 그린필드에서 열린 연말 파티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될 클라라 제인 브라이언트(Clara Jane Bryant)를 만났다. 클라라 역시 농부 집안 출신으로 열 남매 가운데 장녀였다. 첫눈에 반한 헨리는 적극적으로 구애했고, 두 사람은 1888년 4월 11일 디트로이트에 있는 세인트제임스 성공회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관계는 헨리가 죽을 때까지 59년간 지속되었는데, 클라라는 언제나 그를 신뢰해주었고 무엇보다 자동차에 대한 그의 열정과 사랑에 대한 굶주림을 이해해주는 존재였다.
두 사람은 헨리가 직접 지은 디어본의 작은 오두막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헨리는 오두막 뒤편에 자동차 실험실을 만들고 가솔린엔진을 개발하기 위해 온갖 실험을 반복했지만 신통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제까지 다뤄온 증기기관과 달리 가솔린기관을 만들려면 전기에 관한 지식이 필요했는데, 그는 전기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전기에 대해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디어본을 떠나 디트로이트의 에디슨조명회사에 취직하기로 결심한다. 클라라는 디어본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의 뜻을 저버릴 수 없어서 함께 디트로이트로 이주한다. 헨리는 자신의 살림집 창고에 실험실 겸 작업장을 만들었는데, 회사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이곳에 처박혀 가솔린 엔진 개발에 몰두했다. 기술자로서 수완이 뛰어난 덕분에 회사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 1893년에 본사의 주임기사로 승진했고 외아들 에드셀 포드(Edsel Bryant Ford)가 태어났다.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말 없는 마차' 산업에 뛰어들다
인류는 언제부터 말 없는 마차(automobile)에 대해 꿈꿔왔을까. 춘추전국 시대 노(魯)나라의 유명한 목공 공수반[公輸班, 일명 노반(魯班)]은 노모를 위해 자력으로 추진되는 정교한 수레를 제작했다고 하는데, 후한 때 왕충(王充)은 『논형(論衡)』이란 책에서 이 수레에 대해 "모든 장치가 잘 갖추어져 있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았다"고 기록해놓았다. 공수반으로부터 700여 년이 흘러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발명해 험준한 산길에서도 힘들이지 않고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서양은 또 어떠했는가. 기원전 800년경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s)』에도 저절로 움직이는 벌컨의 삼륜거(Vulcan's Tricycles)에 대한 묘사가 나오며,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태엽의 힘을 이용한 태엽 자동차의 스케치를 남겼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 역시 증기분사식 자동차 모형을 제작했다. 하늘을 날고자 하는 욕망 못지않게 말 없는 마차에 대한 인류의 욕망 역시 이처럼 강렬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동으로 움직이는 이동 수단이 현실에서 가능해진 것은 프랑스의 공병 대위 니콜라 조제프 퀴뇨(Nicholas Joseph Cugnot)가 1769년에 최초의 증기자동차를 발명하면서 시작되었다. 대포를 견인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삼륜식 증기자동차는 무거운 증기 보일러를 사용했기 때문에 15분마다 한 번씩 물을 보충해야 했고 속도는 시속 5킬로미터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 증기자동차는 너무 무거워 운전이 어려웠고 간단한 브레이크 장치마저 없었던 탓에 파리 교외 언덕에서 벽과 충돌한 뒤 화재가 일어나 파괴되고 말았다. 그 덕분에 퀴뇨는 세계 최초의 증기자동차 발명가란 영예와 더불어 최초로 교통사고를 일으킨 사람이란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영국이 제1차 산업혁명을 성공시켜 세계의 공장이 된 19세기 초, 미국은 막 산업화의 첫걸음을 뗀 수준이었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20세기를 변화시킬 엄청난 발명과 기술혁신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의 전기 산업과 듀폰사의 화학 산업은 제1차 산업혁명기를 이끈 철강 그리고 면방직 공업과 구분되는 신산업이라 불리며 대단한 각광을 받았다. 이 시기에 미국의 산업은 영국이나 유럽의 대량생산 방식과 다른 미국 특유의 대량생산 방식을 구체화해갔다. 미국식 대량생산 방식이란 전용 공작기계를 사용해 호환 가능한 부품을 대량으로 제조하는 것이었다. 유럽에 비해 숙련 기술자가 부족한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생겨난 것인데, 부품 간 호환이 가능한 최초의 대량생산 방식은 조면기를 발명한 일라이 휘트니(Eli Whitney)가 소총 생산에 도입한 방식이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부품 간 호환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 소총은 같은 회사 제품끼리도 부품을 교환하기 어려울 만큼 정밀도가 떨어졌다.
미국을 모든 사람이 주목해야 할 공업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은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이었다. 전기에너지를 빛에너지로 바꾼 에디슨의 전구는 밤을 정복했고,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의 석유램프를 급격하게 대체하면서 방적공장 등에서 심야 작업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1882년 에디슨에 의해 세계 최초의 발전소가 건설되었고, 전등과 전기 모터가 개발되어 전동기를 이용한 전차(電車)가 거리에서 운행되기 시작하자 누구나 앞으로 세상의 모든 에너지원은 전기가 될 것이며 미래의 이동 수단 역시 전기 자동차가 될 거라고 믿었다. 최근 전기를 이용한 하이브리드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가 실용화되고 있지만 자동차 하면 여전히 가솔린을 연료로 사용하는 내연기관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헨리 포드가 집 뒤편에 있는 작은 실험실에서 가솔린엔진과 끙끙대며 씨름하던 당시에는 상식이 아니었다.
19세기가 끝나가던 1896년 6월 4일 새벽 세 시, 헨리 포드는 마침내 최초의 포드 1호를 완성했다. 두 대의 자전거를 결합한 것처럼 보이는 네 개의 바퀴에 마차의 차대를 얹고 자신이 직접 만든 2기통짜리 가솔린엔진을 장착해서 '네 바퀴 달린 자전거(Quadricycle)'를 완성한 헨리는 그제야 포드 1호가 통과하기엔 실험실 문이 너무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장이라도 실험을 하고 싶던 그는 도끼를 들고 실험실 문짝과 벽을 부숴버렸다. 모두 잠든 고요한 새벽의 디트로이트 거리에서 포드 1호를 운전하면서 그는 자신이 만든 말 없는 마차가 인류의 새로운 이동 수단이 될 거라고 믿었고, 자신이 그 어떤 연구자보다 뛰어나고 새롭고 특별한 것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은 너무 가볍고 앙상해 보이는 그의 자동차를 무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이해하고 격려한 사람은 오직 발명왕 에디슨뿐이었다. 이때부터 헨리는 에디슨과 각별한 우정을 나눴는데, 자동차 산업으로 거부가 된 훗날 에디슨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에디슨의 초기 실험실을 고스란히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했고, 1929년에는 에디슨의 전구 발명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빛의 축제를 기획하는 것은 물론 모든 비용을 대기도 했다. 기술자로 경력이 쌓이면서 명성이 높아지자 에디슨조명회사는 그에게 회사 업무 전체를 책임지는 감독직을 제안했다. 다만 그에 따른 조건으로 자동차 개발을 포기하고 회사 업무에만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헨리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고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다.
자동차 레이서 헨리 포드
1899년 8월, 헨리 포드는 예전부터 자기를 후원해오던 윌리엄 메이버리(William C. Maybury)를 비롯한 열두 명의 투자자와 함께 자본금 15만 달러로 디트로이트자동차회사(Detroit Automobile Co.)를 설립한다. 그러나 1980년대의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산업이 그랬듯이 20세기 초반의 자동차 제조업은 변동이 극심한 모험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비록 헨리가 뛰어난 기술자이며 가솔린엔진을 장착한 사륜차를 개발한 발명가이기는 했지만 1900년에서 1908년까지 미국에서는 500개가 넘는 자동차 제조업체가 하루아침에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당시 미국의 기계공업은 콜트(Colt) 권총을 비롯해 싱어(Singer) 재봉틀, 타자기, 자전거 등 많은 분야에서 대규모 생산 설비를 갖춰가고 있었지만 자동차는 여전히 손으로 제작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헨리 포드가 수석 엔지니어로 일하던 디트로이트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자동차 제작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실제로는 거의 아무것도 만들지 못했다. 차체와 엔진은 소액 주주인 닷지 형제(Dodge Brothers)의 공장에서 가져왔고, 헨리는 그저 부품을 조립하는 정도였다. 그나마도 2년 동안 24대를 생산하는 데 그쳤다. 기업의 이익을 앞세우는 자본가들 앞에서 기술자 헨리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사실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기술혁신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일어났지만 자동차가 산업적 기반을 얻은 곳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유럽보다 인구는 적었지만 넓은 땅덩어리 때문에 자동차의 필요성이 더욱 컸다. 그러나 헨리 포드 이전의 자동차는 부자만을 위한 것이었다. 헨리는 자동차를 싸게 팔면 팔수록 더 많은 수요가 창출될 거라 생각했다. 수요가 창출되면 비록 한 대당 이윤은 적더라도 판매량이 늘어 이를 만회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만약 그가 생각한 대로만 된다면 자동차는 더 이상 부자의 장난감이 아니라 미국인 누구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제품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디트로이트자동차의 투자자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헨리는 결국 이들과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는 수많은 자동차 메이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뭔가 특출한 기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때마침 클리블랜드의 자동차 제작자 겸 카레이서 알렉산더 윈튼(Alexander Winton)이 디트로이트의 자동차업자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것을 훌륭한 기회로 생각한 헨리는 자신이 만든 26마력짜리 2기통 자동차를 몰고 윈튼에게 도전했다. 윈튼의 자동차는 40마력의 강력한 엔진을 장착했던 터라 사람들은 모두 윈튼의 승리를 예상했다. 그런데 결과는 헨리 포드의 승리였다.
예상대로 새로운 투자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헨리포드자동차(Henry Ford Co.)를 설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헨리 포드 한 사람만으로는 부족했던지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뛰어난 자동차 기술자로 평가받던 또 한 사람의 헨리인 헨리 릴런드(Henry Leland)를 영입했다. 자동차에 관한 한 누구보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해왔던 헨리 포드는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받았지만 릴런드 역시 자동차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술자 가운데 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헨리 포드는 한 사람만 선택하라고 요구했고, 불과 넉 달 만에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그를 해고한 헨리포드자동차는 얼마 후 릴런드가 개발한 신모델명을 따서 회사 이름을 캐딜락(Cadillac) 자동차로 바꾸었다. 이 회사는 장차 포드자동차의 라이벌이 될 제너럴모터스(GM)에 인수되어 제너럴모터스의 최고급 브랜드가 되었다. 한편 헨리 릴런드 역시 자신의 자동차 회사를 만들었는데 이 회사 이름은 릴런드가 만든 최고급 자동차의 이름을 딴 링컨(Lincoln) 자동차였다. 링컨자동차는 1922년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에게 인수돼 포드자동차에서 생산하는 최고급 자동차 링컨컨티넨탈이란 브랜드가 되었으니 두 사람은 이후에도 기묘한 인연으로 맺어진 셈이다. 두 번의 뼈아픈 경험에서 교훈을 얻은 헨리 포드는 두 번 다시 남의 밑에서 일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기술자로서의 자긍심에 상처를 받은 그는 No. 999와 애로우라는 이름의 경주용 자동차를 만들어 또다시 자동차 레이스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대중을 위한 자동차 T형 모델과 혁신적인 생산성의 비결
자동차 레이스의 승리는 다시 한 번 기회로 다가왔다. 디트로이트의 석탄 상인 알렉산더 맬컴슨(Alexander Y. Malcomson)이 손을 내민 것이다. 두 사람은 1903년 6월 함께 포드자동차회사(Ford Motor Co.)를 설립했는데, 이번엔 헨리 포드가 부회장이자 설계자, 기능장이자 공장장이며 총지배인이 되었다. 포드자동차는 A형 모델을 출시한 지 1년 만에 9만 8,000달러의 이익을 냈다. 그러나 경영 2년째에 접어들면서 동업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헨리는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 때부터 품었던 뜻을 펼쳐 값싸고 대중적인 자동차를 만들고 싶었지만 맬컴슨은 부자를 위한 고급형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헨리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1년이 넘도록 치열하게 다툼을 벌였고, 결국 맬컴슨의 지분을 모두 인수하는 조건으로 그와 결별했다. 맬컴슨과 결별한 뒤 1908년 10월 1일, T형 모델을 출시할 때까지 그는 A, B, C, F, K, N, R, S형에 이르는 여덟 개의 자동차 모델을 만들면서 자신이 추구하려는 자동차 모델이 무엇인지 실험했다.
내 목적은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다. 가격이 매우 저렴해서 어느 정도의 봉급을 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유할 수 있고, 신이 창조한 이 넓은 세상에서 가족들과 함께 여가를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모든 사람이 자동차를 구입할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생길 것이고, 실제로 집집마다 자동차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말은 도로에서 사라지고 그 대신 자동차가 달리게 될 것이다.
대중을 위한 자동차, 가격이 저렴해서 중산층도 구입할 수 있는 자동차라는 그의 꿈이 실현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나 많았다. 우선 도로가 없었다. 대중이 자동차를 마음 편하게 운전하며 어디든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1900년 무렵 미국에선 도시를 제외한 지역의 포장도로가 불과 32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도로는 울퉁불퉁한 비포장 상태였고, 비라도 조금 내리면 온통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이 때문에 보통의 자동차를 타고 도시에서 시골로 간다는 것은 흡사 롤러코스터를 타고 아마존 정글로 모험을 떠나는 것과 같았다. 게다가 그런 도로를 달려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데 포드가 만든 T형 모델은 비포장도로조차 거침없이 달릴 정도의 내구성을 갖추었다.
이보다 어려운 문제는 값싼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노동자의 일인당 연평균소득은 500달러 미만이었다. 자동차 한 대의 평균 가격은 2,000달러가 넘었는데, 이것은 그나마 벌이가 좀 더 나은 보통 공장노동자가 일주일 동안 받는 봉급의 100배에 해당했다. 헨리가 생각해낸 유일한 해결책은 T형 모델 한 가지만을 집중적으로 생산해서 생산성을 높이고 제품 가격을 최저로 낮추는 것이었다. 1908년 그가 T형 모델을 생산하기 전까지 미국은 물론 자동차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유럽의 어떤 자동차 메이커에서도 한 모델만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업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헨리는 디트로이트에서 견습 기계공으로 일할 때부터 눈여겨보아온 여러 공장의 시스템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포드자동차의 뛰어난 기술자들과 함께 당시 기준으로는 첨단 설비를 갖춘 기업들을 견학했다. 미국 최대의 우편판매업체 시어스로벅(Sears Roebuck)의 일관공정화된 물류 시스템을 살펴봤고, 시카고의 대규모 도축장에 설치된 컨베이어 시스템과 통조림 공장, 철도제어기를 생산하는 주물공장 등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면서 포드자동차만의 생산 방식을 연구했다. T형 모델을 생산하기 위해 여덟 가지 자동차 모델을 실험했던 것처럼 그는 훗날 '포드주의'라 불리게 될 독특한 생산 시스템과 철학을 구축할 때까지 자신이 공들여 영입한 최고의 인재들과 함께 수많은 생산 시스템을 견학하고 실험했다.
포드가 일으킨 혁명적인 생산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이 컨베이어 벨트(조립라인, assembly line)의 중요성을 언급하지만 사실 컨베이어 벨트는 생산성 증가에 가장 중요하거나 반드시 필요한 혁신 요소는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작업을 세밀하게 나누어서 재배치하고 이들을 일일이 관리·감독하는 테일러 시스템도 아니었다. 포드 이전의 다른 업체들에서도 이미 테일러의 방식을 받아들였고 컨베이어 시스템 또한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테일러주의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적용한 공장의 노동자들도 여전히 기능별, 그룹별로 설치된 다용도 기계들을 이용해 제품을 생산했고, 한 단계가 끝나면 다음 단계로 이동해가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포드가 이들과 달랐던 점은 자동차 한 대를 제작하는 모든 공정에 따라 거기에 꼭 맞는 도구와 기계를 만들고, 작업에 필요한 기계들을 일일이 작업 공정 순서대로 배치했다는 것이다. 모든 기계는 오로지 한 가지 공정에만 사용되었고, 각각의 공정을 연결하는 수단으로 컨베이어 벨트가 이용되었다.
다시 말해 헨리 포드는 열두 살 때 처음 만나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서로 조금의 틈도 없이 맞물린 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시계 태엽 장치를 공장의 생산 시스템에 적용한 것이다. 조그만 시계 속에 들어차 있는 온갖 기계장치처럼 포드자동차 공장의 기계장치들은 오로지 한 가지 목적으로만 사용되었고, 작업과 작업 사이의 맥을 끊을지도 모를 비연속적인 단계는 최대한 줄였다.
당시 자동차 한 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략 5,000여 가지 부품이 필요했는데, 노동자들은 불필요하게 허리를 굽히거나 고개를 돌릴 필요가 없도록 맞춤된 작업대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맞춰 동일한 작업을 기계처럼 반복했다. 그 결과 이전에는 750분(12시간 30분)이 소요되던 자동차 조립 시간이 93분(1시간 33분)으로 크게 단축되었다. 이에 따라 최초로 출시되던 1908년에 825달러였던 T형 모델의 가격은 1913년에 550달러, 1916년에 360달러, 1920년에는 255달러가 되었다.
T형 모델은 시장에 출시되자마자 대히트를 기록하며 그해에만 1만 607대가 팔려나갔다. 포드는 생산 속도를 높이기 위해 포드 T형 모델의 색깔마저 검은색으로 통일해버렸는데, 그 이유는 당시 개발된 도료 가운데 가장 빨리 마르는 색상이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다. 1914년 포드자동차의 종업원 1만 3,000명은 T형 자동차 26만 7,720대를 생산했는데, 이것은 나머지 299개 자동차 회사에서 6만 6,350명이 생산한 28만 6,770대와 맞먹는 숫자였다. 포드자동차의 노동자 한 사람은 다른 자동차 업체 노동자 여섯 사람 몫의 자동차를 생산해냈다. 어떻게 1만 3,000명의 노동자가 6만 6,000여 명의 노동자와 맞먹는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비법은 무시무시한 노동 강도였다.
일당 5달러와 8시간 노동제의 빛과 그림자
1914년 1월 5일, 헨리 포드는 기자들을 불러놓고 폭탄선언을 했다. 앞으로 포드자동차는 하루 최저임금을 5달러로 인상하고, 9시간 노동에서 8시간 노동으로 근무시간을 단축하며 연말에는 이익분배금으로 1,000만 달러를 내놓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당시 다른 제조업체의 일당이 평균 2.34달러에 불과했는데, 그것의 두 배가 넘는 임금을 지불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다음 날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은 일당 5달러 지급은 '경제적 범죄'에 가깝다고 공격했고, 경쟁 업체와 은행들은 조만간 포드자동차가 망하고 말 거라며 비웃었다. 1938년 최저임금법이 제정될 때까지 미국에는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한 사회적 장치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기업주 스스로 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하고, 연말에는 이익분배금까지 지불한다고 선언했으니 경쟁 업체들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마르크스 대신 포드를!"이라 외치며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당장 그다음 날부터 포드자동차 공장 문 앞은 '포드맨'이 되기 위해 찾아온 수많은 노동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질서를 유지하려는 경찰과 충돌해 부상자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헨리는 이들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우수한 인력만을 골라 쓰는 여유를 즐겼다. 보수적인 자본가들은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공격했고, 어떤 이는 그를 최고의 자선사업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헨리 자신은 "인도주의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신념이 있다면 오로지 한 가지, 좀 더 값싼 자동차를, 좀 더 많이, 좀 더 단시간에 생산해 최대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었다.
하루 5달러 임금과 8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그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헨리 포드가 일당 5달러와 8시간 노동을 선언하기 직전인 1913년까지 포드자동차 노동자의 이직률은 무려 380퍼센트에 달했다. 시계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생산라인은 엄청난 노동 강도로 노동자들을 몰아세웠고, 이들은 스스로 기계의 일부 혹은 기계보다 못한 존재로 느껴지는 상황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1,000명의 노동자가 신규로 투입되어도 한 달을 버티는 사람이 100명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공정을 단순화하고 부품을 표준화하여 숙련노동의 중요성을 약화시켰다고 할지라도 제품의 품질을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위험한 수치였고, 더 이상 노동자를 구할 수 없어 공장을 멈춰야 할지도 모를 위기 상황을 의미했다. 게다가 일관 작업라인이기 때문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의도적으로 실수를 하거나 불순한 의도로 작업 속도를 늦추려고 마음먹는다면 전체 작업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일당 5달러는 우리가 고안해낸 최고의 비용 감축 조치 가운데 하나였다."
훗날 헨리 포드는 이처럼 회고했는데, 이 말은 사실이었다. 그런 순간에 터져나온 폭탄선언은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시켰고, 포드자동차의 비인간적인 작업장 분위기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거두었다. 무엇보다 이 선언은 PR 측면에서도 대단히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광고비 삭감 효과까지 있었다. 선언 이후 3년간 포드자동차는 1억 달러 이상의 순이익을 남겼는데, 이것은 포드의 임금 상승이 가져온 효과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결과물이 무엇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포드자동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포드 차를 구입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해졌다는 것이다.
포드 T형 모델의 엄청난 성공은 언제나 자신의 선택이 가장 옳은 거라 믿어왔던 헨리의 독불장군 성격을 두드러지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고임금을 미끼로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갔다. 포드자동차는 노동자들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체크인 시스템(출퇴근시간기록기)을 도입하고, 조립라인을 따라 움직이는 생산 방식이 중단되지 않도록 직원들의 휴식시간을 화장실 가는 시간을 포함해 딱 한 번, 15분의 점심시간으로 제한했다.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은 작업 기계에 앉거나 기댈 수도 없었고, 작업 시간 중에 휘파람을 불거나 말하거나 담배 피우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되었다. 헨리는 작업장에서 이런 규칙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하기 위해 회사 내에 '감시자'들을 배치하고 공장을 순회하며 감독하도록 했다. 감시자의 눈을 피하기 위해 포드 공장 노동자들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일종의 복화술로 대화를 나눴는데 이것을 '포드 속삭임'이라 불렀고, 감시자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무표정을 가장하는 것을 '포드화'라 불렀다.
포드의 노동자 감시 체계는 작업장 밖에서도 멈추지 않았는데, 생산적인 노동을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가정환경과 건전한 생활습관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일당 5달러의 임금 정책은 노동자들을 작업장 안과 밖에서 감시하고 참견하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이때 헨리 포드가 내세웠던 규칙들을 살펴보면 직원들은 검소하고 절약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적당한 집(특히 하숙생을 들이지 않은 집)에서 살아야 하며, 부업을 해서는 안 되었다. 헨리는 특히 여성들의 사회생활에 대해 극도로 혐오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포드자동차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의 아내는 직업을 가져서도 안 되었고, 노동자 자신은 물론 그 자녀들까지도 좋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 특히 노동조합 관련자나 지지자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이민노동자의 경우엔 반드시 영어 공부에 진전을 보여야 하고, 자신의 종교 생활이나 문화생활을 위해 작업 시간을 어기면 안 되었다. 흡연이나 음주, 도박 등 건전한 육체와 도덕적 품성을 해치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도 금지되었다. 1920년대에 이런 헨리 포드를 풍자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었다.
월스트리트 주식중개인 한 사람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포드는 정말 사회주의자처럼 말한다니까."
그러자 상대의 대답.
"그래, 하지만 뭐가 문제야. 말만 그렇고 행동은 우리처럼 하는데. 그러면서 탈도 없잖아."
헨리 포드의 독단적인 경영 방식은 노동자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19년 헨리는 외동아들 에드셀을 포드자동차의 사장 자리에 오르도록 한다.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에드셀과 측근들은 변화해가는 시장 분위기에 맞춰 T형 모델에도 변화를 주고 싶어 했다. 예전에 헨리 와 함께 T형 모델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데 많은 공로를 세운 이들이었지만, 헨리는 어떤 건의도 들어주지 않았고 도리어 회사에서 내쫓았다. 포드자동차 영업망을 구축하는 데 크게 공헌한 제임스 커즌스(James J. Couzens)는 떠나야 했고, 전부터 헨리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닷지 형제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19년에서 1921년 사이에 수많은 업무 보좌관, 회계 담당자, 인사 담당자가 쫓겨났는데, 그 가운데에는 판매 시스템과 딜러 조직망을 구축한 노벌 호킨스(Noval Hawkins)와 제조 분야 담당자 윌리엄 누젠(William S. Knudsen)도 포함되어 있었다. 호킨스와 누젠은 포드자동차에서 해고되자마자 곧바로 제너럴모터스에 채용되었고, 누젠은 제너럴모터스에서 사장 자리까지 올라갔다.
헨리는 아들 에드셀을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점찍어 놓았었기 때문에 그가 어릴 때부터 우편배달 등 여러 가지 잡무부터 시작해 회사 업무를 익힐 수 있도록 했다. 에드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시간 공장에 자신의 사무실을 마련했고, 25세 때인 1919년엔 포드자동차 사장이 되었다. 재임 기간에 그는 포드자동차가 변화해가는 시대 상황에 발맞춰 따라갈 수 있도록 여러 변화를 추진했지만 아버지 헨리 포드는 T형 모델만 고집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에드셀이 자동차 디자인에 대해 아버지와 달리 훨씬 미학적인 태도를 취한 것 못지않게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우호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포드 부자의 태도는 어떻게 달랐을까. 1935년 뉴욕 주 상원의원 로버트 F. 와그너(Robert F. Wagner)에 의해 만들어진 '와그너 법(노사관계법)'은 미국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노동조합을 만들고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많은 제조업체에 노동조합이 설립되었지만 헨리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노동조합의 설립을 막고자 했다. 1937년 5월, 포드자동차에 노조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포드자동차 공장 문 앞까지 일제히 행진하며 모여들자 그는 조직 폭력배들을 고용해 이들과 맞섰다. 수많은 사람이 포드의 구사대에 구타당했고 기자들은 필름을 빼앗겼다. 그 와중에 몇 사람의 노동조합 운동가가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에는 에드셀과 친분이 두터운 지식인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포드 부자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헨리에 의해 쫓겨나거나 자발적으로 그의 곁을 떠났지만, 아들 에드셀은 아버지의 온갖 무시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 없었기에 서서히 병들어갔고, 결국 1943년 암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0세기의 물질적 풍요와 노동하는 인간의 그늘
작업의 분할과 단순화, 기계화, 연속화를 편성 원리로 하는 미국식 대량생산 체제는 생산성 향상이라는 관점만 놓고 보면 기계와 노동의 결합을 통한 합리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형태였다. 이 같은 생산 체제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기능이나 판단, 주관을 생산 공정에서 철저히 배제하고 정밀한 기계 체제에 맞춰 노동하는 새로운 인간형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포드주의적 생산 체제에 편입된 노동자는 기계를 조작하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에 의해 조작당하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산업화 시대가 도래했고, 제품을 만들어내는 전체 과정을 한 사람이 모두 담당하던 시대가 끝나버렸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분업 이론이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하면서 새로운 보상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생산량을 계산하기 위한 대리 변수로 시간이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사람들은 출퇴근시간기록기를 쓰기 시작했고, 생산량에 관계없이 일한 시간에 따라 돈을 받게 되었다. 바로 이 시점부터 생산량을 늘리려는 경영진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노동자 진영의 끊임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이 한창 고조될 즈음,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이자 비즈니스 구루인 앙리 파욜(Henri Fayol)과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Taylor)가 등장했다. 그들은 주어진 시간 내에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시간동작 연구를 창시했다. 직원들에게는 추가적으로 중간휴식, 휴가, 병가, 출산휴가 등의 혜택이 주어졌다. 산업사회에서 생산량을 제한하는 유일한 요소는 시간이었다. 다시 말해 시간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세상은 시계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관심과 보상 체제 역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시간이 되었다. 시간당 얼마를 받는지에 따라 성공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게 되었다. 주어진 시간 내에 일을 마무리한 사람에게 보상을 지급하는 성과급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시대를 정의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지만, 채플린의 〈모던타임스〉가 풍자하는 대로 해석하면 '시간은 곧 돈'이란 의미다. 이것은 산업 시대의 자본가가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선 노동자의 시간을 최대한 쥐어짜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시간과 화폐의 결합을 자본주의 생산 체제는 '생산성'이란 말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계급투쟁'이 실제로는 자본과 노동 사이에 벌어진 '시간 투쟁'이었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헨리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시간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선사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1926년이 되자 그는 혁신적인 주5일 근무제를 도입했는데, 3년 후인 1929년 11월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허버트 후버(Herbert Clark Hoover) 대통령은 그에게 노동자 임금을 삭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대통령의 요청에 부응하는 의미에서 헨리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7달러로 인상했는데, 그 직전에 3만 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물론 남은 직원들은 임금 인상 이전보다 50퍼센트나 늘어난 작업 할당량을 처리해내야 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포드자동차는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유능한 사람들을 해고한 탓도 있지만 헨리가 끝까지 T형 모델의 변화에 반대하는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T형 모델은 주로 비포장도로가 깔린 시골 농촌 지역에서 운행하는 초보 운전자를 위한 자동차로 개발된 탓에 점차 자동차의 디자인과 쾌적한 승차감을 요구하는 고객들의 요구를 따라갈 수 없었다. 이런 요구를 충족시킨 곳은 제너럴모터스였다. 헨리는 가격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했기에 노동 통제를 강화하여 더 이상 낮출 수 없을 만큼 가격을 낮췄지만 소비자들은 T형 모델을 구입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디트로이트 부근 하이랜드 파크 공장 가동을 중지시키고 모든 설비를 디어본의 리버루즈 공장으로 이전한 뒤 새로운 자동차 모델을 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워낙 거대한 생산 설비인 데다가 시계처럼 융통성 없이 포드 T형 모델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목적에만 적합하도록 맞춰진 제작기계들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어 포드자동차는 거의 반년 동안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했다. 그 결과 손실액은 2억 5,000만 달러에 달했고 시장 점유율은 3분의 1로 떨어져버렸다.
그런데 헨리 포드의 생산 양식과 경영 방식은 엉뚱한 곳에서 주목받았다. 1923년 뮌헨쿠데타의 실패로 감옥에 갇힌 히틀러는 헨리가 쓴 베스트셀러를 읽었다. 이때 그에게 감동을 준 것은 헨리의 경영 방식뿐 아니라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반유대주의자이자 반사회주의자, 반노동조합주의자란 사실이었다. 헨리는 자신이 경영하는 신문 『디어본 인디펜던트(Dearborn Independent)』에 반유대주의를 선동하는 글을 80여 차례나 실었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왕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된 히틀러는 훗날 75세의 생일을 맞은 헨리에게 독일 최고의 훈장인 독일대십자훈장을 수여했다. 독일인이 아닌 외국인 중에서 히틀러에게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이외에 헨리가 유일했다. 사실인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헨리 역시 히틀러와 나치당에 적지 않은 정치자금을 보냈다고 한다.
유일한 자식 에드셀을 앞서 보낸 헨리는 그 4년 후인 1947년 4월 7일, 디어본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록펠러나 카네기(Andrew Carnegie)처럼 많은 기부금을 내진 않았지만 사후에는 포드 재단을 위해 수십억 달러를 기부하도록 했고, 재단은 그의 유산 상속인들이 내야 할 상속세 3억 달러를 절약해주었다. 이후 재단은 자유주의적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헨리가 말년에 저지른 온갖 기행과 노동조합 탄압, 반유대주의 등의 오명에서 그의 명성을 지키는 데 이바지했다.
헨리 포드가 처음부터 대량생산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니면 T형 모델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급하기 위한 임기응변과 실험이 결과적으로 놀라운 생산 혁신을 이룩한 것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어쨌든 포드주의 생산 양식과 자동차의 대량생산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화를 초래했다.
놀라운 경영 혁신은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다시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로 퍼져나갔으며, 이념의 장벽을 넘어 볼셰비키 러시아의 주요한 생산 양식이 되었다. 그에 의해 꽃피워진 자동차 산업은 조명용 램프의 연료에 불과했던 석유의 새로운 용도를 찾아내 오늘날 화석연료의 5분의 1이 자동차 연료로 사용되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간의 이동수단이던 말과 노새를 먹이려고 귀리와 건초를 재배하던 땅이 인간을 위한 곡물 재배지로 변모하면서 미국 농업의 구조조정을 촉발했다. 도심과 교외를 연결하며 건설된 도로는 도시의 확장을 가져왔다. 헨리 포드로부터 촉발된 다양한 변화는 도시의 규모와 역할을 변화시켰고, 국가적인 도시계획을 수립하도록 만들었다. 포드주의의 도입으로 20세기 산업의 노동생산성은 50배 향상되었고, 노동자들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주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상대적 고임금의 혜택을 누리며 노동하는 주체에서 소비하는 주체로 편입되었다.
마지막으로 헨리 포드가 의도치 않은 변화가 있었다. 전문화된 생산 기계의 도입으로 숙련공의 필요성이 사라지며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약화시킨 것으로 평가된 포드주의는 단일 작업장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함께 일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대단위 노동조합을 건설할 수 있게 해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때 노동조합을 탄압하던 포드주의 시스템이 도리어 노동조합을 강화했다는 이런 평가는, 역설적이긴 하지만 최근 포스트포드주의의 여파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양산되는 현실을 살펴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21세기를 맞은 오늘날, 지구상에는 6억 대의 자동차가 있고 해마다 6,000만 대가 생산되고 있다. 어떤 이는 포드주의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은 '시간이 곧 금'인 자본주의적 시간 질서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저당 잡힌 채 산업사회의 무간지옥(無間地獄)을 살아간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는 영화 〈모던타임스〉 못지않게 현대(modern)라는 시간의 의미에 대해 날카롭게 묘파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회색 사나이들은 평온하게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시간을 세라고, 또 돈을 모으려면 시간을 저축하라고 설득한다. 사나이들은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시간을 도둑질해가는데, 사람들이 시간을 저축하면 할수록 정작 그들의 시간은 점점 더 빠르게 사라지기 때문이다. 셈을 할 줄 몰라서 시간은 곧 돈이라는 등식에 속아 넘어가지 않은 단 한 사람 모모만이 스스로에게 시간의 꽃들을 보이며 말한다.
"시간은 생명 그 자체요, 생명은 인간의 가슴속에 머물고 있다."
자기계발과 자기경영이라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저당 잡히지 않은 시간의 주인으로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이 운전이든 정비든 손쉽게 할 수 있는 자동차입니다. 현대 기술을 총동원하여 가장 단순하면서도 최고의 성능과 재질을 가진 차를 만들겠습니다. 그 가격은 어지간한 봉급생활자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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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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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헨리 포드 –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전성원,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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